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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시작과 마지막

소명의 시작과 마지막

 

 

 

 

 

 

'소명의 시작과 마지막'

신명기31:1-8

 

 

 

 

세상의 시작이 있는가하면

 

끝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우리의 시작을 잊어서도 안되지만

 

우리 인생의 끝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된다.

 

 

나이가 불혹이 넘다보니 인생으로 볼때 이제 내려간다는 생각이 든다.

 

모세는 40에 광야로 갔는데, 끝이라고 여겼는데

 

그의 40에는 준비였었다.

 

40에 준비하고 80에 불러서 120에 갔으니,

 

인생의 시간이 잘 배분된것같다.

 

그렇게 보면

 

내 나이 33에 사역을 시작했는데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실 나이에 나는 시작이다.

 

33년을 기다리고

 

33부터 사역시작하니

 

이제 10년을 지나왔다.

 

어찌보면 부족해서 아직 준비하는것같다.

 

광야같은 시간이다.

 

 

아니 여기는 광야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깨달아야 광야가 끝이 날테데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스라엘은 40년을 돌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모세도 40년을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실때 죽을만큼 그 의미를 몰랐다.

 

사람이 참 깨달는것이 우둔하다.

 

 

내가 보내는 이 시간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깨달음이 깊어지며

 

그분의 눈으로 볼수 있는 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모세가 하는 마지막 설교와 기도를 통해 소명의 시작과 마지막을 보려한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다.

 

교회도 그냥 어느날 시작되지는 않는다.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는 아니다.

 

소명에 의해 부르심에 의해 시작되는 교회가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 인생에 있어서 소명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나?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모세의 소명은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

 

수없이 듣는 이야기지만 이것이 답이다.

 

소명은 부르실때만 가능하다.

 

 

부르심이 없는 사역은 참 고달프다.

 

부르심이 없는 일은 광야의 시간과 같다.

 

부르지 않으면 응답할수 없고

 

부르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한다.

 

할수 있으면 거부하라.

 

할수 있으면 내 뜻을 내려놓으라.

 

그리고 거듭거듭 부르심을 확증해야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감사한것은 우리가 소원할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는것이다.

 

 

 

 

나는 20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때 담임목사님이셨던 고 이송신 목사님께 물었다.

나라고 말하지 않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뭐라고 하실겁니까?

하시는 말씀이 '할수 있으면 거부해라. 맞다면 하나님이 억지로라도 부르신다'

사람마다 부르심이 다르지만 나는 그 말을 믿고 거부했다. 10년 죽을 고생했다. ^^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빨리 가는것이 좋다.

 

 

 

 

 

한국에서 사역할때 교사분이 신학교를 가겠다고 오셨다.

회사에서 과정을 하시고 가정도 아이도 있는 분이었다.

정말 가슴이 뜨거워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오셨다.

한가지만 여쭈었다.

'소명은 받으셨습니까?'

'소명이 뭡니까???'

 

그분은 그 시간으로 신학교 가기를 멈추었다.

 

나는 그분이 그 시간으로 신학교를 가면 어떤 아픔의 시간을 지나야하는지 알기에

정석을 가르쳐 드리고 싶었다.

 

 

 

소명이 없는, 부르심이 없는 사역은 내 열심이지 하나님의 일하심은 아니다.

 

 

가정환경적을 모태신앙이든지,

 

불신가정에서 복음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 신학교에 오는 분들을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는 시간을 지나야한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 모른다.

 

철저히 광야를 지나야 하나님의 음성, 부르심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본 전도사님, 사역자만해도 자녀가 아내가 가정이 엄청난 고난을 지나는 현장을 본다.

 

사역자는 부르심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한다.

 

사역자는 반드시 소명을 받아야 그길을 갈수 있다.

 

그것을 확인 하는 시간이 광야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부르심, 준비하심, 시작하심이 없는 교회는 나의 업적이 될 가능성이 많다.

 

나의 바벨탑이 될 가능성이 짙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부르셔서 세우는 교회가 끝가지 건강하게 갈 가능성이 높다.

 

 

시작을 하나님이하셔야 과정도 마침도 하나님이 하신다.

 

내 뜻대로 시작했다 안되면 책임져 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푸시기는 하지만,

 

응급처치 말고는 별 손대는 것이 없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이다.

 

모세의 설교는 자신이 이야기하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는 들은것을 전하는것이다.

 

내가 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는 연설, 강연과 다른것이다.

 

 

잠시 시간을 내어 인터넷을 뒤지면 수없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설교과 예화들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그런데 왜 그것으로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는가?

 

변화되지 못하는가?

 

나를 두고, 나의 공동체를 두고

 

나의 목사가 나의 사역자가 들은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듣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에서,

 

책에서, 잡지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하니 사람이 변하지 않는것이다.

 

영감이 없는것이다. 영혼의 변화가 없는것이다.

 

 

설교에는 책에서든 잡지에서든 하다못해 영화를 통해서도 말할수 있다.

 

그러나 메인 핵심은 하나님께 들은 이야기를 해야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는가?라고 물으면 내가 어떻게 설명하랴?

 

들은 사람만 안다.

 

말로 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소명은 들음,

 

부르심에서 온다 했다.

 

설교는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인격적 교제를 통해서

 

깊은 기도와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순간순간 주시는 영감들을 통해서 그분의 말과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왜 부르심이 중요한가?

 

왜 듣는것이 중요한가?

 

마음이다.

 

직접 듣지 않고 불리워보지 않으면 마음이 오지 않는다.

 

모세의 설교는 피를 토하는 마음이다.

 

모세의 설교는 피고, 생명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다.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사역자는 세상에 훌륭하게 만들어진 영화보다 못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명을 받은자가 그래도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할수 있다.

 

하나님이 부른 자에게 그분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시57:7]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곳에 노래하고 찬송하고 일하고 사역하고 열매와 영혼이 있다.

 

 

 

성경의 어느 사역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말씀하심 앞에

 

마음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며 일하지 않은 사역자가 없다.

 

 

 

우리 소명의 시작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이 부르실때, 말씀하실때 어려운 인생의 여정에 그분이 책임지시며

 

보호하심으로 넉넉하게 일할수 있다.

 

 

모세의 소명의 시작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둘째는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야한다.

 

 

 

진짜 소명의 시작이 언제인가?

 

자신의 약함이 드러날때이다.

 

약함이 드러나는 시간을 지나야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하신다.

 

하나님 입장에서 나의 약함을 만지심이 사역의 과정이지만

 

우리입장에서 나의 약함이 회복되지 않으면

 

진정 힘찬 사역을 하기 어렵다

 

아니 또 아픔이 반복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사명을 거부했다.

 

왜?

 

자신의 약함이 회복되지 않았다.

 

약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진실되고 정직하게 하나님 나는 사람이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겁이납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단지 내가어찌가며, 나는 부족하오니라는 말고 자꾸 감추려한다.

 

감추면 죽는다.

 

가기는 가지만 진짜 사역은 못한다.

 

 

약함이 드러날때 하나님을 잡는다.

 

약함의 과정이 하나님의 빛앞에 비춰질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된다.

 

 

모세는 그과정을 지나고야,

 

하나님이 약함을 채우는 시간을 지나서야 그는 진짜 하나님과 일하고 찬양하게 되었다.

 

그것이 언제인가?

 

유월절 사건 후다.

 

모세는 그후에 진짜 사역을 한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한다고 사역하는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을 한다고 사역하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진짜 알때 우리는 진짜 사역하는것이다.

 

 

욥이 동방의 의인이라 칭했다.

 

하나님도 칭찬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하고 나서야 진짜 의인이 된다.

 

 

요나가 사역을 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끝까지 모르고 사역했다.

 

박넝쿨도 아끼는 네마음처럼 나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내 마음을

 

네가 왜 모르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요나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는 요나서가 끝날때까지 사역한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사역하는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의 마음을 찾은것이다.

 

나의 약함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마음을 알고 그는 사역한것이다.

 

 

내가 맡은 사역의 현장에

 

반드시 잊어서는 안되는 한가지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나의 약함을 채우시고 회복하셔서

 

그분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유는 그분이 마음을 두시는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들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약함을 일부러 드러내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보다 자신의 마음이 앞섰다.

 

그것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셔서 사역의 현장으로 보내신다.

 

 

회복된 베드로가 베드로 전후서에서 변화된 수많은 그의 모습을 볼수 있다.

 

 

약함을 회복하시고 치유하시고 자신에게 부르심을 통하여

 

사역의 은혜를 주신 흔적들이 있다.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는 약함이 드러나고 회복을 통하여 이제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성경에 그렇게 기록한다.

 

뿐만 아니다.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사랑으로까지 이르기를 이야기 한다.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본다.

 

 

 

약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자신의 그늘에 숨어 나오지 않으려한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자들을 아프지만 그것을 드러내신다.

 

그래야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분의 일,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아픔의 광야를 지나게 하시는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드러낼 용기만 있다면 드러내는것이 가장 빠르게 가는것이다.

 

나또한 그 약함을 오랬동안 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 약함을 넘으라고 여기에 보내셨다 믿는다.

 

 

 

바울처럼 차라리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자.

 

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진지한 손길이 있기를 소망하자.

 

그때 우리는 사명자로서의 삶을 잘 감당할수 있을것이다.

 

 

 

 

세째는 소명의 확증이다.

 

 

 

하나님은 불렀다고 그날 당장 일터로 내 보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사역적으로 사명의 확증의 시간을 보내게 하신다.

 

 

모세는 사명을 거부하자 하나님께서 지나 역사를 쭉 설명해 주신다.

 

상당히 긴 부분을 하나님은 할애하셔서 설명하심을 볼수 있다.

 

 

내가 지식적으로 이해가 되도록 베려하신다.

 

 

그리고, 옆에 사람을 통하여 확증하게 하신다.

 

사람들이 그래 맞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셔서 아 하나님의 뜻이 맞구나 그렇구나 공감하게 하신다.

 

 

개인적 소명과 공동체적 소명이다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는데 무엇이든지

 

내 마음에 확증의 환경을 주시는것이다.

 

 

아론이 공감하고,

 

장로들이 공감했다.

 

 

그리고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은 내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하신다.

 

지팡이든지, 손이든지 무엇이든지 내가 직접 체험하도록 하셔서

 

나 스스로 맞구나라는 확신을 주신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이다.

 

엘리야가 기도하지 않으면 3년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도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시간동안 엘리야가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를 훈련하신다.

 

왜?

 

소명을 감당할수 있는 확신을 주시기 위함이다.

 

선지자들과 싸우는 전쟁에서 이기도록 자신감을 불어넣는 시간이다.

 

내가 가서 되겠다는 확증을 주시는 시간이다.

 

 

까마귀, 과부의 집에서 한것은 확증이다.

 

 

죽은 아들을 살리자 과부가 뭐라고 고백했는가?

 

살려줘서 고맙다. 내 기도하겠다. 늘 도움을 주겠다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확증한다.

 

 

왕상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소명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할 확증, 확인,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이 과정을 지나야 우리는 사역의 시작이라 할수 있다.

 

내 안에 소명에 대한 확신도 확증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실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하지 않으신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가슴을 ?아,

 

마음을 담아 전할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역할수 있는가?

 

 

 

 

소명의 확증, 확신은 세가지로 온다.

 

 

1. 사람으로부터이다.

 

2.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이다.

 

3. 나의 재능을 통해서이다.

 

 

다 사명의 확신을 주는 도구들이다.

 

 

 

 

 

 

이런 소명의 시작을 통해서 수없는 일들을 지나고

 

모세는 가나안건너편에서 사명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다.

 

소명의 마지막은 무엇이어야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지속할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대신할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소명은 10년하고 말것으로 하면 안된다.

 

소명은 내 인생의 사명은 계속되어질때 그 가치가 영원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백성을 위하여

 

여호수아를 세운다.

 

그것이 모세의 마지막 사명이었다.

 

 

소명은 내 생애 끝이어서는 안된다.

 

영원히 이어질 소명을 붙잡고 살아야한다.

 

 

 

 

 

그런차원에서 모세는 몇가지 일을 했다.

 

 

 

 

첫째는 자녀들을 잘 교육하려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적을, 일하심을 계속해서 자녀에게 말하고 이야기하고 설교했다.

 

언약궤옆에 율법을 두게 하고 칠년에 한번씩 낭독해서 교육하고,

 

손에 미간에 기록하여 외우도록했다.

 

그것이 '쉐마'이다.

 

 

자녀 교육에 실패하면 미래는 없다.

 

우리가 일하는것 이상으로 자녀교육에 힘쓰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내 대에 끝이 난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를 잘 양육하고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체험하는 훈련만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축복을 전해 받는다.

 

 

 

 

둘째는 동역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

 

 

 

모세는 끝까지 아론을 지켰다.

 

그가 하나님의 벌을 받을때 목숨걸고 기도했고 함께 하는 시간을 40년 동안 보냈다.

 

나의 사명을 함께 공유하고 같은 마음으로 갈 사람을 만드는것은 다음을 위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세째는 제자를 키우고 세웠다.

 

 

모세는 가는곳마다 여호수아를 데리고 다녔다.

 

말씀을 따라 훈련시키고 체험시키고

 

기도할때 옆에서 기도하도록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훈련을 시켰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끝까지 교육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지명하도록 만들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만 사역잘하다가 그만두는것은 교회적으로 큰 손실이다.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과 오정현 목사님이 그렇고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차기담임목사제도는 이런 손실을 막는 중요한 제도이다.

 

굉장히 성경적이다.

 

사역적 공백이 없고,

 

함께 평생을 사역해온 사명을 공유하고 이어받고

 

목회적 노하우를 전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게 하는것은 하나님도 원하시는 것이다.

 

 

 

 

이 세가지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사람이 소명을 따라 사람을 세울때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어진다.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기 시대를 살때 성경저자는 사사기의 문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경험한 사람이 다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호수아는 좋은 사람,

 

하나님의 귀한 일군은 맞지만

 

다음을 준비하는 사역자는 아니었다.

 

당대만 좋을것인가?

 

다음 세대도 좋은것인가는 사명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사역의 마지막도 잘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소명이 아니어도 좋다.

 

부르심이 없어도 좋다.

 

 

하나님은 사람에 관심이 있다.

 

어떤 사람은 소명으로 사역자가 되고,

 

부르심으로 특별한 사명을 감당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사명을 주셨다.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은 제자들을 회복시키고 돌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기를 사람을 세우라했다.

 

 

그 사람들이 우리다.

 

 

그들로 우리가 있다.

 

 

우리는 다시 마지막 사명앞에 설것이다.

 

 

 

 

'사람을 얼마나 세웠느냐?'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