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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

아담과 하와

 

 

 

 

 

 

 

아담과 하와

 

 

 

 

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으로부터 성자 예수님이 나오고

성령하나님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자신입니다.

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아담으로부터 하와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입니다.

하나입니다.

 

 

자신을 사랑함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와는 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원리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내 자신이 그 안에 있다고 여겨질 때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원리는 예수님이 이웃 속에 있다고 믿을 때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아내 사랑 이웃 사랑은 자신을 사랑함 입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사랑함이며 교회인 그리스도를 사랑함이다.

 

 

왜 작은 자에게 한 것을 그렇게 중요시 여기나요?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얼마나 믿게 했느냐를 물으셔야 할 같은데

그것이 평가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전해야합니다.

그러나 믿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믿게 했느냐의 능력이 평가의 기준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의미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일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내가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려워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사람을 찾으십니다.

기도의 응답이 되어줄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목마른 자를 마시우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없을 때에 돌아본다면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착한 일 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한 것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도의 응답이 것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소자,

하나님은 자신과 가난한 ,

하나님은 자신과 갇힌 ,

하나님은 자신과 배고픈 ,

하나님은 자신과 목마른 ,

하나님은 자신과 벗은 자를 동일시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한 것을

하나님과 함께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냥 가난하고,

그냥 배고픈고,

그냥 목마른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제자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나만 존재합니다.

네가 없습니다.

 

 

오직 나만 있습니다.

네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너로 인식하지 않고 오직 나로 인식하고 함께하는 나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유는 네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벗은 몸으로 혼자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의 하나됨입니다.

네가 나로 인식되는 단계!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표가 바뀌니 자꾸 많이 가지려합니다.

목표가 변하니 자꾸 높아지려합니다.

목표가 틀리니 나만 살려합니다.

 

 

예수님은 자꾸 우십니다.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목표와 달라서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나이고

예수님의 목표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예수님이 없는 곳에 거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 속에 계십니다.

그것을 모르니 자꾸 싸우고

그것을 모르니 경쟁하고

그것을 모르니 비교하고

그것을 모르니 슬픔에도 기쁨에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곳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너무 평범한 친구의 마음,

친구의 슬픔,

친구의 아픔속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래서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하지만 따름의 현장은 양속입니다.

사람들 속입니다.

친구의 삶의 현장 속입니다.

 

 

다른 이를 자신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속에 자신 속에 거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다른 이를 예수님의 목표로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과 믿음은

 

죄송합니다.

가짜입니다.

 

 

아무리 높고,

아무리 능력 있고

아무리 그럴듯한 모양으로 산다 해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간단합니다.

나만 보이면 가짜입니다.

그러나 작은 ,

다른 이가 나로 보일 그것은 진짜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

그런 각오로 사는 사람.

  사람이 진짜입니다.

 

 

교회가 성장합니다.

교인의 숫자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진짜가 많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진짜가 많은 교회가 목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만들고

믿음은 능력을 키우고

믿음은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친구가 자신이라 여기고

친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놓을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자가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18:8) 

 

아담과 하와가 회복해야 !

너를 나로 인식하는 믿음의 회복입니다.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입니다.

 

 

믿음!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

그것이 믿음입니다.

 

작은 자를 섬기는 시작!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자꾸 자가 되려하고

자를 섬기려합니다.

 

 

그래야 내가 커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증명하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자와 가까이하고

내가 자가 되어 세상에 나를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숫자를 세어 자신의 큼을 증명하려다 정말 죽을 했습니다.

것을 증명하다가 죽습니다.

좋아하다 자손이 망합니다.

것과 놀다 미래가 없습니다.

 

 

작은 자라고 하는데 자꾸 것을 기웃거립니다.

찾는 사람,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

높은 좇다 한국이,

한국교회가 망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미래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것만 추구한 끝은 아픔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영성이

 <>,

<높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추구하는 영성은

<작은>,

<소자>입니다.

 

 

세상이 가는 것에 반대로 가야 하는데

세상보다 곳이 교회입니다.

 

 

세상보다 숫자 세기 좋아하고

세상보다 높은 자리 좋아하고

세상보다 부자를 좋아하고

세상보다 인기를 좋아하고

세상보다 권력을 좋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대로 배우고

믿음을 배우지 못하고

세상보다 세상적인 세상의 법칙을 배웁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합니까?

줄서기,

서열,

등수,

높고 낮음에 관한 모든 것을 없애야합니다.

 

 

일등 이등도 교회에서 없애야합니다.

누가 많이 전도했는가도 없애야합니다.

잘하는 사람 앞장 세워서 비교하고

경쟁하는 분위기를 교회가 먼저 없애야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죽입니다.

숫자 세다 죽을뻔한 다윗을 기억해야합니다.

 

 

숫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카운터되기 보다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높음과

자신의 인기와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렇습니다.

 

 

가장 그것에 빠른 사람,

목사입니다.

선교사입니다.

그보다 사람,

목사이면서 선교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서로 만나면 제일 먼저 묻는 것은

교인숫자와

일년 예산입니다.

 

 

그것이면 서로의 서열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를 때는 끝까지 예의를 지킵니다.

그것이 정해지면 서로의 높고 낮음이 정해집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대학이냐를 묻는 순간 서열이 정해집니다.

연봉이 얼마냐를 알면 순서가 정해집니다.

 

 

남편의 직책이 아내와 아이의 직책이 됩니다.

그것이 세상인데

세상보다 더한 교회, 교인, 목사가 되었습니다.

 

 

청년이 전화를 했습니다.

한국이 문제라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가 회개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진심입니다.

저의 아픔이고

저의 책임이고

저의 문제입니다.

 

 

제가 회개해야합니다.

제가 변해야합니다.

제가 바뀌어야합니다.

 

오직 세상의 답은 내가 변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 말할 없습니다.

누구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대통령도

정치인도

목사도

선교사도 아닙니다.

 

오직 입니다.

너를 나로 인식하는,

속에 하나님을 있고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기고

섬길 아는 그것에서 희망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남편이 아내까지도 너로 여기는 것이 죄입니다.

나를 나로 여겨야하는데

자신의 갈비뼈로 만든 자신을 남으로 여길 부끄럽고 남이 됩니다.

 

 

신앙의 회복,

믿음의 회복은 남이 자신으로 여겨지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몸이라는 것으로 회복을 정의 했습니다.

교회의 정의는 몸입니다.

너를 나로 인식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서로가 되지 않기에

그리스도가 친히 몸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너가 나로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입니다.

 

 

희망은 너가 나로 인식 가능합니다.

너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섬기는 것입니다.

몸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너를 너로 인식하면 절대 섬기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버린 것은 비교로 말미암아 나를 너로 인식할 때부터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비교를 없애고

줄세우기를 없애고

높고 낮음을 없애는,

작은 자를 존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믿는다 하지만

비교하고 계산 하고

높고 낮음을 계산하고

숫자를 세는 곳에서는 믿음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속에 많은 영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잠깐 그것을 생각해봤습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