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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열매가 뭔가?

포도나무 열매가 뭔가?

 

 

 

 

 

 

 

 

 

 

 

 

 

 

포도나무 열매가 뭔가?  (15:1- 27)

 

 

 

예수를 믿는 것이 목적입니까? 열매 맺는 것이 목적입니까? 오늘 예수님은 내게 붙어 있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거해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열매 맺는 가지는 열매 맺도록 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예수님은 열매의 관점에서 접근하십니다.  이것이 양분화 되어 생각할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믿는 자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믿음의 관점보다 열매의 관점에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다고 하는 의미와 예수님이 믿는 다고 하는 의미는 다른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는다는 의미와 예수님이 원하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다는 의미는 많이 다른것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가 그렇고 우리의 목적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을 구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인데 자기에게 붙어 있는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열매 맺는 나무는 열매 맺게 하시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제거하여 버린다고 하십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결국 열매로 알게 됩니다. 믿음은 결국 열매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다고 하나 열매가 없다면 스스로 열매가 없는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것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의 열매를 능력이나 힘이나 권세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14장에 이어 15장에도 예수님 자신을 계속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아니라 포도나무와 농부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 농부에게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열매 없는 가지는

농부 아버지가 제하여 버린다고 설명합니다. 아버지 되신 농부의 목적은 많은 가지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어제 발을 씻기라 하셨고,  계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능력을 받는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15장에서 그것을 연결해서 포도나무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보혜사 성령도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14:13-16). 이름으로 구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발을 씻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어떤 열매를 보고 가지를 제하여 버리든지 제하지 않든지 하십니까?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어떤 열매를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가 되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한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서로 사랑>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한 같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믿음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아니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발을 씻는 것도, 선생이 제자의 발을, 주인이 종의 발을 씻는 것같이 사랑의 삶을 계명으로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포도나무되신 주님께 붙어 있는 다는 것의 의미는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예를 듭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

 

 

 

원래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 었습니다. 그냥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백성이 되고, 그러다 자녀가 되고 후사가 되고 이제는 <친구>라는 호칭까지 허락하십니다. 원래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백성으로 삼으셨고, 후사 자녀로 삼으셨고 이제는 친구로 삼아주십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사랑하여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는 사람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

 

 

 

종에서 이제는 친구로 불러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만큼 하나님은 사랑에 목이 마르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종에서 친구로, 예수님의 친구로 허락하고 열어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하십니다.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

 

 

 

누가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까? 붙어 있으면 아무나 친구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분의 명령,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세상의 연애인이나 대통령과도 친구가 되려면 아니 말이라도 한번 하려면 엄청난 연줄이 필요합니다. 아니 같은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의 친구가 있는 길을 하나님이 지금 놓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 안에 있음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 안에 거하면 그분의 사랑 안에 있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말고 어떤 열매도 하나님께는 판단의 기준이 아닌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사랑으로만 이야기 하십니다. 그래서 발을 씻기셨고 서로 씻기라 하셨고 그래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열매를 보고 판단한다 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불에 던져진다 했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하늘의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했습니다. (7:15-23)

 

 

무슨 열매입니까? 오늘 본문을 연결해 보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그럴싸한 말과 그럴 싸한 자리와 그럴 싸한 위치와 그럴듯한 행동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능력을 구하라 하지 않습니다. 권능을 구하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구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놓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로 주님은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고민입니다. 그런데 아픔입니다. 그래서 답답함입니다. 우리가 어디 답을 모릅니까? 우리가 어디 정답을 모릅니까? 사랑해야하는 몰라서 못합니까? 알아도 안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나님 되신 주님이 친히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셨습니다. 하나님되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합니까?

 

 

첫째,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몰라서 사랑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죄를 탕감 받았는지 몰라서 나에게 행한그 작은 상처와 미움과 핍박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인 의식입니다. 나는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 나는 사람과 다르다는 바리새인 의식이 있어서입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그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누구보다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만 사랑을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와 사랑의 크기를 안다면, 아니 내가 얼마나 죄를 지었고 얼마나 용서를 받았는지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전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용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씻음과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의 모범입니다.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음을 잊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이유를 찾을 없습니다.

 

 

 

둘째, 자신을 사랑해서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까요? 그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께 속했기에 세상은 당연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미워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서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해서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니 세상은 우리가 미운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사랑해서입니다. 세상의 마음, 세상의 , 세상의 법을 사랑해서입니다. 세상과 우리가 다른 유일한 한가지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증거는 <서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픔입니다. 사랑 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 사랑 없는 사람을 만날 , 우리는 나의 존재가치와 소속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는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내가 주님께 속했는데 이렇게 사랑할 없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에는 , 눈에는 눈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길을 가라 했습니다. 오리를 원하면 십리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내어주라 하십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입니다. 세상과 다른 믿는자의 본은 사랑 받을 자격 있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채우실 은혜를 바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가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사랑 받을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은 은사다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맞습니다. 사랑은 은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믿는 자가 구해야 은사입니다. 삶입니다.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에서 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쉽다면 계명 명령이 아니겠지요.

 

숙제입니다. 세상에 던지신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라 하십니다.

 

 

언제 우리가 기쁨을 회복할까요?  사랑할 가지는 기쁨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기쁨, 기쁨을 주님은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쁨의 근원, 사랑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얻었던 하늘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기쁨의 충만은 사랑이 아니고는 없는 것입니다.

 

 

기쁨을 언제 누려보셨습니까? 우리는 자꾸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만을 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기쁨 가운데 지내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서로 사랑>입니다.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 사랑>입니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계명입니다.

그러나 지킬 세상이 없는 평안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세상이 없는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어떤 결과를 가지고 주님께 가려합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주님의 사랑안에 있는 사람만이 서로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으로 보내기 전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서로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가능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양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고 발을 씻기는 섬김과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기 전에 주님은 반드시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백이 있는 곳에 서로 사랑의 아름다운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니 내려 놓을 있는 것입니다. 의인 의식, 자존심, 높아지려는 마음, 경쟁, 비교 모든 것을 내려 놓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럼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찾으시는 유일한 열매입니다.

 

 

가장 어려운,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하는 좁은 , 좁은 문의 본질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