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야 영광이다(요11:1-16)
아파야 영광이다.
에덴에서 세상을 향해 사람을 내 보내실 때 주신 것은 벌이다.
그런데 그 벌이 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다.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고,
남자는 종신토록 일을 해야 수고의 대가를 얻는다.
그런데 한가지 더하신다.
남자와 여자와 상관없는 것,
땅이 엉겅퀴를 내고 가시를 내는 것이다.
땅의 저주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벌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벌!
과연 그럴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위해
생명나무를 지키므로 죄 지은 인간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벌인가 사랑인가?
사랑이다.
죄를 가진 인간이 죄 가운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지키게 하셨다.
마찬가지다.
여자의 해산의 고통,
남자의 종신토록 수고,
땅의 가시와 엉겅퀴는 겉으로는 벌이나 실제는 사랑이다.
아파야 영광이다.
아파야 하나님이 보인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던 인간,
하나님의 전부를 자신의 전부로 여기려던 인간에게
하나님을 떠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험해 보게 하셨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떠나 인간은 아픔이다.
아픔 가운데 살아간다.
누구든지 이 나사로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 아픔을 통해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함께함이다.
거기에 진정한 회복이 있는 것이다.
회복의 의미는 하나님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영광이다.
우리의 영광은 아픔을 지나야 한다.
아픔을 지나지 않는 곳에는 오직 나의 깃발만 있다.
나의 깃발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깃발이 흩날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세상 사람들의 유일한 길이다.
오늘 나사로가 죽어간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그리고 죽어간다.
그런데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마디로 그의 병과 죽음을 정의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4)
아픔의 길을 지나야 영광이 온다.
우리의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다.
세상에 주신 죄의 대가는 한마디로 아픔이다.
그런데 아픔의 목적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에게 주신
여자에게 주신 해산의 고통,
남자에게 주신 종신토록 수고,
그리고 땅에게 준 수고의 대가가 없음 모두
아픔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지나야 하나님의 영광이 찾아오도록 하셨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다.
세상에서 아픔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길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파야 보이고
아파야 들리고
아파야 하나님이 일하신다.
사람이 에덴을 좇겨난 이유는 하나님 없이 살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파야 하나님이 필요하다.
아파야 하나님이 일하신다.
아파야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아파야 주님을 요청한다.
우리의 아픔,
아픔 많은 세상에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나사로를 통해 그것을 보여주신다.
나사로가 아프다니 주님은 한마디로 정의하신다.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하려함이라"
아픈가?
영광의 길을 간다.
아파야 영광이다.
영광을 본다.
영광을 알게된다.
아픈데 문제는 뭔가?
문제는 아파도 주님이 오지 않는 곳에는 영광이 없다.
주님이 오도록 해야한다.
주님이 찾아와야,
주님이 불러야
주님이 말씀해야하는데
그 주님이 아픔의 자리에 없으니
회복도
영광도 없다.
아픔은 주님을 부르는 신호탄이다.
아픔은 주님을 향해 손짓하는 내적 분화구다.
그래서 화산이 터지듯 터져야한다.
그래서 터지지 않는 아픔,
주를 부르지 않는 아픔은 영광을 위한 아픔이 아니다.
아플때 가장 안된것은
주를 부르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
주를 부르지 않고 자꾸 어둠으로 들어간다.
주를 불러야 회복이고
주를 찾아야 영광이다.
주님은 지독하다.
병들어 죽어가는데 이틀이나 더 다른 곳에 계신다.
한마디로 완전히 더 아프고
더 쓰리고
더 목마르고
더 죽을만큼이 되도록 기다리신다.
왜?
어설프게 아프면
어설프게 사람이 했다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서다.
완전히 아파서 죽어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나의 완전한 포기,
나의 완전한 엎드림이 있을 때까지 이틀을 더 유하신다.
이틀이다.
이틀의 의미는 나의 완전한 희망없음이다.
나의 완전한 포기이다.
나의 완전한 내려놓음이다.
이 이틀동안
우리는 목이 타들어가고
가슴이 터질듯하며
세상에 아무도 힘이 되지 못하며
소망 없음을 고백해야한다.
그래야 주님은 찾아오셔서 자신의 영광을 나를 통하여 거두신다.
하나님이 무정한가?
하나님이 무자비한가?
하나님이 냉정한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하나님은 긍휼하심이 날마다 새로우신 분이다.
그런데 왜?
세상이다.
세상이 아픔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아픔이 아니면 자신을 의지하며
아픔이 아니면 자신의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아프게
슬프게
외롭게
힘들게
살을 찢고
피를 ?아 내는 십자가를 가게하셨다
예수님의 아픔의 깊이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깊이와 같다.
예수님의 눈물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눈물이 된다.
예수님의 고통의 함성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애정의 함성이 된다.
인간에게 주셨던 아픔,
해산,
수고,
엉겅퀴의 아픔을 모두 예수님에게 솟아 부으셨다.
그리고 그 아픔을 예수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대로 다 받으셨다.
그리고 아픔을 지나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다.
아픔을 지나야 한다.
나의 아픔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픔이다.
그 아픔을 삼키고 가슴으로 안아
우리를 회복하시고 자신의 영광, 아들의 영광으로 돌리게 하신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의 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 아프게 주었던 인간에 대한 죄의 대가로서의 아픔을
마음 아프게 여기시고
함께 천국의 소망을 산상보훈으로 문을 여시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
아파야 영광이다.
세상은 아픔을 지나야 영광을 본다.
그것이 자신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길이다.
아픔 가운데 있는가?
영광을 볼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씨뿌림이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
아픔 없는 눈뜸이 없다.
아픔 없는 회복이 없다.
진정한 회복은 아픔을 전제로 한다.
그 아픔 한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함으로 우리에게 있다.
아픔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동행이 있기에
아픔이 소망이 되는 것이다.
아픈가?
영광이다.
그런데 아픔이 영광이 되는 두번째 조건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
아무에게나 아픔을 주지 않으신다.
사랑하는 자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셔야 하기에
아픔을 함께 지시며 아픔을 허락하신다.
우리의 아픔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이다.
그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신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헌신과 수고를 통해 영광을 기꺼이 드린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단어속에 숨은 의미이다.
사랑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영광돌림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생명을 주고 생명을 통한 영광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처럼,
우리와 예수님처럼!
아픔이 영광이다.
그것을 알 때 우리의 아픔이 사랑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