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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수동성

적극적 수동성

 

 

 

 

 

 

 

적극적 수동성(8:12-20)

 

 

 

세상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스스로 다닙니다.

 

세상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이 길이라고합니다.

 

세상은 서로를 판단할 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모두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세상과 예수님의 가장 다른 한가지는 세상은 어둠이고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어둠이 어둠이 되는 이유는 빛이 없어서입니다.

빛은 오직 세상에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어둠이 빛이 되는 유일한 한가지는 빛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때 그분의 사람들을 부르실때 그들에게 능력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다른 권위를 주신적이 없습니다.

 

다만 <따르라> 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스스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어둠의 속성>입니다.

 

 

스스로 따먹고,

스스로 걷고,

스스로 깨달으려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출3: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속성을 예수님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철저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존중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현장에서 잡혀온 간음한 여인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하는 것을 포기 하셨습니다.

아니 없다고 고백하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우리의 의로움은 오직 <스스로> 하지 않고 <따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스스로 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판단>입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15)

 

 

 

빛의 속성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까지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만 맡깁니다.

 

예수님 자신도 오늘 판단하지 않습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판단과 정죄의 속성은 어둠입니다.

 

 

다만 따르라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스스로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이 어둠입니다.

자신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둠의 속성으로 살려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자신의 희망없음을 판단합니다.

자신의 높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포기하고

아니면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 높은체하든지 스스로 포기의 삶을 삽니다.

그래서 모든 결정이 자신입니다.

스스로입니다.

 

자신뿐만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특별히 조그마한 잘못에도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잘못을 이야기하는 잘못이 언제적 것인지 보면 10 20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도 세상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만이 있는 일을 우리는 오늘도 너무 쉽게 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자도 판단도 정죄도 아니하시는 주님의 속성은

 

<>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빛이 빛되는 속성은 따름이라 말씀하십니다.

따름이 없는 빛의 속성은 결국 어둠이 됩니다.

스스로 빛을 발할수 없는 존재가 세상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작은 빛을 보고 스스로 빛이 되려하여 스스로 행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합니다.

 

다만 따름이어야합니다.

 

 

 

따름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두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름이라는 의미는 동행하다는 의미입니다.

 

동행은 내가 목적을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목적으로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적이어야 합니다.

목적을 우리는 스스로 만들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스스로 말하지 않고

한번의 행동도 스스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빛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행합니다.

 

사람에게 접근하고

사람들과 행동할 우리는 너무 많은 우리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둠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십년 광야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의미는

따름입니다.

 

결코 내가 먼저 목적을 정하고 없는 것입니다.

먼저 가고 먼저 행한 곳에는

철저한 배고픔과

뼈와 영혼을 시리게 하는 추위와 외로움

그리고  들어 가는 목마름만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스스로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주어지는 귄위입니다.

함께함으로 주어지는 빛의 영광입니다.

 

주님이 가는 곳만이 빛이고 영광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지 않고

따름이 없는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의 결과는 오직 판단만 남고

오직 정죄만 남고

오직 결국 돌로 죽이는 심판만 남습니다.

 

 

그것이 어둠의 결과입니다.

죽음입니다.

 

따름이 없는 곳에는 결국 판단의 마지막 죽음만이 있습니다.

만약 간음한 여인에게 빛되신 주님이 안계셨다면

판단하지 않는 빛으로서의 완전한 따름을 사셨던 주님이 아니라면

그곳에는 <죽음>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나에게,

나의 주변에

무엇이 남았습니까?

질문으로 나의 속성을 돌아보야합니다.

 

판단과 정죄로 죽음이 남았나요?

아니면 오직 따름으로 구원 사람이 남았나요?

 

 

경력이 쌓이고 지식이 쌓일수록 따름이 늘어나야 하는데,

이상한 것은 <스스로>가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경력과 지식이 쌓이는 만큼 스스로를 정의 하는 말들이 많아집니다.

스스로는 쌓이고 따름은 사라지는 현상이 많습니다.

 

따름을 결과로서 쌓인 경력과 지식이라면 더더욱 따름이 익숙해야 하는데

쌓이는 것만큼 예수님과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다 스스로 행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도

없는 자도

죄인도

누구든지 예수 안의 빛을 누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시간이 더 할수록 사역의 깊이가 더 할수록

십자가로 가까이 갈수록

<따름>의 정도는 더해집니다.

 

완벽한 따름의 경지는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십자가>의 단계입니다.

스스로가 아니라 따름,

<작은 따름>을 이뤄낸 삶이 모여진 것이 십자가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루아침에 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따름을 이뤄낸

따름의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의 거룩한 현재성입니다.

 

 

스스로 행하는 곳에는 자신만 남습니다.

그러나 따름이 있는 곳에는 빛의 영광 사람의 열매가 남습니다.

 

열매는 내가 따를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속성,

따름을 따를 가는 곳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따름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얻으신 것은

 

<가벼움>,

<쉬움>입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30]

 

 

그래서 주님은 넉넉히 사셨습니다.

넉넉함의 비밀은 <따름>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라야합니다.

  <따름> <스스로> 되지 않을 정도의 적극적 수용성을 가져야합니다.

 

잘못하면 적극적 자발성이 되면 결국 판단의 선을 넘어가게 됩니다.

 

 

짐이 무겁고

멍에가 어렵지 않으십니까?

따름의 문제가 있지 않으십니까?

 

열심히 살았는데 사람의 열매가 없지 않으십니까?

스스로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열심> 내가 뭔가를 하는 자발적 행위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열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열심이 아니라 따름으로 바꾸어야합니다.

 

내가 뭔가를 하는 스스로의 삶에서

빛의 근본이신 주님을 따름으로 바꿀 우리의 판단이 사라지고

우리의 정죄가 사라지고

오직 따름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리는 ,

영적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십시요.

만약 당신이 성령안에 거하신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너무 바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으십니까?

 

결국 죽음이 남습니다.

 

그러나 들리고 보인다면

거기에는 쉬고 가벼움만 남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배우라고 하신 의미입니다.

 

 

 

<따름>

 

인생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발방크교회 설교모습입니다.
발방크교회는 현재 건축에 관한 일들이 진행중입니다.
변함없이 기도부탁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