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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성숙, 신앙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3편(말)

영적성숙, 신앙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3편(말)

 

 

 

 

 

 

 

 

 

 

 

 

 

 

 

 

 

영적성숙, 신앙의 성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눈을 가지는 것이라 했다.

 

시각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일을 볼 때, '내가 보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는 나'가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내가 보는 눈에서 하나님이 보는 눈으로 변화될 때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보는 눈으로 볼 수 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눈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성숙한 삶을 살게 된다.

 

 

 

둘째는 가치의 변화이다. 기준의 변화이다.

               듣는 귀가 변화 되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가치의 변화가 와야 영적으로 성장한다. 

 

그것은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따라 산다.

 

그 가치가 하나님의 음성, 말씀을 통해 변화되지 않으면 성숙된 삶을 살기는 어렵다.

 

 

베드로는 '네 양이 먹이라'는 음성앞에 자기의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로 바꾼다.

 

비록 죽음이 앞에 있어도 그 길을 걷게 된다.

 

 

들어야 우리는 변화의 삶, 성숙의 삶을 살게 된다.

 

 

 

 

 

 

 

세째로 내면의 변화이다. 말의 변화를 말한다.

                믿음의 변화를 말한다.

 

 

말은 그 사람의 믿음의 얼굴이라 했다.

 

믿음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말이 변하지 않는다.

 

내면이 변화지 않은 사람은 말의 변화도 없다.

 

내면의 변화는 인격의 변화를 말한다.

 

인격은 말을 통하여 증명된다.

 

 

이스라엘은 말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신약의 수 없는 기적은 믿음의 얼굴인 말로 오게 되었다.

 

내 믿음이 있으면 말 속에 그 진실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은 믿음 없음을 말로 고백하고 그 고백으로 하나님은 대우하셨다.

 

말을 이쁘게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서울 사람들을 보면 말을 얼마나 이쁘게 하는지 모른다.

 

경상도 남자인 내가 서울 남자의 말을 들으면 힘들다.

 

얼마나 이쁘게 말하는지!

 

그런데 세월이 지나 알았다. 단지 이쁘게 말한다는 것 말고는 없다.

 

말이 이쁘다는 것과 믿음이 있고 없고는 다른 말이다.

 

내면의 변화와는 다르다.

 

 

 

말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광야를 지나야 한다.

 

광야를 지나면 그때야 믿음의 고백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말의 고백을 받아내시기 원하신다.

 

그 말의 고백을 위해 때론 자녀를 원하시기도,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도 하시고,

 

물도, 먹을 것도 없게 하신다.

 

 

말은 내 속사람, 내 내면의 얼굴이어서

 

나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것을 아픔이라는 칼로 도려내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이 원하는 수준의 말의 고백, 믿음의 고백을 받아내신다.

 

 

 

요나가 스올의 뱃속에서 드린 고백, 말은 변화된 그의 내면을 반영해준다.

 

말은 변화된 내면 만큼 자란다.

 

 

 

 

원래 말은 한 종류였다.

 

그런데 이 말이 하나님을 대적하자 하나님이 말을 흩으셨다.

 

 

말은 하나된 말이 있고 흩어진 말이있다.

 

 

하나된 말은 믿음의 말이요

 

흩어진 말은 죽이는 말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이다.

 

 

말에는 생명이 있고 죽음도 있다.

 

영혼은 생명을 심을 때 자라난다.

 

생명의 말을 심고 생명의 말을 뿌릴 때 자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이 보인다.

 

[욥33:3]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욥은 마음이 곧 말이라 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할 때 그의 영혼은 아직 흩어짐이다.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의 말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

 

 

 

 

죽어가면서 한 모세의 설교는 하나님이 보시는 방향과 그의 삶과 그의 말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말은 방향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향하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등지는 말이 있고 하나님을 향하는 말이 있다.

 

말이기 전에 말은 내 안에서 형체로 존재한다.

 

그것이 말이 되면서 공동체 속에서 일한다.

 

하나님 앞에서 일한다.

 

 

 

말은 일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말할 때 하나님은 들으시고,

 

우리가 말할 때 사람들은 움직인다.

 

 

말은 힘이있다.

 

 

그러나 말은 순서를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먼저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은 말로 행하셨다.

 

세상 모든것은 하나님의 말, 말씀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나중이 되어야 된다.

 

 

사람에게 말은 가장 나중이지 않으면 안된다.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일이 많아진다.(잠5:3)

 

그래서 말은 순서가 중요하다.

 

 

말은

 

보고,

 

듣고,

 

말하는 순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말하실 때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책임지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존이다.

 

우리의 말은 실존의 증명이어야 한다.

 

 

 

 

우리의 말 중에 가장 악한 말은 뭔가?

 

 

 

영적으로 자라가는 사람에게 가장 유해한 말이 뭔가?

 

 

그것은 자랑이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도 자랑, 외식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다.

 

 

 

 

 

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은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한다.

 

 

우리도 자신에 대해 자랑해야 하는 유일한 한가지가 있다.

 

'나의 약함'을 자랑해야 한다.

 

이 땅에 살면서 할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유일한 자랑은 약함이다.

 

 

 

자랑은 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했다.

 

 

스스로 수 많은 업적을 쌓아놓고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방법은 자랑이다.

 

 

자기의이다.

 

 

나를 높이지 말고 다른 사람을 높이라.

 

하나님을 높이라.

 

그것이 말의 유일한 목적이다.

 

 

아담이 범한 죄의 일순위는 말로 아내를 힘들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말은 방향도 있고, 힘도 있고, 순서도 있어야 한다.

 

아담은 이 모든 것을 다 실패했다.

 

아담의 말은 자신을 향하지 않고 여자를 향했고,

 

말의 힘으로 여자를 폭력했고,

 

말로 하나님이 가장 문제라고 지적했다.

 

 

 

말은 방향과 힘과 순서에 있어서 정돈이 될 때, 우리의 성숙도 자리를 찾아간다.

 

 

 

 

말은 생명도 죽음도 모두 향한다. 

 

 

 

 

말을 체질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말에 진실성이 없으면 그 말은 죽은 말이다.

 

 

한마디를 해도 말 속에 진실성, 즉 그사람의 삶과 인격의 무게가 실릴 때

 

그 한마디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말에 우리의 삶을 실어야한다.

 

 

눈의 변화를 통한 관점의 변화가 말 속에 실려야 한다.

 

들음을 통하여 가치의 변화, 기준의 변화가 말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을 통하여 지난온 세월의 무게가 함께 실려서 말의 능력이 나타남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간증은 자랑보다 힘이 있다.

 

자랑은 자기를 나타내지만,

 

간증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관점이 다르다.

 

가치가 다르다.

 

그래서 간증은 힘이 있다.

 

 

 

그래서 말보다 말씀이 능력이 있다.

 

말은 나의 인격만을 실어내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신격, 하나님의 관점, 시각, 가치, 기준을 통한 능력을 드러낸다.

 

 

그래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

 

 

 

말씀은 생명이다.

 

 

내가 말씀과 동화될 때,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내가 말씀이 움직이는 통로로서의 말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일을 하신다.

 

 

말은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의 일을 하는 통로가 될 때, 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신명기에서 모세의 말을 보면 출애굽기 3장에서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모세의 원래 말은 자신의 것만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자신의 말속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 말고는 없다.

 

 

그런데 그 말속에 앞서 말한 두 가지,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성공하고 나면 새로운 길을 내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말의 능력이 언제 오는가?

 

 

 

어떤 말은 힘이 있다 했다. 능력이 있다 했다.

 

왜 그런가?

 

말 속에 앞서 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점과 내면의 변화가 온 후에 말하면 능력이 생긴다.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할 때 능력이 생겼다.

 

단지 보고 들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보고 들으며 변한 관점과 변화된 내면의 믿음으로 말할 때 그때에야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왜 능력있는 사역을 했었나?

 

모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건들을 통해서 이 능력,

 

하나님의 관점과 가치의 변화를 통한 믿음을

 

말로 표현할 때 능력있는 사역을 하게 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세계를 전달하면서 본인도 하나님처럼 마음을 가지고,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고

 

관점의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변화된 자신을 함께 표현해 낸다.

 

그 때 그 말, 말씀 속에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말에는 어떤 의미에서 두 가지 밖에 없다.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원리를 말하는 것!

 

 

보이는 것이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하늘이 파랗다. 그 사람이 키가 크다. 이쁘다.

 

그런데 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안경을 거치고 나면 달라지게 된다.

 

보이지 않는 원리가 어떤것이냐에 따라 모든 보이는 것은 이미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똑같은 기적을 봐도 자기를 힘들게 하는 기적이 되기도하고(모세를 부르실때 보여주신 기적)

 

구원을 베푸는 감격의 기적이 되기도 한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함께 실수한 것이 이 보이지 않는 원리를 가지는 것이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이 원리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거부했다.

 

이스라엘도 이 원리, 관점을 가지지 못하자 광야에서 그렇게 실패하고 실수하는 말을 하게 된다.

 

 

 

 

수 많은 설교를 듣고,

 

대화를 하고 살아도 말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지 못하면

 

말은 그저 현상을 말하는 것 이상도 아하도 아니다.

 

 

말하기 전, 하나님의 관점으로서의 말이 될 때 우리는 영적성장에 이를 수 있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이다.

 

 

 

모세의 설교에는 현상만을 말하지 않는다.

 

재해석이 들어가 있다.

 

그 재해석이란 하나님이 보시는 눈이다.

 

그 눈으로 재해석 되어진 현상을 말할 때 그 말은 성숙한 말, 능력있는 말이 된다.

 

 

 

예수님께서 하실 많은 일 가운데 구약의 말씀을 재 해석해서 풀어주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의 관점을 말씀하고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다.

 

그 관점을 우리가 가질 때, 나의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말이 된다. 모세처럼~

 

 

 

야고보서에 말에 대한 이야기가 3장에서 수없이 나온다.

 

 

작지만 혀와 말은 인생의 결과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축복이냐 저주이냐?

 

그래서 결론이 말은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의 열매라고 한다.

 

나무가 어떤가에 따라 열매가 다르듯 변화된 내면, 관점에 따라 말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의 훈련전에 관점과 내면의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실수가 많다.

 

아니 현상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잠시라도 이 관점을 잊어버리면 엄청난 실수를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돌고,

 

모세는 죽을뻔 했으며,

 

결국 모세는 한번 잃은 내면의 변화로 가나안을 가지 못했다.

 

 

 

늘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눈을 뜨고 있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복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말에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제어하려 하지 말고

 

눈과 듣는 것에 성공하면 말은 제어가 된다.

 

 

 

모세는 오늘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에 세기고'라고 한다. (신10:18)

 

변화된 내면, 관점으로 되어진 말은 이미 말이 아니라 말씀이 되었다.

 

 

 

우리가 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해야한다'라고 베드로전서4장 11절에 기록한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해석(관점의 변화와 내면의 변화)을 통해 전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이 될 것이다.

 

 

 

 

 

 

영적성숙은 재해석 되어진 내면을 통한 말이 될 때, 참 성숙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