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 일과 될 일 사이(눅24:13-35)
예수님이 옆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과거의 이야기에 매여 있어서입니다.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24:14)
우리의 눈을 가리우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과거에 매여 있어서입니다.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24:14)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눅24:15)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24:18)
앰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한 것은 이야기입니다.
오직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 된 일> 입니다.
< 서로 이야기하며 > 했던 것은 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묻자 거기서 있던 그 일을 왜 혼자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과거에 있던 일,
이미 일어난 일,
과거의 일을 아는 것을 대단한 정보를 아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으로 무슨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처럼 착각합니다.
우리는 늘 과거의 이력서에 매여서 삽니다.
우리는 늘 과거에 매여 살기에 현재도 못보고 미래도 바꾸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된 일을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미래를 위해 이야기 하십니다.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24:25-26)
그것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보지 않고 과거를 이기기 위해서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꾸지 못할 과거를 자꾸 이야기합니다.
과거에 매여 왜 너를 과거에 일어난 이야기를 모르느냐고 예수님을 혼냅니다.
나의 미래는 내가 하는 이야기에 있습니다.
과거를 이야기 하는 사람을 봅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람을 만납니다.
아픔입니다.
과거를 아는 것이 무슨 큰 능력인양 힘인양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무서운 것은 우리의 눈을 멀게합니다.
과거를 이야기하면 무서운 것은 현재가 보이지 않고 미래를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꾸 < 한 것 > 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것' 이 아니라
< 할 것 > 을 말합니다.
<하실 것 > 을 말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풀어주니 제자들이 눈이 열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되어질 일을 미리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 된 일 >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된 일은 < 되어질 일 > 의 그림자입니다.
모세도 그림자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림자입니다.
이삭도 그림자입니다.
욥도 그림자입니다.
다윗도 그림자입니다.
다 그림자 입니다.
된 일을 말합니다.
된 일을 통해 < 될 일 > 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된 일이 아니라 될 일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된 일 보다 될 일을 말할 때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일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미래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 하실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꾸 과거를 꺼집어 냅니다.
과거에 했던 실수를 자꾸 이야기합니다.
과거에 했던 그 사람의 약점을 자꾸 말합니다.
그 약점을 말하고 과거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을 큰 힘으로 여깁니다.
내가 너의 과거와 약점을 안다고 말하면서 미래를 보완해주지 않습니다.
과거를 안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약점,
약함을 안다는 것은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있게 해야합니다.
왜 그렇게 못할까요?
그 사람이 과거에 매여 있어서입니다.
자신이 미래를 보지 못하면 절대 과거에 매이고 미래를 말하지 못합니다.
모든 대화와 이야기의 주제는 < 된 일 > 입니다.
과거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상처는 과거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이야기는 본인이 해야합니다.
그리고 던져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대를 말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해야합니다.
대화를 바꾸어야합니다.
생각을 바꾸어야합니다.
사단은 자꾸 과거에 매여 그 과거를 생각하게 하고
사단은 자꾸 과거에 매여 그 과거를 대화하게 합니다.
아닙니다.
사단의 바꿀 수 없는 이력서에 매여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이야기 해야합니다.
과거의 이력서가 아니라 미래의 이력서를 말해야합니다.
그 말이 우리를 생명으로 부활로 인도합니다.
말은 영입니다.
말은 생명입니다.
과거의 말은 죽은 영입니다.
과거의 생각은 죽은 생각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미래의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미래의 생각을 그려야합니다.
내 입에 말이 얼마나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지 돌아봐야합니다.
내 머리의 생각 중에 얼마나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돌아봐야합니다.
그 말이 생각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과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를 하면서 미래의 심판을 이야기 했습니다.
요나를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부활을 이야기 했습니다.
제자들이 버린 배와 그물과 부모와 형제를 이야기 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과거의 사람인 모세와 엘리야를 변화산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한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죽으실 것과 부활의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되어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는 과거를 말하고 예수님은 오직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거에 매여서 입니다.
제자들이 옆에 있는 예수님도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해서입니다.
제자들이 다 아는데 예수님 당신만 모른다고 우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안다는 것은,
과거를 말하는 것은,
과거의 지식에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
오직 하나입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과거에 매여있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
그런데 믿음은 믿음이 있어서 믿음의 말을 할 수 도 있지만,
믿음은 말을 하는 대로 믿음이 가기도 합니다.
믿음은 말입니다.
사단은 말로 믿음을 뺐었습니다.
그 믿음은 말로 다시 증명해야합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의 고백입니다.
단어가 모여 말이 되고
말이 모여 이야기가되고
이야기가 모여 인생이 됩니다.
그 인생이 모여 공동체가 됩니다.
단어를 바꾸고
말을 바꾸고
이야기를 바꾸어야합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을 잘 만나기 어렵습니다.
다 과거를 말합니다.
과거를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간증입니다.
간증 말고는 오직 미래를 말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말을 해야합니다.
앞으로 될 일을 생각하고 말하는 곳에
눈이 열리고
현실이 보이고
미래가 보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된 일> 과
<될 일>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말은 선택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된 일과 될 일 사이의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