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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성숙, 신앙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1편(눈)

영적성숙, 신앙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1편(눈)

 

 

 

 

 

11: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11:2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 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11:3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11:4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11:5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11:6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 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11:7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11: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1: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1: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 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1: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1: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1: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1: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영적성장, 신앙성숙이란 무엇인가?"

신명기11:1-17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볼 때, 모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도 없다.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서 다 죽어나가는 판에 혼자 살아 남은 것도 기적인데

 

왕의 공주에게 입양되어 죽을 인생이 하루 아침에 왕자의 삶을 살게 된다.

 

왕궁에서의 삶은 또 어떠했을까?

 

정통이 아닌 서자도 아닌 일게 평범한 아이가 왕궁에서 겪었을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러다 하루 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40년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그저 양이나 치는 목동으로 삶을 보내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백만 대군의 리더로 수 많은 기적을 경험했다.

 

그런 그가 한번의 실수로, 조상적부터 그토록 갈망하던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죽어야하는 인생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우리에게 영적성장, 신앙성숙이 무엇인지 그의 삶을 통하여 보여준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한번 묵상을 해보자.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

 

거룩한 백성이 되야 한다. 등등..

 

우리가 신앙적으로 자라고, 성숙하고 영적으로 성장해야함을 늘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것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오늘은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자.

 

 

 

신앙성숙과 영적성장은 필연적인 네 가지 변화로 오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영적성숙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성숙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수준까지 자라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다르다.

 

왕자로서의 성품이 다르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성품이 다르다.

 

모두 획일적으로 어떤 수준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과 목표에 이르는 것이 영적성장, 신앙의 성숙이다.

 

 

아브라함에게 원하는 목표가 달랐고,

 

모세에게 원하시는 수준이 달랐다.

 

요셉은 또 다른 훈련을 받았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에 맞는 수준을 요구 받았다.

 

 

하나님의 영적성숙은 일반적인 것, 그리스도인으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수준과 함께

 

그 사람에게만 원하시는 특별한 수준으로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성장, 신앙의 성장이다.

 

 

우리는 일반화 되어있는 신앙인, 그리스도인의 성숙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원하시는 수준으로 변화되는 것을 더욱 중요시 하신다.

 

각 사람들이 사는 환경과 형편과 여건이 다르기에 하나님은 각 사람마다 다른 수준, 성장, 성숙을 원하신다.

 

그래서 이 영적성장, 성숙은 획일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내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은

 

각 개인의 삶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막연한 목표가 될 수 있다.

 

결국 가보면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사는 삶의 과정은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 과정속에서 우리는 성장과 성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모세는 왕궁에서 자라며 수 많은 학문과 인격의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모세가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우수한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영적성숙과 성장은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성장시키는 개별 훈련을 광야를 통해서 하신 것이다.

 

 

성도들이 힘들어 하면 '기도하십시요,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요.'라고 말만 전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목사가 없다고 생각한다.

 

 

운동선수에게 '운동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습니까? 운동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할 때

 

코치나 감독이 '운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말로 선수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런 감독이나 코치처럼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기도가 되지 않으면 왜 되지 않는지?

성경이 안읽혀지면 왜 안읽혀지는지 분별하고 그것에 맞는 처방을 해야한다.

 

너무 지쳐 있는 사람이면 기도하라고 하면 안되고 먹이고 쉬게 해야한다.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그렇게 대햐 야한다.

 

기도가 필요한데 막연하게 기도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이면 120제자처럼 성령이 올 때까지 기도하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의 수준, 상황을 고려한 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정확하게 아시고 그에 맞는 훈련들을 하셨다.

 

그래서 오늘 모세는 40년 전의 모세와 40년후의 모세가 명확하게 바뀐 것을 볼수 있다.

 

무엇을 통해서?

 

모세의 말을 통해 보게 된다.

 

모세는 출애굽기 3장에서는 말만 하면 '내가' '나는' 이라는 말이 전부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 처음부터 지금 11장까지 바뀐것은 '여호와께서'라는 말이다.

 

 

여기에 모세의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 어떻게 변화 되었나?

 

 

 

 

첫째, 관점의 변화이다.

 

한 마디로 눈이 변했다. 시각이 변한 것이다.

 

참 영적성장은 관점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내 시각이 변화된 것을 말한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내가 바라보는 내가 전부였다.

 

나의 약함, 나의 약점, 나의 부족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자신없고, 힘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명을 받지 못하는 모세'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았다.

 

출애굽기3장을 가만히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이런저런 핑게를 댄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실 때, 모세의 첫마디는

 

'내가 누구이기에'(3:11)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하리이까'(13)

 

하나님께서 장로들에게 말하고 애굽을 나오게 하고 가나안을 정복하고 기적을 베푼다고 하니 모세는 또

 

'그들이 나를 믿지 않습니다. 나를 믿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지팡이 기적, 손이 문둥병 되게 하고, 하수로 기적을 베풀겠다라고 하니까

 

'나는 말이 둔합니다, 나는 입이 뻣뻣합니다 혀가 둔합니다'라고 한다.

 

계속해서 나는, 내가 라는 말로 사명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누가 입을 지었느냐 내가 네 말에 함께 하겠다라고 계속해서 설득한다.

 

하지만, 모세는 마지막까지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4:13)라고 거절한다.

 

하나님은 이제 노하셨다.

 

그리고 아론을 붙이겠다 하신다.

 

지팡이도 가지고 가면 내가 이적을 행하겠다라고 다 해주신다.

 

 

이정도 되면 모세가 예하고 갈만하다.

 

참 뻔뻔하다. 그래도 모세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가기는 간다. 지팡이도 가지고 가고 간다. 그런데 마음이 가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장인에게 하는 말에 그 마음이 나온다.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가다'라고 하지 않고 '내 형제들이 살았는지 보려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이면 말이 다르게 나올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내가 사명을 받았다.' 하고 기뻐할 것인데, 모세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닐 뿐더러

 

가는 걸음 역시 무겁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길에서 모세를 죽이러 오셨다.

 

 

모세는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뭐가 문제인가?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기적도 체험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도 받았다.

 

 

 

그러데 왜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지 못했는가?

 

 

결론은 모세의 시각이 변하지 않았다.

 

모세의 관점이 변하지 않은 것이다.

 

나를 보는 내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로 나를 봐야한다.

 

 

 

 

모세는 왜 가기를 거부했는가?

 

 

 

모세는 가장 두려운것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였다.

 

 

 

모세의 모든 대답은 '나는'  '내가'이다.

 

그것은 나를 포장해서 숨기고 있지만 진심은 내 안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숨어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숨기고 있다.

 

내가, 나는 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애굽에 가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배경도 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 왕위를 노렸지만,

 

공주가 죽자 정치적으로 죽음에 몰린 것이다.

 

이스라엘인인 자신의 미래를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하기 원했지만,

 

정치에 민감한 백성은 모세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결국 정치에도, 동족에게도 버림받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모세는 사람들의 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것인가가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나를 포장해서 그 안에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다.

 

이 두려움은 나를 생각하는 나에 대한 관점이 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아도 이것이 변화되지 않으면 기적은 단지 기적이다.

 

 

기적을 통해 나를 보던 나의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변화되는 것이 영적성장이다.

 

 

 

내가 했던 나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헤어나지 못한다.

 

내가 한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아야 한다.

 

내가 한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과거를 보아야 한다.

 

모세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만 보았다.

 

하나님은 과거를 통해 나에 대한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시각으로 변화되길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나는~~~'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로 명확하게 바뀌고 있다.

 

 

모세는 < 나에서 하나님 >으로 관점이 변화 되었다.

 

시각이 변화된 것이다.

 

 

사람들은 광야를 지나면 영적으로 성숙한다고 한다.

 

아니다. 아무리 광야를 지나고 아픔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훈련을 지나도 이 관점의 변화, 시각의 변화, 눈의 변화가 없다면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

 

모세는 자신이 보는 나만 보았지 하나님을 통해서 일하는 나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서 세우기시 원하는 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사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던  나에서 하나님이 보는 나.

 

세상 사람들이 보던 나에서 하나님께서 보는 나로 변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자유함이 없다.

 

성숙이 없다.

 

 

 

 

눈의 변화가 필요하다.

 

 

 

 

내가 보는, 나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구원해야 할 사람, 고통하는 아픔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내가 싸워야하는 사람으로 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섬겨야 하고 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내가 나를 보면 용서할 수 없어 어떤 사명도 받을 수 없는 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용서받고 수 많은 사람을 세울 수 있는 가치있는 사람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통해 이 눈이 죄악된 눈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이 악하게 되었다.

 

그 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 에덴동산을 보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바꾸어 주셨다.

 

 

 

 

 

바울이 눈에 비늘이 벗겨짐으로 관점의 변화가, 시각의 변화가 왔다.

 

그것은 단지 기적을 경험했다고,

 

아픔을 경험했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시각의 변화, 관점의 변화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신비이며 하나님의 영역이어서 그저 겸손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는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용서를 구할 수 있다.

 

 

 

마5:23절의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은

 

그 형제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원망 들을 만한 일' , '용서를 구할 일'을 말한다.

 

관점의 변화, 시각의 변화는 한마디로 입장의 변화이다.

 

 

 

 

왜 다른 사람과 문제가 생기는가?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가?

 

간단하다.

 

나를 보는 눈이 아직 내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나'가 되지 않으면

 

내가 보는 다른 사람도 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눈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다른 사람도 결코 되지 못한다 .

 

이 눈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은혜를 받고, 죄를 용서받고하는 등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듯,

 

하나님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다.

 

 

 

 

 

형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시각의 변화이다.

 

 

 

 

 

무지개는 우리의 입장에서 증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언약이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쉽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이 뭔가를 생각하면 간단하게 나온다는 말이다.

 

나를 통해서 출애굽을 하려고 하신다라는 것! 그것이 전부다.

 

 

 

 

 

하나님이 10가지 기적을 주셔서, 홍해도 건너서 광야로 나왔는데 물이 없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아 하나님께서 이 정도면 시험하시겠네'라는 답이 나온다.

 

그런 관점으로 접근하라는 말이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명을 들은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다.

 

기적과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입장, 관점,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40년 광야가 의미가 없다.

 

모세가 40년동안 양치며 훈련해도 이것이 안되니까 길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동족에게 맞아 죽을뻔 하고, 광야에서 40년동안 훈련하면서 죽을뻔 하고,

 

하나님께 진짜 죽을뻔 했다.

 

 

 

왜?

 

 

 

관점이 변화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

 

 

 

 

 

 

성경이 왜 중요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라는 말이다.

 

 

왜 성경에 이런 사건이 있고, 왜 이 말을 했는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왜 성령께서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되지 성경을 만드시고 66권을 통채로 주셨는가 말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관점을 봐보란 것이다.

 

이 훈련이 되지 않으니 늘 영적성장과 성숙은 먼나라 이야기, 달나라 이야기가 된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왜 감옥에 다시 갔나?

 

입장바꿔서 생각을 못했다.

 

본인은 용서를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이 되지 않아서이다.

 

 

 

 

 

일이 터질 때, 어떤 사건을 만날 때 관점의 변화, 시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훈련을 시키신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해도 관점의 변화가 없으면 나도 모세처럼 길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게 될 것이다.

 

 

 

 

 

눈이 변해야 한다.

 

눈이 변하면 세상이 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는 나로 자유하게 된다.

 

눈이 변하면 허물 많은 내가 아니라 용서받고 회복되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나를 보게 된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내가'라는 표현에서 '여호와께서~'라는 표현으로 모든 시각과 관점이 변화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성숙, 신앙의 성장이라 믿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했다.

 

관점이 변화지 않으면 기적을 보여줘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다.

 

 

 

 

 

사도바울은 이전에는 자기가 제일 잘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관점이 바뀌니 죄인중에 괴수가 된다.

 

이것이 은혜인 것이다.

 

관점의 변화! 이것이 은혜이다.

 

은혜가 다른것이 아니다.

 

 

 

 

 

 

 

부흥이 뭔가?

 

부흥은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는 언제 오는가?

 

회개는 관점이 변화될 때 온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볼 때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 없이는 안된다는것을 깨닫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 눈이 열리면 세상이 보이게 된다.

 

구세주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자는 어린 아기를 보아도 예수인 줄 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실 때 아픔도 주시고 여러 일들도 주신다.

 

중요한 한가지는 우리가 어두운 눈으로 보던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밝히 보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자들의 시각에서 같이 아파하고

 

함께 하고픈 하나님의 그 눈을 우리가 가지길 원하신다.

 

 

 

 

시각의 변화, 관점의 변화, 눈의 변화가 진정한 영적성숙, 신앙의 성장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