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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기억하라 2편

한국교회여 기억하라 2편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간다.

 

이런 아픔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했음에도 '한국교회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 걸고 기도했다.

 

 

 

 

9:19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9: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세는 하나님을 격노케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할 때마다 목숨 걸고 기도했다.

 

아론, 한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가나안 앞에 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건 기도를 해야 한다.

 

내 교회만, 나 자신만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야 한다.

 

 

 

 

모세가 이렇게 민족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수 있었을까?

 

 

 

 

 

모세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로 우리를 징계하시더라도,

모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해서 공의 때문에 죄의 대가를 주셔야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모세가 대신할 때 마음을 받으시는 것이다.

 

 

 

기도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녹아 있는,

지난 세월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세밀하고 섬세한 인도하심,

독수리가 새끼를음 같이,

닭이 새끼를 품음 같이,

자기 자녀를 안음 같이 우리를 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세가 가지고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에 공감하셨고,

한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이 대견하여

모세의 기도에 수 없이 응답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공감하신다.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고,

모세가 십계명을 부순 것 같이 같이 격분하고,

같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설교하는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해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들으신다.

 

 

 

 

그분의 일하심을 보면, 그분의 마음이 보인다.

날마다 그분을 만나면 그분의 마음이 느껴진다.

잠잠히 그분의 음성에 기울이면 그분의 마음이 폭포처럼 그냥 내 마음에 떨어진다.

 

 

 

 

 

젊은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라는 말씀이 그냥 마음에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 드리게 되었다.

 

 

 

 

이해할 때, 우리의 기도는 내가 아니라 이웃으로 향하고

공감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울 때, 예수님께서 탄식하실 때 함께 울고 탄식하며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시며 창자가 뒤틀리는 울분 속에 나도 함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본다는 것은 글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그림을 본다는 것이고,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무슨 지식이나 무슨 원리도 중요하나

우리가 찾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마음을 내가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하는 것이라 믿는다.

 

 

 

 

모세는 살인자로 도망자로 살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셨다.

 

 

 

아픔의 시간 속에서

광야의 시간 속에서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게 축복을 그가 맛본 것이다.

 

 

 

 

아론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

그는 아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알고 있었다.

아론을 통해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를 깨닫고 있었다.

마음을 모세는 긁어 드린 것이다.

기도를 통해 그것을 공감해 드린 것이다.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

모세는 무엇보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못이기는체 용서해 주실 것을 안 것이다.

 

 

 

 

 

자녀를 징계하나 아버지의 사랑을 자라면 다른 자녀를 징계하시는 아버지께 매를 들고

내리치는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비록 한국교회가 매를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가슴속에는

또 다른 감격과 눈물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죄 가운데 방황하는 목회자를 보면 하나님의 매와 함께 사랑하시는 마음 때문에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 손을 거두어 달라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을 이해해 드리자.

 

 

그렇게 축복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사기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했다. (2:10)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하는 일도 알지 못한다.

 

 

[삿2:10]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요일4: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모세는 하나님을 알았다.

만난다고 아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받으면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알았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았다.

 

그래서 모세는 아론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알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체험하고 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이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를 지켜갈 것이다.

사명 앞에 나와 여러분이 헌신하기를 기도하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않고 선조들의 말씀의 약속을 기억하셨다.

 

 

 

한 개인을 부르셔도 하나님은 말씀을 먼저 주시고 인도하신다.

이미 말씀을 주셨다면, 이미 사람이 말씀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목을 비틀어서라도 끌고 가시는 분이다.

 

 

 

베드로를 부르신 부름, 바울의 부르신 부름이 다르다.

이미 부르실때 하신 말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하리라'

'이방을 위하여 준비된 나의 그릇이라'

 

 

 

 

이미 사람을 부르실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이 꼬이지 않도록 미리 선을 정하시는 분이다.

 

 

하물며 나라와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하심이 있다.

 

 

[신4:37]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신10: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믿음의 조상,

선교사들의 피,

믿음의 선배들의 열정과 뜨거움이다.

 

 

순교의 터 위에 한국교회는 세워졌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금껏 유지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사용하시기 위해서,

한국교회를 사랑하여 언약을 맺으심 때문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서 죄를 내리실 때 했던 기도는 그것이다.

조상에게 하셨던 언약, 사랑하심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호와께 간구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신9:26-27)

 

 

 

사람이, 나라와 민족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부족해서 진멸될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가 존재함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그 언약을 계속 기억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때로 하신 일을 후회하신 적이 있다. (6:6)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계속해서 그분의 일을 멈추지 않고 원래의 뜻을 보존해 가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격노케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지속시켜가시는데,

이유는 그분이 하셨던 약속에 근거한다.

언약에 근거한다.

 

 

그래서 모세는 그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근거로 기도하게 되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은 언약으로 찾아오셔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라 물로 다시는 세상이 심판되지 않음을 안다.

 

 

 

 

 

후에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

 

모세와 세운 언약 ,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의 배경에는 언약이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멸절의 위기에 있을 때에라도

언약을 기억하고 돌이켜 겸비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은 또 다시 기회를 주셨던 하나님이다.

 

 

 

모세가 신광야에서 다시 말씀을 선포한 것은 이스라엘과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맺고

언약대로 기도하고 따르기 위함이다.

 

언약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가는지를 기록한 것이 구약의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서이다.

 

 

 

 

[신5:3]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가,

 

가정과 공동체가 위기를 맞을 때 하나님이 개인과 공동체에게 주셨던 언약을 기억하고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키신다는 것을 알아야한 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언약을 다시 한번 더 발견하고

우리의 뜻을 돌이킬 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라는 말은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목을 졸라서라도 만들어서 가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때 들었던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늘의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계셨고,

자유롭게 사역하셨고 짐이 무겁지 않고 가볍게 사역하셨다고 고백하셨다.

 

그래서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고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말고는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따라 일하시고 행하신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원칙이 없었다.

그냥 구름이 일어서면 갔고, 내려 앉으면 섰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다.

단지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그분이 주셨던 언약의 말씀으로 다시 구할 때 그분의 자비를 기대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적어도 그분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주셨던 메시지를 잡고

그것을 주님께 다시 드린다면 멸절의 위기는 면할 것이고, 자비를 주셔서 소망의 은혜가 있을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첫째 듣는 것이고 공감하는 것이다.

 

둘째는 들은 것, 공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근거로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로부터의 기도이다.

 

 

이것은 이미 나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도이고 성령의 기도이다.

(다음에 한번더 자세히 다루기로하자)

 

 

 

무조건 간구가 아니다.

아픔이 있다면 있는지 알지 못한채, 마구잡이로 간구만 한다면 하나님은 먼저 깨달음을 주신다.

그리고 간구를 들으신다. 듣고 깨달을 때, 간구가 응답된다.

 

 

 

한국교회가 잡을지 답이 나왔다.

한국교회가 수 많은 실수와 약함에도 여기까지 이유를 알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근거로 기도해 왔는데

 

 

 

이제 내가 바톤을 이어야한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해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 말씀의 보전성 때문이다. (10: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10:5)

 

 

 

모세는 두번째 십계명을 받아 궤에 넣어서 십계명을 보전했다.

이것이 언약궤이다.

 

 

 

그리고 레위지파를 통해 언약궤 앞에서 수종들게 했다.

그리고 언약궤가 가장 앞서 행하며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한국교회의 특징은 말씀에 대한 존중이다.

예배는 말씀이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말씀을 너무도 사랑한다.

제자훈련도, 큐티부흥도, 교회도 말씀을 따라 세워졌다.

말씀을 알기 원하고 배우기 원하고 순종하기 원한다.

 

 

 

어떤 민족도 나라도 이런 말씀 사랑을 볼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따라 진행하고 그것이 중심이 된 것 같이

한국교회는 말씀 중심의 신앙이 뿌리 깊이 내려 있다.

 

방학마다 성경학교며 수련회로 이렇게 많은 예산을 들이는 나라가 없다.

 

어떻게 하든지 말씀의 은혜를 받기를 갈망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성경책을 감히 밟지도 못했다.

주기철 목사님의 연극을 하면서 친구는 성경을 밟고 지나가는 연습장면에

죽어도, 연습이어도 못한다며 통곡을 했던 모습이 선하다.

 

 

 

성경을 다른 책과 구별하고 아꼈으며 사랑했다.

나도 아르바이트로 성경을 샀을때 감격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것 하면서 절대 성경은 사지 않는다.

성경을 달라고 구걸한다.

그리고 읽지도 않는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글성경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최초로 한국선교사로 온해가 1885 4월이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문이 아닌 순수 한글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에 한국교회는 말씀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아끼는 교회가 되었다.

말씀의 사모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부흥이 지속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피와 은혜가 있었지만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함이 있는 나라이다.

 

 

말씀에 대한 보전성, 말씀에 대한 사랑이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이다.

 

 

 

교회가 가장 아름답게 세워지는 방법은 말씀이 가장 존귀하게 대접 받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존귀히 여겨야 한다.

사실 그것보다 말씀 전하는 자가 스스로 존귀함을 깨닫고 존귀함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의 권위를 위해 사역자(말씀을 전하는 자면 목사나 전도사 모두)

쉽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역자를 아는 것이다.

물론 인격이 좋아서 목사나 성도가 서로를 존중하고 자기를 돌보면 되지만,

대게는 가까이 있으면 허물을 보게되고 약함을 보게되고 부족함을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말씀 자체의 권위가 사라지게 되는 악영향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사역자의 나이나, 수준을 보지 않는 성숙함을 가지는 것이 좋으나,

사람인지라 그것처럼 어려운 것은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풀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다 기록한다. (15:57, 4:24, 4:44)

 

 

 

이유는 하나다.

사람의 관계성에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익히 들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나 사역자를 대할 때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람이면 혈연, 지연, 학연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고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손을 보는 것이 쉽지 않으나,

나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이상이 왔으나 보던 아니 알던 아이,

밑에 있던 아이였으니 세번째 음성이 들릴 때까지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가족들에게 볼품 없는 밑동생, 어리광 부리는 자녀이니 선지자가 와도 부를거라 생각하지 않을만큼

그를 하나님의 권위 앞에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목회할 때, 가장 대하기 힘든 사람중에 부류도 가족 중에, 친척 중에 목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사람의 이야기로 판단하고 잘한다 못한다를 판단한다.

 

 

 

말씀의 권위가 사라지면, 아니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

나이를 보지말고, 그 사람의 약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붙드는 사람인가를 먼저 봐야 한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온다.

 

 

 

어떤 교회에 전도사님이 오셨다.

나이가 27이다.

장로님이 '어이 00전도사 시장가서 뭐 좀 사와라'라고 하셨단 이야기를 들었다.

장로님 아들보다 나이가 어린 전도사님이셨다.

 

장로님은 전도사님으로부터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한집 건너 사역자와 연결되어져 있다.

멀면 두세 친구 건너면 선교사, 목사가 친인척이 된다.

그러다보니 이제 목사, 선교사가 가족 중에 어린 사람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고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소리로 들을 가능성이 많아진 것이다.

여기에 분별하는 영이 없다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이제 없다.

 

 

말씀 자체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나에게 유익이 없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은 없다. 

[마13:58]'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목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언약궤를 맡은 자는 레위지파이다. 말씀을 수종드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에게 분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10:9)

 

 

말씀을 수종드는 자는 하나님으로 기쁨을 누려야한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보이고,

말씀의 권위와 영광을 맛보는 것이 레위지파의 분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함을 맛보는 것이 최고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쁨을 레위지파,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주신것이다.

 

 

사역자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 다른 것에 눈을 돌린다면

결국 하늘의 신령한 것이 내려오지 않는다.

 

 

분깃은 몫이라는 말이다.

레위의 몫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신령함인데 그것보다 세상에 것을 원한다면

원래 주기로 몫도 사라진다. 아니 오지 않는다.

 

 

 

그때부터 공동체는 하늘이 신령의 맛을 볼 수가 없다.

갈 길을 헤메게 된다.

광야 40년이 기다리고 있다.

분열이 있고, 아픔이 있다.

 

 

 

목회자와 사역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함을 사모하고 맛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꿀송이 같이 맛을 사람은 세상에 미련이 없다.

그러나 그같이 되는 조건은 날마다 그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인지라 눈에 보이는 유혹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모세도, 예수님도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한국교회는 '말씀을 존중히 여김'을 회복해야한다.

그제야 하나님의 부흥이 온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 친 아들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여기까지 축복을 주시고,

지금까지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어가고 계신다.

 

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분의 사랑이 지난 모든 어려움을 한국교회가 이기고 오게 된 이유이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하신다.

책임 앞에 사랑을 매로 선택하게 할지, 지속되는 축복으로 계속 할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사랑하심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뭔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함은 마음'이라셨다. 그래서 행함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한다.

세상 사람 다하는 것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숙제를 내셨다.

한국교회는 이제 하나님 사랑을 그것으로 증명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1.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 (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은 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

학력이 높은 것, 돈이 많은 것, 좋은 집, 좋은 차를 보지 않는다.

강남의 교회나 시골의 교회나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외적인 것에 너무 높은 점수, 아니 절대적인 점수를 준다.

 

 

 

우리가 사람을 외적인 것으로 볼 때 실수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본질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목사는 부자들 하고만 친한가?

교인들은 부자들하고 자꾸 친분을 쌓으려고 하는가?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이 주신 동일한 사람으로 대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자로 만드시지 않겠는가?

나를 존귀하게 높이지 않겠는가?

 

 

그것을 한번 체험해 보라.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객을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외모로 보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채우실 것을 믿고 그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천대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려니 외모를 보면 사랑이 되겠나?

하나님은 낮은 자에게 더욱 마음이 있다.

 

 

 

 

 

 

2. 뇌물을 받지 말라. (17)

 

 

 

정직이다.

뇌물은 받는다는 말은 눈이 어두워지나.

눈이 어둡다는 말은 모든 것이 흐려진다는 말이다.

흐려지면 분별할 수 없고 갈 길을 알 수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모른다.

그러면 망하는 것이다.

 

 

 

아울러 뇌물을 받으면 할말을 하지 못한다.

이때부터 말씀은 약해지고, 정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할 수 없다.

 

 

 

뇌물을 받으면 마음에 두려움이 온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곳은 지옥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티켓이다.

 

 

 

 

뇌물 때문에 사람이 지옥에 가는가 하면

뇌물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도 한다.(29:4)

뇌물은 피를 흘리게 한다.

 

 

 

무엇보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의 옮음을 빼앗게 만든다.

 

 

 

 

 

 

한국사회는 말할것도 없고 한국교회안에 뇌물이 너무 많다.

 

목사가 총회장을 하려면 돈을 많이 써야된다는 말이 만연하다.

사업을 하는 장로님들이 하청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고

받은 뇌물로 다시 상위 업체에 뇌물은 주는 일들이 상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을 없는 한국이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지금의 부는 다음 자손에게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천대를 갈지 아들부터 삼사대를 갈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젊은 목사가 세상을 몰라서 그래!'라고.

맞다.

나는 세상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안다.

 

 

굶어 죽어도 말씀대로 가는 것이 가장 길게 가고 가장 축복받는 비결인 것을!!!

 

 

 

 

 

 

 

3. 고아와 과부, 객을 사랑하고 대접하라. (10:18-19)

 

 

 

 

하나님은 다시 돌려 받지 못하는 자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돌보라고 하신다.

우리의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전혀 표시도 없게 하라고 하신다.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을 돌보라고 하신다.

 

 

그런가?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그분의 형상이고 자녀이고 백성이었다.

 

누가 돌아올지 누가 백성인지 우리는 모른다.

특히 힘 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베풀기 원하신다.

먼저 누린자들, 가진자들이 그렇게 해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아직 세상이 소망이 있음을, 빛이 있음을 알게 하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선을 행하고 그들이 갚을 수 없을때, 하나님이 갚아주심을 보여주시고 싶은 것이다.

 

 

 

[잠19:17]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하나님이 돌봐야 할 그가 만드신 백성들을 우리가 대신 돌본다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께 빚이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을 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갚아주신다고 말한다.

 

 

 

 

세상에 가난한 자가 없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다.

그들을 대접하고 돌아보며 불쌍히 여기는것이 우리가 축복받는 비결이다.

 

먼저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돌보고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을 확증하고,

세상에 대하여 그분의 얼굴을 보여주고,

하나님은 그분의 빚을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

 

 

 

 

그런데 안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 어떤 분이 그런말을 했다.

돈이 전혀 없는 사람은 베풂에 갈등이 없다. 왜냐하면 전혀 없어서 어떻게 돈을 굴릴지 고민이 없다.

조금 있는 돈 털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데, 어중간하게 있는 사람들이 갈등한다.

 

 

 

 

그런데 사실은 있고 없고가 돌보고 사랑하는 이유가 아니다.

사실은 아직도 맛을 한번도 못봐서 그렇다.

맛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다.

한번 해본 사람이 계속하게 된다.

아직 체질이 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니 섬김의 체질이 되도록 인도하시기를 바란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