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놈 보다 알고 안 하는 놈이 더 싫다(눅20:27-40)
세상에서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 하셨다.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권위의 본질은
자기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라 했다.
이 세상에서의 욕심은 결국 자리욕심이다.
내가 주인되고 내가 왕이 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부활이 없다 믿는 사두개인의 질문 즉 7번 같은 형제에게
결혼한 여자는 부활 때 누구의 부인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오늘 20장은 누구에게 관한 이야기들인가?
간단히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에게 한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오늘 본문은 역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자~
모르고 잘못하는 놈이 나쁜 놈인가 알고 나쁜 짓을 하는 놈이 나쁜 놈인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부활을 모르는 사두개인들은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죽으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데
그 사람들은 모세가 죽은 자로 이야기 하지 않고 산 자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을
증명하면서 그들은 죽음으로 끝을 내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살아서 존재함을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오늘 이 부활이 없다 믿는 사두개인들에게는 어떤 책망이 없다.
다만 잘못된 믿음을 교정하여주셨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고 나니 할말을 못하는 사두개인을 보며 선생님 정말 말 잘 했습니다라고 하는
서기관을 향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가?
그러면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로 그들을 난처하게 만드셨다.
20장의 흐름이 뭔가?
몰라서 못 믿는 사두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알아도 믿지 않고 믿음대로 살지 않는 너희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47)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죽어서도 말한다.
죽음은 영원한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문이다.
죽음은 영원의 시작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두개인은 그렇다 치고
아는 너희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더 큰 문제고 더 악하고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말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몰라서 못 믿는 사람이고
그리고 알아도 아는 대로 안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오늘 몰라서 못 믿는 사두개인을 혼내는 것이 아니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다.
몰라서 못 믿는 사람보다 알고도 아는 대로 살지 않는 너희의 악함을 심판 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죽음 후에 부활을 모르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모르는가?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가 주되시고 또한 다윗의 자손인 것을 모르는가?
몰라서 못하나?
알아도 하지 않는 우리의 믿음 없음과 악함을 질책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면 된다. 문제는 알아도 하지 않는 사람은 매만 남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을 경험한 나라와 민족이 부흥에 임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 후에는 부흥전보다 더 악하고 더 힘든 결과를 맞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미 은혜를 알고,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권위를 묻는 자들처럼
자리에,
세상에,
물질에 마음을 두는,
자신들이 주인하고 싶어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성경의 오늘 말씀은 우리가 모르면 모르까
적어도 우리가 아는 것은 믿는바 대로 행하고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21장에는 부자와 과부의 헌금을 통해 비교하고 과부를 격려하고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믿는바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설 때 할말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과부와 같은 사람을 향한 격려의 말씀도 함께 나온다.
예수님의 답답함은 몰라서 못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알아도 아는바 대로 살지 않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을 향한 탄식이며 눈물이며 애통인 것이다.
성경은 사두개인에 관한 이야기는 9번 나온다.
그러나 서기관에 관한 이야기는 58번 나온다.
오늘 본문 20 장도 그 대제사장과 서기관에 관한 경고요 탄식이다.
사두개인이 부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지적할 때 맞장구를 치면서
정작 자신이 모르는 다윗의 문제를 제기하자 말도 못하고 섰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이다.
우리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지적하고 욕하고 할 자격이 없다.
주님은 오직 우리를 심판하신다.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알아도 하지 않고,
믿는다 하면서도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서기관들과 같은 우리의 삶을 돌이키는 것이 급선무다.
서기관들의 사두개인을 향한 시선과 같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걷어야한다.
주님은 세상을 향하여 단 한번도 나의 백성이라 말한적이, 나의 자녀라고 말한적이 없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 백성이 지금 자신의 권위를 위해,
자신이 주인됨을 위해,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닫고 사는 그 모습을 마음아파하시고 눈물흘리시는 것이다.
세상보다 나를 향해 흘리시는 눈물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부활을 모르면 가르치면 된다.
복음을 모르면 가르쳐 지키게 하면 된다.
성령을 모르면 성령을 깨닫게 우리의 힘을 다해 도우면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문제는 부활도 알고,
복음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성령의 놀라운 체험도 해 봤으면서 자꾸 알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손가락질과
질책과 원망과 모든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무엇이 중요한가?
아는 대로 사는 것이다.
내가 믿는바 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런데 죽는 사두개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이 주님은 안타까운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부활을 믿는 부활의 백성이다.
그런데 세상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세상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눈물의 이유이고
더 아파하시는 이유이며
더 엄중한 심판이 있는 이유이다.
오늘의 말씀은 부활이냐 부활이 아니냐가 아니다.
부활을 믿는바 대로 살라,
하나님을 아는바 대로 살라,
네가 아는 지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며
영혼을 섬기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면
하나님은 더 큰 문제로 우리에게 물으시고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여기면
하나님은 더 큰 문제를 우리에게 주신다.
왜 하나님은 모르는 자들을 문제 삼지 않고
아는 자들을 문제 삼으시는가?
세상은 아는 몇사람이라도 그들만으로 변화될수 있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할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으로 빛이 아닌 어둠으로 살아가니
세상은 더욱 어두워지는 것이다.
맛을 잃으면 밟힌다.
빛을 잃으면 버림 당한다.
소금인데,
빛인데
소금처럼 빛처럼 살지 않으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묻지 않고
소금과 빛에게 묻는다.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부활의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의 본심이다.
모르는 세상을 탓하지 말라.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오직 부활을 알고,
믿음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내가 그렇게 아는바 대로 살지 않음이다.
둘째 아들과 요나의 문제다.
아버지의 것 전부를 가진,
하나님의 전령으로 선지자로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우리는 오늘 가슴 깊이 깨닫고 애통해야 한다.
"서기관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39)
자신들이 싫어하고 자신들이 미워하던 사람들을 질책하는 예수님을 향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47)
부활은 심판과 함께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몸에 좋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기다리신다.
참아주신다.
우리의 돌이킴을!
참 사랑의 하나님은 오늘도 빛과 소금으로 사는 우리의 모습에 세상 전부를 거셨다.
그 사랑 앞에,
그 은혜 앞에 오늘도 전부를 걸어서 그분을 기쁘게 해보자.
그것이 이 땅에서 부활을 정말 믿고 사는 사람들의 할 마지막 일이다.
하나님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