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용서 (눅15:11-32)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오늘의 핵심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다.
세상의 특징은
첫째, 집을 나가고 싶을 만큼 매력적으로 보인다.
둘째 아들은 없는 것이 없었다.
지금 누릴 것도 있고 앞으로 누릴 것도 보장이 되었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가고 싶을 만큼 세상은 매력적으로 보인다.
둘째, 매력보고 갔다가는 반드시 어려운 흉년이 든다.
세상의 본질은 가시와 엉겅퀴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세상의 본질은 사람에게 그렇게 변했다.
보이기를 매력으로 보이고,
광명한 천사로 보이지만 세상은 가시와 엉겅퀴에 악한 영이다.
셋째, 나를 일군으로 대하지 절대 아들로 대하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를 관계로 대하지 않고 관습으로 대한다.
늘 대하던 상품으로 대하지 작품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닌 이겨야하는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의 대우와 대접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없으면 없는 대가를 치루게 하고 있으면 있는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세상의 법이다.
하나님의 특징은 뭘까?
첫째, 달라는 대로 다 주신다. 그만큼 풍성하고 풍족하고 넉넉하다.
하나님은 없는 것이 없다.
문제는 다 있다고 또 다 가져도 집을 나간 아들,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다른 욕심 즉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어서 문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 다 가져도 문제를 삼지 않는다.
아니 이미 다 주셨다.
그런데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기 때문에 문제다.
하나님의 자리만 탐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된다.
둘째, 집 나간 아들을 늘 기다리신다.
이야긴의 전제는 아들이 집을 나갔다는 것이고
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하나님을 묘사한다.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하나님, 그것의 전제는 뭔가 잃어버렸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것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억지로 가서 잡아올 수 있지만 잡아와 봐야 또 나가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돌아서서 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셋째, 잃어버린 버린 자식이 돌아오는 기쁨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신다.
하나님의 가장 큰 상실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직 자녀를 잃으셨다.
그 자녀가 돌아오는 기쁨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기쁨이다.
우리는 자꾸 다른 기쁨, 다른 행복을 추구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해야 우리도 기쁘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기쁨 말고는 더한 것이 없다.
99개로 인한 기쁨보다 1의 잃은 것을 찾고 돌아오는 기쁨이 더하다 했다.
오늘 말씀의 특징은 돌아온 자로 인한 아버지의 기쁨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세,
우리의 죄의 정도에 따라 돌아갈까 말까를 결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정도가 아니라 돌아왔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신다.
우리의 실수는 늘 내가 돌아가면,
내가 이런 죄를 지어서 혼나지 않을까하는
자격미달의 마음이다.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데,
내가 얼마나 악한데 하는 자격미달의 마음 때문에 쉽게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길이 막히고,
소망이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간다.
그래서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것이 희망이 된다.
우리에게는 절망이지만 하나님께는 희망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소망 없음,
절망, 상실, 상처, 아픔이 끝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때부터 마음이 설레시고 동구 밖에서 기다리신다.
우리의 절망은 하나님의 소망이다.
자격은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아들됨을 결정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자격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로 나를 보고 율법으로 나를 보면
절대 하나님의 선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행위로 나를 보면 계산하게 된다.
아들이 행위로 자신을 보니 아버지께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고 구걸한다.
이것이 시작이 다른 이유이다.
우리의 생각의 습관은 자꾸 행위의 길을 따른다.
그래서 그 행위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행위의 결과로 아픔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악함의 결과로 병을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병이든 사람이나
아픔을 당하는 사람을 두 번 죽이게 되고
결국 자신도 그런 행위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고통이 더욱 크게 다가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
아픔이 결과가 아니라 아픔 너머 돌아오는 기쁨을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몸이 성하게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눅15:27)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병을 주셨다고 믿고
하나님이 아픔을 주셨다고 믿는다.
모두다 행위로 하나님의 계산하고 행위로 자신을 계산하고
행위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결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 원하시고
누구보다 우리의 회복을 원하신다.
그래서 믿음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아들로 맞으시는 것이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믿음이 없으니 돌아가기를 꺼려하고 무서워하고
결단하지 못한다.
돌아가지 못하는 둘째 아들의 이유는
첫째,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로 자신을 보는 율법적 관점에 매여 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늘 우리를 율법적 관계에서 판단한다.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본다.
자신에 대한 잣대가 있으니 그 잣대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이 율법적 기준으로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늘 복음과 먼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격미달의 마음으로 늘 평생을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 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그렇게 한 자신에 실망하고 그렇게 반복하다 죽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율법적 기준이 아닌 관계적 기준으로 봐야 한다.
우리는 자녀다.
자녀는 어떤 죄를 지어도 자녀다.
우리는 이미 죄로 시작한 인생이다.
그런데 그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의 의식 때문에 관계적 기준을 상실한다는 것에 있다.
둘째, 행위로 자신의 자격을 계산한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행위로 계산하지 않고 관계로 대하신다.
아버지를 떠나고 자신이 행한 악한 행위로 자신의 계산하니 절대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위로 우리를 대하지 않는다.
이미 그 행위는 십자가에서 다 덮으셨다.
행위가 아니라 관계로 대하신다.
아들이니까 아들이다. 아들은 행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피로 맺어진 관계다.
피로 맺어진 것은 행위로 파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다.
셋째, 죄가 사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는가?
왜 하나님께 돌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주저하는가?
하나님이 이미 모든 죄를 용서하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이다.
하늘에서 이룬 하늘의 뜻은 용서이다.
용서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죽이셨고 피를 흘리셨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그런데 그 용서를 알지 못하니,
이미 이룬 용서를 알지 못하니 늘 주저하고 머뭇거린다.
우리의 초점은 늘 탕자에 있다.
아니다.
이 말씀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이 얼만큼인지 그것을 설명한다.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다 준비하고 기다리신다.
다 용서하고 기다리신다.
친구를 부르고, 소를 잡고,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이전의 모든 것을 다 잊고 용서하고 누리고 즐길 것을 다 준비하고 계신 모습이다.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
잃어버린 드라크마 이야기,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양을 잃었다 찾은 사람의 기쁨의 이야기
드라크마를 잃었다 찾은 사람의 기쁨의 이야기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의 이야기이다.
돌아온 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기쁨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돌아옴에 대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을 알 때 돌아갈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이미 용서하시고
돌아오고 난 후를 기쁨으로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하나님의 기쁨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