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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중독되신 하나님!

일에 중독되신 하나님!

 

 

 

 

 

 

 

 

 

 

 

 

 

 

 

 

 

 

부모님이 나이가 들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시게 된다.

 

그러면 얼마가지 않아 몸이 아프고 병이 오고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어서,

 

가능하면 소일거리라도 해야 평생 긴장하고 사신 몸과 마음이 유지가 된다.

 

그래서 아무 일 없으신 어르신들께 작은 소일거리라도 드리고,

 

작은거라도 마음과 몸을 집중할 것을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신다.

 

이것이 다 평생 일해오신 오른들의 체질이 그렇게 되어서 그렇다.

 

 

 

 

 

사람은 체질이라는 것이 있다.

 

옛 어른들이 이르기를 사람은 정(精)·기(氣)·신(神)의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체로 구분을 한다.

 

이 구성이 사람마다 달라서 그 요소를 보관하는 몸도 다 다르게 태어나는 어떤 몸의 성질을 말한다.

 

한의학적으로보면 사체질이다 팔체질이다해서 그 사람이 태어난 몸의 체질을 사성, 팔성으로 구분을 한다.

 

한번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그 체질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간다는 말이다.

 

이 체질을 바꾸기도 쉽지 않아서 태어난 대로 맞추어서 사는 것이 병이 나지 않고 잘 사는 방법이다.

 

 

땅도 마찬가지이다.

 

가지고 난 성질이 있다.

 

땅은 토질과 기운에 따라 그 성질이 다른데 토질이 무엇이고 땅의 기운이 어떠한가에 따라 땅의 체질도 다르다.

 

 

한국땅의 기운이 다르고 아프리카의 기운이 다르다.

 

그래서 나라마다 지방마다 나오는 곡식이 다르고 열매가 다르다.

 

 

남아공은 거의 대부분 흙땅이다. 좋은 땅은 황토라는 흙이어서 잘 가꾸면 좋은 땅이된다.

 

인근 모잠비크나라는 너무 옥토여서 손으로 씨를 대충 뿌려도 곡식들이 너무 잘 자란다.

 

다 땅의 체질이 달라서 그렇다.

 

좋은 체질의 땅이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한 그 체질을 유지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람도,

 

땅도 모든 것을 체질에 따라 만드셨다.

 

[시103: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어떤 체질로 태어났느냐가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

 

 

 

여기서 궁금한것은 그럼 하나님은 어떤 체질이냐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엿보게된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세계를 알게된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아 저사람은 어떻구나 라고 알게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만드시고,

 

자연을 만드신 분을 알게 된다면 어렴풋이 그 창조자의 체질을 이해하게 된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알게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마치 일에 중독이 되신 듯한 분이시다.

 

 

 

일에 중독되신 하나님!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요5:17]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쉼 없이 일하셨다.

 

그 일하심의 체질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말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안식할 겨를도 없이 분주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오늘 본문에서도 알게 된다.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오늘도 거의 일중독자처럼 보이는 이 하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에 대한 애처로움을 발견하다.

 

자식이 부모가 죽도록 일할때 느끼는 그 마음이랄까!

 

가슴 깊이 아려오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먼저, 하나님은 일하시는 체질에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통해서만 일하신다. 

 

신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하나님은 내가 아니면 일하지 않으신다.

 

말 그대로 시간이 얼마나 가든지 기다리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이 영원하시다. 

 

무한의 시간, 무한 공간의 개념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유한의 육체와 제한된 시간과 공간으로 사는 우리와는 체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바쁘시다.

 

우리의 체질과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가운데 그분의 일하심을 보여주고 싶으셔서

 

그분은 오늘도 너무도 분주히 일하고 계신다.

 

 

 

 

왜?

 

이유는 하나다.

 

내가 일할 때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일하기를 선택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만드시길 원하시고 나에게 집중하셔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빚으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필요충분조건은 바로 나다.

 

내가 조건이 될 때, 하나님은 그제야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가신다.

 

 

이스라엘이  준비가 되어서야 그분은 그분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만드시고 기다리시고 빚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토기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셨다.

 

 

[사64:8]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일할때 일하셔서 우리가 일할 준비가 되기를 끊임없이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그분의 일하기를 원하셔서 다시 나를 빚으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는 토기이고 그분은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토기장이이시다.

 

 

토기는 흙에서 출발한다.

 

흙은 사람이 처음으로 조성된 기초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생기는 그 다음이다.

 

흙이 준비 되어야하고 모양이 갖추어져야하고, 목적에 따라 형상이 주어져야한다.

 

그 시간이 바로 광야이다.

 

애굽을 나온 사람은 반드시 광야를 지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내가 준비 되어야 일하신다.

 

하나님은 체질적으로 일해야 하는데 내가 준비되지 않으니 나를 빚으시는데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일하신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이 죽을 고생하는 것을 보면

 

시장바닥에서 일하시던 어머니를 보며 느꼈던 그 감정이,

 

죽어라 농사로 허리 한번 펼 수 없는 굽어진 허리를 보며 느끼는 애정과 가슴찡함을 느끼지 않는가?

 

 

 

 

 

그래서 광야는 선택이다.

 

믿음으로 선택한 자는 광야가 짧다.

 

토기장이에게 자신을 믿음으로 맡기고 그대로 자신을 내어드리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일이 무엇이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을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일이다'라고 하셔서

 

일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었다.

 

 

광야에서 우리의 내면이 변하면

 

하나님은 일하신다.

 

 

 

 

성숙이 뭔가?

 

내면의 내 모습이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와 일하고 싶어 하신다.

 

언제 일하시는가?

 

 

 

나의 속사람이 변할 때 일하신다.

 

 

속사람은 언제 변하나?

 

얻어 맞아야 변한다.

 

흙을 기억해라.

 

우리는 흙이다.

 

말씀으로 맞고, 사랑의 매를 맞아야 변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5:17]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잠3: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속사람의 변화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는 게이지이다.

 

내가 변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일하신다.

 

그분이 하고 싶어하시는 그 일을 하나님은 신나게 하실 것이다.

 

 

 

아픔의 광야를 지나고 있는가?

 

환경을 보지 말라.

 

하나님의 목적은 내 속사람의 변화이다.

 

사람을 보지 말라.

 

나를 넘어지게하고 하나님을 보게하는 걸림돌이다.

 

 

사람도,

 

환경도 목적은 내 속사람의 변화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새로운 세계를 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시고 주고 싶어 하시고 그분이 일하셔서 우리에게 안겨주고 싶어 하시는

 

영적인 축복, 육적인 축복은 나의 내면이 그분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아울러 변화된 나의 내면으로 내가 일할 때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 일을 하나님은 엄청 기다리고 계신다.

 

 

이것을 우리가 모르는가?

 

안다!!!

 

그런데 안된다.

 

몰라서 못하나 안되니까 못한다.

 

하나님도 그것을 아신다.

 

그래서 징계가 필요하고,

 

아픔이 필요하고

 

내 몸의 흔적을 통해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못 박으신다.

 

 

아프다고 슬퍼하지 말라.

 

외로움에 고통하지 말라.

 

아픔을 즐기고,

 

외로움을 느껴라.

 

그리고 그 안에 잠잠히 다가오셔서 그분이 원하시는 빚으심을 받아 들여라.

 

그때 우리는 알게 될것이다.

 

왜 이런 광야를 주셨는지!

 

 

 

 

 

 

둘째로, 하나님은 내가 일곱 족속을 무너뜨리기 원하신다.

 

정확한 표현으로 하나님은 나를 통해 그분이 싸우길 원하신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분은 일하기 원하신다.

 

다만 나를 통해서 싸워 이기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일하기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돌아보면 '이야~ 내가 이만큼 일을 했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가끔 우쭐해 지기도 하고 자랑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일을 정말 내가 했는가?라는 질문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내가 일을 한다고 모든 조건이 맞아서 일이 척척 되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다시 광야로 간다.

 

 

정말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은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안다.

 

내가 안다. 나의 능력 없음을!

 

나의 힘 없음과 나의 무지함과 무능력함을!

 

그래서 돌아보며 '내가 했지'라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은 어김없이 칼을 드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른 사람이 가로채면 하나님은 칼을 드신다.

 

그래서 손이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기준 이상으로 올라오면 하나님은 손을 잘라버리신다.

 

내 눈이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면 눈을 아프게 하신다.

 

내 발이 하나님보다 빨라지면 발을 묶어 버리신다.

 

하나님은 일을 다하고 한마디 하기를 원하신다.

 

나의 능력없음 하나님의 일하심!!!

 

 

 

 

 

먼저, 왜 우리가 세상에서 자신이 없나?

 

한번도 일곱 족속을 쳐본적이 없다.

 

 

가나안은 그냥 가나안이 아니라 내 주위의 일곱 족속을 쳐 부술 때 가나안이 진정한 가나안이 된다.

 

이 땅의 가나안은 싸워 쟁취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가나안을 위해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면 나는 늘 내가 잘난 줄 안다.

 

내가 능력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싸워본 사람은, 전쟁을 해본 사람은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

 

'날 위해 하나님 일하시구나'를 안다.

 

 

 

 

 

나의 가나안을 위해 내가 싸워야하는 일곱 족속은 무엇인가?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

 

그 의미를 살펴보자.

 

 

 

 

일곱족속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싸우고 쟁취해야할 것들인지 모른다.

 

 

아래족속의 뜻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뜻도 있으나 어원을 찾아서 발견한 단어이다.

 

 

 

 

헷족속의 헷이라는 뜻은 '공포'에서 왔다.

 

우리가 느끼는 어떤 공포들을 우리는 싸워야한다.

공포중에 가장 공포는 죽음이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죽음에 대한것이다.

싸워서 죽지 않을까?

뿐만이 아니다. 이길 있을까?

우리가 세상에서 뭔가를 할 때, 내가 성공할 있을까 실패하는 어떻게 하지?라는 공포가 있다.

대상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지 않으면 가나안은 가나안이 될수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나안에서의 삶을 광야와 같이 살아야 한다.

 

 

 

기르가스는 '진흙 집'이라는 뜻이다.

 

원래 뜻은 '산중 사람'이라는 뜻이 있으나 진흙으로 지어진 거처라는 뜻이 정확하다.

우리의 가나안은 잠깐 세워서 없어지는 흙 집이 아니다 .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처소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잠깐 세워 없어지는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추구하는 욕망과,

명예와 그렇게 가지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은 집과 같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들이다.

금방이라도 없어질 것을 정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가나안에 살면서도 가나안을 누리지 못한다.

 

 

 

브리스는 '마을사람들의 소유'라는 뜻이다.

 

가나안에서의 소유는 세상 사람들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이다.

세상과의 싸움은 소유권 이전의 싸움이다.

가나안은 그 사람들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유라는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가나안의 의미를 알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주신것, 그분의 소유가 될때 우리는 안정감을 누릴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란 정확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권 이전을 할 때, 하나님은 그것보다 많은 것으로 다시 이전하신다.

 

 

 

여부스는 '밟힌'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의해 짓밟힌 우리의 것들은 내려 놓아야한다.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해야한다.

짓밟힌 우리의 마음과 무너진 마음을 회복할 때 우리는 진정한 가나안을 맛볼수 있다.

짓밟힌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짓밟힌 우리의 영적권위를 회복할때 우리는 가나안의 주인 답게 살수 있다.  

 

 

 

히위는 '생명을 줌' 또는 '생명의 처소'라는 말이다.

 

어떤 것도 우리의 생명을 줄 수 없다.

우리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지식이나, 부나, 학위나, 능력이 결코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세상은 허상이다.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줄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다만 잠깐의 쾌락만을 줄 수 있다.

쾌락이 가나안의 전부인줄 여기고 산다면 진정한 가나안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처럼 살다 죽는다.

세상이 우리의 생명을 붙잡고 있지 않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유일한 안식처이다.  

 

 

 

아모리는 '말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세상에서 말하는자를 보지 말라.

우리를 향하여 어떻게 말하는지 두려워 말라.

우리는 말하는 사람들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당하고 힘들어 하는지 모른다.

말하는 자를 넘어야한다.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수많은 조롱과 야유를낸다.

우리에게 말하는 자를 내려놓으라.

우리에게 말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우리가 정복하고 섬기기 위한 것이다.

 

 

 

가나안은 '낮은 땅' 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사실 낮아지는 땅이다.

우리가 낮아질 때 얻을 수 있는 곳이 가나안이다.

낮은 마음으로 살 때 가나안이 가나안이 될수 있다.

우리는 낮아지고, 하나님은 높이시고.

그곳이 가나안이다.

진정한 가나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낮아질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낮아져야 하나님이 높아진다. 그곳이 가나안의 진정한 완성이다.

 

 

 

 

결국 내가 싸워야 할 것이 뭔가?

 

가나안에 살던 일곱 족속들이 믿고 여기고 살아가던 그들의 신앙과 잘못된 생각들과 행동의 양식들이다.

 

 

우리가 가나안을 추구하고 가나안을 정복할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빚으시고 나를 만드셔서 가나안을 정복하여 우리로 가나안의 안식을 하게 하실 것이다.

 

언제 그 가나안의 안식이 오는가?

 

세상에 살면서 느꼈던 수 많은 공포와 두려움들,

 

한순간 날라가 버릴 잠깐의 것들,

 

나의 것, 세상의 것이라고 여기고 살았던 잘못된 소속들,

 

 

세상으로부터 밟히고 빼앗긴 마음과 자존심과 정체성,

 

세상이 우리의 생명의 안식처인 것처럼 여겼던 마음들,

 

우리를 향하여 조롱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너무 중요하게 여겼던 생각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아들,

 

참 가나안은 낮아지는 마음인데 더 없이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던 교만한 마음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싸워야하는 것들이다. 

 

이것들과 싸워 이기지 않고 우리는 참 가나안의 안식을 누릴 수 없다.

 

 

 

 

그럼 이런것들을 다 한꺼번에 물리치는 것이 가능한가?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상과 사고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가나안의 사람들을 없애라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족속들을 다 죽이라 했나? 나는 늘 궁금했다.

 

이유는 그들이 믿고 살아가던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는 가장 빠른 길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것이다.

 

 

문화를 바꿀수 없다면 사람을 바꾸라.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신 방법이다.

 

선악을 알만한 장정은 다 죽이셨다.

 

 

 

동일하게 세상에서도 적용된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상과 문화에 동조된다면 우리는 가나안에 살면서 광야보다 못한 삶이 된다.

 

좋은것을 누리면서 영적으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사람은 더욱 허망하여진다.

 

그래서 자살은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으로 갈수록 높다.

 

 

 

우리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없애는 방법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안에 채우지 않으면

 

그것을 이길힘, 따라 가지 않을 힘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르는 모든것을 없애라고 하셨다.

 

우리의 정신,

 

우리의 문화,

 

우리의 영혼이 순수하게 유지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것으로 만족하며 살도록 하셨다.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전투'이다.

 

그래서 우리를 군사라 부르신다.

 

 

 

참 가나안은 싸워서 이겨야하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모든 것이 가나안을 누리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나에게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높아짐일 수 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세상의 물건일 수 있다.

 

잠시 잠깐 빠져드는 쾌락일 수 있다.

 

그것이 나의 감정이기도 하고, 바쁨이기도 하다.

 

 

아무튼 가나안에서 우리가 정복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모든 것이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사탄과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언제든지 우리를 향하여 달려들 것이다.

 

 

 

하나님은 일하고 싶어하신다.

 

우리를 향하여 언제든 일할 준비가 되어있다.

 

전쟁할 준비되 되어있고 우리가 심지도 세우지도 않은 놀라운 가나안의 축복을 준비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지금도 빚으시기 위해 일하시고 일하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만 일하시고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가?

 

 

1.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신다.(신7:7)

 

2. 하나님은 나를 택하셨다. (7)

 

3.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족하기 때문이다(7)

 

 

 

한마디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다고 말씀하신다. (8)

 

다른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중독 되심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 모든것은 체질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만히 못두시는 체질이다.

 

나 대신 일하기를 기뻐하시고 일하시기를 즐겨하신다.

 

그런 그분에게 일거리를 좀 드리는것이 그분을 기쁘게 만드는 일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열심히 빚으시느라 바쁘시다.

 

뿐만 아니라 나의 처소를 예비하려 바쁘시다.

 

나의 미래와 나의 만날 사람들과 나의 거처한 모든 것을 준비하시느라 바쁘시다.

 

그 하나님이 내 마음에 사뿐히 내려 오셔서 나와 동행하는 것이

 

오늘은 너무 행복하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