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생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영생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 해도 끊임없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문제가 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평생 우리는 세상이 주는 아픔으로 시달릴 수 밖에 없고
마음속에 평안 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자신감과 다르다.
자신감은 경쟁사회 즉 세상나라에서 주는 것이다.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것을 이뤘고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와 능력과 성취와 외모와 인간관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감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 자체의 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자신감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오기 때문에 외부적 요인이 변하면 자신감은 얼마든지
변하게 된다.
그러나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감은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가치에 대한 자기 인식이며 자기 존재를 알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자기 인식으로부터의 자기존중의식이다.
그래서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현재의 소유와 능력과 성취와 외모와 관계에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고 자기존재 그대로를 인식하며 사는 감정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와 능력과 성취와 외모와 위치의 높고 낮음에 의해서 우리를 지으시지 않고
사람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교제하는 존재로 만드시고
사람자체는 온 우주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관리자로 세우셨다.
이것이 자존감의 시작이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곧 영원을 의미한다.
영원을 나누며 영원속에서 존재하는, 세상과 비교의 대상이 없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감을 누리는 존재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비교 대상은 오직 하나님만이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라기보다 교제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과 유일에게 교제하는 유일한 영원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을 지으신 이유이다.
그래서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때도 영원이신 말씀 즉 예수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영원으로 우리를 대하신다.
우리는 영원의 존재이다.
그런 영원의 사람이 언제부터 문제가 시작 되나?
영원에 대한 기준이 사라질 때부터 이다.
하나님이라는 영원의 기준이 내 안에서 사라질 때 사람은 자신을 보게 된다.
그때부터 사람은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 스스로 평가기준이 될 때, 하나님처럼 되려 할 때
영원의 기준이 없는 사람은 영원이 아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영원의 가치가 아닌
흙 즉 사라질 가치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다.
영원,
영생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영원의 기준을 잡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나며 그분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의 기준이신 하나님을 만났지만
세상 속에 살면서 자신의 기준 즉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볼 때 자존감에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 중요한 예로서 모세를 든다.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영원, 즉 자신의 문제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습을 모세를 통해서 본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세상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자 보자.
모세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떨기나무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음을 보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모세의 소명이다.
소명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만났지만
해결되지 못한 자존감 즉 영원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지 못함으로 그 사명을 사명으로
완전히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을 통해서 그 자리로 나아간다.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하나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모세: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
하나님: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하나님과 모세의 첫 대화는 자연스럽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시자 모세는 친절하게 나는 부족하니 할수 없다. 겸손한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런 첫번째 거절이다.
그런데 이런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모세: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 )
두번째 거절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을 지팡이와 손과 물을 변하여 뱀과 나병과 피로 변하는
기적을 통해 사명자로서 확신을 더하신다.
이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사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을 받을 때 사람은 거절하고 또 거절하게 된다.
두렵고 무섭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답을 주시고 기적을 주시고 해결책을 주신다.
하나님과 모세의 씨름이다.
그래서 모세의 세번째 거절이 나온다.
모세: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처음은 내가 누군데 그런 사명을 감당하느냐고 묻더니
다음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는 자신의 능력을 탓한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반응이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4:11)
하나님: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2)
말을 못하고 입이 둔하다고 하니 하나님이 입을 짓고 벙어리도 되게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네 입과 함께 있을것이니 네가 갈때 할 말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그대로 응답이 되어 수없는 말씀을로 모세와 함께 하셨고
수 많은 율법과 언약과 말씀이 모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런데 모세가 네 번째 거절을 한다.
모세: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
하나님이 이제 화가 나셨다.
성경은 정확하게 하나님이 화가 났다고 말한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출4:14)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말잘하는 아론을 마음으로 미리 준비시키겠다고 하신다.
모세의 네번거절과 하나님의 네번 이상의 응답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모세는 아직 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어떤 점이 하나님을 화나가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생은 보장이 된 사람이다.
그런 모세가 무엇이 해결되지 않아 하나님의 이 거룩한 부르심을 거부하는가?
일반적으로 성경을 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네번의 거절과 응답을 통해 모세가 사명을 받고
적극적으로 그 사명을 향하여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모세는 해결되지 않은 한가지로 인해 아직 완전한 사명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장인 이드로와의 대화에서 볼수 있다.
모세: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 평안히 가라 하니라(출4:18 )
모세는 장인에게 그의 사명을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그냥 한번가서 이전에 알던 형제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본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줬고,
사람도 붙여줬고, 환경도 열어주셨다고 자랑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마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되지 않고있다.
환경은 열렸다. 장인은 평안을 빌려 보내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마음에 기쁨도 사명도 없다.
무엇이 모세를 이렇게 잡고 있는가?
아직 클라이막스는 남았다.
하나님은 아직 부르심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지 않은 모세가 걱정이 되어 미디안에서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는 불꽃도 필요없다. 이미 모세는 하나니과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고
하나님은 친히 모세와 대화하고 계신다.
하나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4:1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모세가 무엇에 약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심을 알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확신을 준다.
모세는 무엇에 약한가?
모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기는가 이다.
모세는 과거 스스로 하나님의 일은 한답시고 설치다 모든 것이 다 망했다.
정치적으로 몰리게되고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함을 알고 광야에서 숨어 살았다.
모세를 힘들게하는 유일한 한가지, 아무리 애굽의 뛰어난 지식과 학식을 가져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한가지는 사람들의 눈이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하는 것이다.
혹 나를 천대하지 않을까? 혹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까?
네까지것이 무엇인데하는 말을 듣지 않을까하는
자존감의 문제에서 모세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지난 40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 40년도 모세에게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이 가면 우리의 약함이 회복된다 여긴다.
아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진다.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말씀, 사명을 이루어 낼때 그것이 회복된다.
모세는 아직 그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고 이제는 죽이려고 하신다.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영원에대한 시각, 영원으로 말미암는 절대 자존감을 갖지 못한 모세는
일반 사람보다도 더 못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이려 하신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출4:24 )
우리는 이 말씀이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사명 잘 받고 가는 사람을 죽이려 하셨는가?
아니다.
모세는 사명을 잘 받은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받지 않고 갔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가 발하셨다 이제는 모세가 그 사명대로 기꺼이 받지 않자 죽이려 하셨다.
23절에 보면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장자된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면
그들의 장자도 죽이겠다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4:23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내 자녀 내 백성 된 장자 이스라엘이 얼마나 소중한데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은
다 죽이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결단이다.
그런데 그 애굽의 바로에게 가기 전에 모세가 구원에 방해가 되는 모습으로 서있다.
부르심에 대한 소명도,
기적에 대한 확신도,
말씀에 대한 영접도 없다.
그냥 하나님이 가라고 하니 마음 없이 사막 가운데 길 위 야영지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싫은 것이다.
부르심도 있고 소명도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모세를 이렇게 갈등하게 하는가?
무엇이 이토록 해결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부르심도 거부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눈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해결이 없으면
결코 사람들 앞으로 나오지 못한다.
자 모세가 거절한 다섯 번의 거절을 다시 보자.
처음은 내가 누구기에 가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 했다.
그리고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했다.
그리고 말로 안되니 가는 길 숙소에서 갈등하는 모세가 있다.
말로 안되니 몸으로 버티는 것이다.
모든 거절의 의미는 나는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지 나는 안다는 것이다.
나는 말도 사람들을 이끌 지도자의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은 한사람앞에
하나님은 노하시고 설득하시고 확신을 주시고 계시다 결국 죽이려 하신다.
회복되지 않은 자존감으로 서있는 한사람으로 한 민족의 구원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노하게 또 부르심 사람을 죽이려하는 지경까지 만들고 있다.
자존감을 잃어버림은 사람들 속에서 잃어버린다.
실패와 사람들의 야유와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 자존감은 자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들속에서 회복하기를 기다려 40년을 보내지만
결국 그들 앞에 용기가 없어서 서지 못한다.
아니 하나님도 그런 자를 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오죽하면 죽이려 하셨겠는가?
보통 사람은 하나님이 한번 두번 세번 정도 말씀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기적을 보여주시고 확신을 주시면
따라오는 것이 정상이다.
이 대목에서 모세가 얼마나 무너진 자존감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언급을 하겠지만, 모세는 결국 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이 자존감 때문에 다시 실수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모세의 가장 약점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 사람들의 손가락질,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모세를 용납하시고 받으셨는가?
바로 언약이다.
아내 십보라가 할례식을 통해 모세의 죽음을 면한다.
하나님께서 죽이려하자 아내 십보라가 할례를 행함으로 모세는 자신에게 피로 맺은 남편임을 보여주자
하나님은 할례로 인해 모세를 용서하신다고 기록한다.
출4: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출4: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4: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하나님은 한 사람의 약함을 넘어 언약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그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붙드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다.
한 사람의 약함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십보라를 통해 확인 하시고
이미 약속한 모세와의 약속, 언약을 기억하사 용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의 백성, 언약의 자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모세는 회복되지 않은 자존감, 사람들의 눈에서 지난 40년의 시간은 의미 없이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회복하고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부르시고 사명을 주셔서 약함을 회복해가면서 일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 모세가 언제 완전한 회복을 가지는가?
그것은 홍해를 건너고 난 뒤이다.
애굽에서 나온 후 그의 노래가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진다.
그전에는 어쩔 수 없이 했다.
물론 하나님도 만나고 기적도 능력도 있다.
그러나 내면의 완전한 회복은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고 체험될 때 일어난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을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체험될 때 일어난다.
그냥 머리가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아도 체험해도 되지 않았다.
오직 홍해를 건너는 구원의 감격을 직접 체험할 때 가능하다.
나의 약함은 무엇인가?
모세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회복될 때 진정한 리더가 되는 것이다.
자존감 없는 리더 아래 있는 백성은 힘들다.
혹 이 말하면 이 말에 상처받고 저 말하면 저 말에 상처 받을까 두려워 말하기 어려운 상대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하나님의 영원의 기준으로 살지 못하기에 그렇다.
우리 모두는 이 자존감이라는 말 앞에 자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말씀이다.
말씀이라는 영원이라는 기준으로서 내가 만날 때 우리는 절대적 존재로 살수 있는 힘이 있다.
말씀 앞에 서는 것이 두렵고,
말씀대로 세상 앞에 있는 대로 고백하는 것이 두렵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것을 전하는 것이 두렵지만 서야 한다.
서야 자존감을 회복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늘 두 가지 일을 같이 하신다.
구원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일은 멀티이다.
구원의 역사 일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지만 함께 내 안에 회복의 역사도 함께 만들어가신다.
언제?
내가 말씀 앞에 서며 말씀으로 내가 움직일 때 그 일이 일어난다.
왜 사울왕이 마지막에 망하게 되었나?
사울의 시작을 보면 다윗 못지 않은 뛰어난 점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가 망하게 되는 시작이 무엇인가?
다윗으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이다.
뛰어나 보이는 다윗이지만 일개 병사다.
그런데 사람들의 소리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는 소리들이다.
우리가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소리에 귀가 열리면 그때 망한다.
사단은 아담에게 그렇게 접근했다.
아담에게 비교를 통해 하나님과 아담을 비교하게 하고
스스로 왕으로 최고로 살아야 한다고 비교하게 한다.
비교하게 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될 때 우리는 영원을 살게 된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영원의 기준을 잡아야 한다.
기도를 통해 그 영원을 내 안에 잡아야 한다.
기도는 세상의 소리를 닫고 영원을 내 안에 잡아두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회복된 자존감은 본인은 물론 하나님도 기쁘게 하지만
회복되지 못하는 자존감은 하나님을 노하게 한다.
부르심이 사명이다.
부르심은 말씀이다.
말씀이 곧 나의 존재이다.
그 말씀의 영원성안에 내가 거할 때 나는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으로 살게 된다.
이 땅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은 영생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영생을 받은 자중에서도 이 자존감이 해결 되지 않아
상처를 주고 받으며 아파하는 영혼들이 너무 많다.
하나께만 답이있다.
그 답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거부하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신다.
그래서 그분이 말씀하실 때 전적 신뢰로 믿고 따름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앞에 서서
영원의 관점으로 나를 보는 훈련이 필요하고
내가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영원의 관점을
세상을 볼수 있는 눈을 가질때
세상을 바르게 판단하고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으며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할수 있게 된다.
(추가)
이 세상은 우리를 늘 시험하고 세상의 소리에 영원의 관점을 흔들리게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깊은 만남과 말씀으로 영원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며
그 사역의 핵심인 하나님을 친구처럼 대하는 축복가운데 살았다.
그런데 그가 언제 문제가 생겼나?
다시 세상의 소리에 세상의 것에 눈이 갈때이다.
구스여자를 취하여 세상의 보기 좋은 것에 눈이 가고
그러다 결국 세상의 소리,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에 영원의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영원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소리로 그들을 대하게 되었다.
영원의 관점을 가진 사람만 들어가는 가나안에 그는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서길 원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
거룩은 영원의 시각을 가진 자가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처음 만나실때 네가 선곳은 거룩하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였다.
하나님의 존전은 거룩이다.
하나님은 거룩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거룩의 반열에 이른 자이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이 거룩함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그 거룩은 영원의 시각 안에서 유지된다.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에 그 거룩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다른 어떤 것을 잘못했다 하지 않고
내 거룩함을 내타내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고 유지하고 보여주고 싶어하셨다.
기억할것은
우리는 우리가 사역을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따름이다.
따름은 먼저
들음이요,
들음은 영원의 시각안에 거룩안에 머무름이요
영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말씀에 따름이다.
모세는 따름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표혔다.
그래서 반석을 향하여 명령해하라는 말씀에 지팡이를 두번 쳤다.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의 행위가 포함된 실수다.
아무리 열심을 해도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이 나타내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공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우리는 단지 따름이다.
그 따름의 전제는 오직 우리의 영원의 관점으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닫고
주의 소리에 따름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들어야한다.
모세의 사역의 시작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리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사무엘의 사역의 시작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세상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영원은 사라진다.
자존감은 사라진다.
비교가 찾아온다.
그래서 자신의 소리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거룩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발에 신을 신고 자신이 다니는 사역자,
자신의 사역을 이루는 바벨탑이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영원의 관계 속에서 거룩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내 안에 거룩은 나의 소리를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 앞에
따름임을 기억해야한다.
진정한 자존감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소리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스스로 일하게 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 스스로 일해서 먹게되는 모습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곳에는 거룩이 없다.
영원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소리에 따름이 우리의 자존감을 영원으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