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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된 사람, 생령이 된 사람

육체가 된 사람, 생령이 된 사람

 

 

 

 

 

 

 

 

 

 

 

 

 

 

 

아담의 문제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로 작정한 때부터 왔다.

 

 

예수그리스도의 특징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고 그렇게 사셨다.

 

 

 

 

사람이 언제 육체가 되나?

 

자신을 위해 육체가 된다.

 

육체 안에 갇히게 된다.

 

 

 

[창6: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때는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사람은  영생하는 영적인 존재로 살게 된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된다.

 

 

 

 

 

성령이 오셔서 마음에 오신 다는 것은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 다는 의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자에게 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뜻과 자신이 원하는 삶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그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원하는 자들, 제자들에게만 성령은 임하신다.

 

 

그것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는 조건이다.

 

 

 

 

 

성령으로 사나 육체로 돌아가는 길은

 

성령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살때 영적인 존재가 아닌 육체가 되어 육체의 목적을 채울 뿐이다.

 

 

 

 

그래서 사울왕은 성령 , 하나님의 뜻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삶을

 

육체를 지나 악령이 지배하는 모습까지 떨어지게 된다.

 

 

 

 

 

제자라는 뜻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뜻과 방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것을 던질 있는 자가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침을 조심하라 했다.

 

 

 

[갈3: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을 자신의 뜻을 이용하는 자가 있고

 

복음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머무르는 자가 있다.

 

 

 

 

모두 육체로 마치는 자이다.

 

점점 육체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앞에 공허함과 허전함을 감출수 없다.

 

사람은 속여도 자신은 속이지 못한다.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성령으로 것인가?

 

육체로 마칠 것인가?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과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있는가?

 

 

 

 

첫째, 나의 유익 앞에 포기할 있느냐이다.

 

 

아담의 가장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기회가 있을 기회를 내려놓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높아 기회가 있고, 내가 누릴 유익 앞에

 

나의 것보다 하나님이 더욱 높아질 있는 길을 택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나의 유익,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누구나  가지는 유혹은

 

내가 높아지는 것이다.

 

나의 유익 앞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명분은 교회를 위해서,

 

부흥을 위해서,

 

성장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숨기고 있다.

 

자신이 존경 받는 것을 숨기고 있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숨기고 있다.

 

 

이런 사람은 평소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이나 높아지는 갈림길에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명분은 교회를 위해서~

 

그러나 교회 예수그리스도는 사람의 높아짐보다 교회가 하나되고

 

함께 세워져감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함께 지난 교역자들을 나는 분류로 나눈다.

 

함께하는 교역자 그리고 혼자하는 교역자!

 

 

함께하는 교역자는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최선의 사역을 하지만

 

그러나 다른 사역자들이나 다른 사람들 교회의 다른 부서의 일들과

 

유기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분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역자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만 사역하고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다른 사역자들이 부서의 교사나 서기청년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어떤 아픔을 가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서를 위해 필요에 따라 불러서 사용하고 일이 끝나면 관심이 없다.

 

나는 이런 사역자들을 혼자 하는 사역자라 부른다.

 

 

이들 대부분은 나름 자신이 뭘좀 한다 생각한다.

 

실력이나 지식이나 나름 뭔가 배웠다고 여긴다.

 

그것이 문제다.

 

있다고 여기는 순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교회는 혼자 튀는 순간 망하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하나됨을 목숨처럼 여기는 곳이다.

 

튀는 순간 망하는 곳이 교회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이나 개인의 달란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사람들속에 융화되지 못하는 하나됨을 말한다.

 

 

 

성경역사적으로 혼자가 사람들 때문에 수없이 망한 역사를 기록한다.

 

 

비록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삶이 어도 함께하는 공동체에 묻혀서 함께 걷는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자신의 유익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진다.

 

 

 

그래서 과도한 열심,

 

공동체보다 앞서는 열심은

 

사람들을 상처받게 하고 좌절케 하는 이유가 된다.

 

 

 

 

 

 

생각해야 한다.

 

일이 나의 유익,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일인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진심으로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을

 

일이 우선인지 사람이 우선인지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유익이 우선인 사람은 사람보다 일이 우선이다.

 

하나님 나라의 대안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이 일을 한다.

 

일을 위해 사람을 망치는 사람,

 

관계를 망치는 사람은 결국 속에 자신의 야심이나 뜻이 숨어 있다고 있다.

 

 

관계는 하나됨이다.

 

 

 

 

 

 

그래서 둘째는 개인이냐 공동체냐의 문제이다.

 

 

성령의 역사는 결국 공동체의 유익으로 드러난다.

 

자신을 위한 것은  결국 자신만의 배를 채우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아무리 명분이 그럴싸해도 일의 결국이 공동체의 화합과 기쁨으로 드러나야한다.

 

이유와 뜻이 좋았다해도 결과에서

 

공동체가 함께 유익을 누리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서 해서 그렇게 된다.

 

 

 

기억해야한다.

 

우리의 모든 것은 교회를 위함이다.

 

버림도 교회를 위해서이고

 

취함도 교회를 위해서 그러해야 한다.

 

 

 

성령이 땅에 공식적으로 역사하신 일은

 

교회를 세우시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으로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가며

 

교회를 성령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이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은

 

크게는 하나님 나라이고 작게는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세우는 일이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며 그것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며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하였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가장 위대한 기쁨이고 보람이다.

 

 

바울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하늘의 면류관이 그가 세운 공동체,

 

그가 세운 사람들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빌4: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2: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얼마나 일을 하느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웠느냐이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사람 가까운 사람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영향력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

 

가장 힘있는 영향력을 끼친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육체의 사람은

 

평생 살아도 남는 것이 자신의 몸과 집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가치 있는 삶은

 

성령을 따라 공동체를 세우고 사람이 남는 삶이다.

 

 

내가 살고 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도 내가 사람은 남겼다.

 

그래도 내가 사람은 나의 면류관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남아야 한다.

 

 

착한 행실로 좋은 소문을 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남아야 한다.

 

 

 

 

[마5: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의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나와야 하고

 

우리를 통해 구원 받는 사람이 더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나를 위함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삶의 이유이며 목적이다.

 

 

 

 

 

 

셋째는 분명한 목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명확한 삶의 목적, 사명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전부를 팔아서라도 지불할 있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불확실성속에 산다는 것이다.

 

가치가 흔들리고, 유혹이 많으며,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세상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명확함속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명확한 어떤 목적, 사명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냥 말씀대로 살면 되지~라고 하지만

 

성경의 많은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될수 없다.

 

 

말은 나의 삶을 흔들리지 않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의 말씀이 명확하게 있어야한 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이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시키는 것이고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각양 은사를 받게 되는데

 

은사가 자신의 사명과 연결이 된다.

 

 

삶이 재미가 없고 힘이 드는가?

 

사명 앞에 서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명을 받아도 때로 거부하고 도망하고 싶을 때가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수없이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사명앞에  서야한다.

 

그것이 있다면 더욱 잡아야하고

 

그것이 없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야한다.

 

 

아담은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세상을 하나님 대신 섬기는 것이 사명이다.

 

그런데 그가 사명을 망각할 하나님 대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했다.

 

오직 사명을 망각하면 생령의 사람이

 

육체의 사람이 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삶이 이렇게 곤고하고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가?

 

하나님은 사명에 맞는 힘과 능력을 주신다.

 

그런데 사명이 없으니

 

힘도 없고 능력도 없다.

 

 

사역자이면 그것을 감당할 힘과 능력을 반드시 주신다.

 

성도이면 성도가 가진 사명에 맞는 능력을 반드시 주신다.

 

 

 

 

우리의 문제는 자신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할 때부터 왔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이 육체의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좀더 것을 꿈꾼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작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평생 사명을 찾다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인생이 된다.

 

육체가 된다.

 

 

 

아담은 사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지 못해서 육체가 되었다.

 

 

 

 

인간이 이제 마지막으로 정복해야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은 전부를 주셨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아들도 주셨고,

 

그분의 호흡인 성령도 주셨다.

 

 

 

우리가 세상이 아니라

 

안의 나를 먼저 성령 앞에 내려 놓지 않으면

 

성령도 그리스도도 세상을 향하여 나를 보내시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의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세상이 문제가 있어서 아담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문제가 있어서 세상이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변화 시키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셨지만

 

성령은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먼저 택하셔서

 

변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와 하나님의 시작점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이 환경이 먼저 변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먼저 내가 변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육체가 것인지

 

성령의 사람이 것인지 결정되는 갈림길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