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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me? 1편

Why me?  1편

 

 

 

 

 

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7: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7: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7: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Why me?"  1편

신명기7:1-11

 

 

 

 

'처음으로 하나님을 부름'

 

 

아주 어릴적으로 기억한다.

 

6-7살인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아프셨다.

 

어머니께서 저녁을 잘 드시고 정신이 이상해지셨다.

 

인생이 너무 힘든 나머지 감정이 추체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사람들에게 부축되어 병원으로 가셨다.

 

 

홀로 밤을 세우면서 처음으로 그렇게 기도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머니를 도와주세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어머니는 다음 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의 길을 만들어 가셨다.

 

 

 

 

 

 

 

 

'첫 만남'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아니 일년에 한번 정도 교회를 갔다.

 

이상하게 잊혀질만 하면 교회를 가게 된다.

 

중2때 친구로 인해 다시 교회를 갔다.

 

이상하게 늘 간곳이 남천교회다.

 

그러다 잠시 잊혀지고 다시 고1때 그 친구를 통해 교회를 가게 되었다.

 

4월달에 가게 되었다.

 

주일은 빠지지 않고 가면서 처음으로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지갑에는 부적이 있었다.

 

수련회 첫날 말 그대로 사도바울을 만나셨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셨다.

 

저녁 7시에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눈물과 회개로 시작한 기도가 밤 12시가 넘어도 끝이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나는 것은

 

'나는 죄인이다.'..

'예수님을 버리고서 나는 절대 살 수 없다.'

 

이제 내가 절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는 기도를 계속해서 드렸고,

 

어릴적 젖먹으며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죄까지 모두 회개했다.

 

내 안에 영화가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다 기억이 났다.

 

그리고 예수님만 붙잡았다.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임함을 느꼈다.

 

그날 밤 새벽 2시, 어두운 곳에서 성냥을 찾아 들고는 홀로 지리산 골짜기로 가서 지갑 속의 부적을 꺼냈다.

 

그리고 성냥불로 그어서 그 부적을 태웠다.

 

그리고 내 마음에 다시는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기도했다.

 

순간, 하늘을 보라는 음성과 함께 하늘은 수 없이 빛나는 지리산 자락의 별들을 봤다.

 

'내가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을 축복하리라' 라는 말씀이 찾아왔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다만 '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나를 찾아오셨고,  수련회 삼일 동안을 눈물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나는 그때 애굽을 나왔고, 우상을 버렸다.

 

지금껏 있었던 눈의 비늘도 벗겨 주셨다.

 

그리고 내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쁨이 있음을 알게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도 기도하지 않은 날이 없고,

 

예배를 빠진 적이 없다.

 

생명의 역사는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내 안에 없던것 한가지가 생겨났다.

 

바로 '하나님의 눈'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올 때 아멘으로 받고

 

예수님을 모시는 순간,

 

내 안에 새로운 눈이 생겼다.

 

바로 하나님의 눈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젊을 때, 신앙생활을 하다 불신 남편을 만나 지금껏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의 인생의 길, 신앙의 길,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시 시작한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고,

 

저렇게 살면 인생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달라지니 인생이 달라졌다.

 

 

 

 

'생명'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실 때 나는 알았다.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가 살았다는 것이다.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이 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았다.

 

 

내가 주를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듯이,

 

홍해를 가르고 하늘의 문을 여시고 그를 통해 그들의 길을 여신 것처럼

 

그분은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 증거가 '내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한 자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에 사람을 세우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 말은 생명이라는 것으로 오지 않았지만, 생명을 가진 자에게 생명을 살리고 싶은 열망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사람을 세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왔다.

 

지금도 나는 사람, 생명을 전하고 생명이 태동하고,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그것에 평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뜨거움이 내 안에 있다.

 

 

 

 

 

 

죽은 자신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잉태되고

 

다시 내 안의 생명 때문에로운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에스겔의 죽은들에게는 수 없는 지식과 철학과 현대의 어떤 사조도 생명을 재잉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들어갈 때 그들은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본 사람만이

 

그분으로부터 내 안에 생명력을 공급받은 사람만이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생명력을 전달할 수 있다.

 

 

 

다른 복음이 없다.

 

오직 예수님을 내안에서 만날 때

 

생명의 역사는 계속 되어진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 안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원천인 씨를 가질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결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크냐, 많으냐가 아니라 생명을 소유하고 있느냐를 말한다.

 

 

 

 

성경은 곳곳에서 아브라함의 , 다윗의 씨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력의 전가, 생명력의 확장성, 생명력의 지속성을 말하고 있다.

 

죽은것 같으나 죽음을 넘어선 생명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능력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고후6: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복음이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있다한들 죽은자를 살려내지 못하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행13:30]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아니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께서 죽은 것 같은 예수님을 살리셨다.

 

아니, 죽었던 예수님을 새로운 생명으로 세우셨다.

 

생명을 가진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 났었다.

 

신약성경은 너무 많은 곳에서(무려 135곳에서) 죽은 곳에 생명이 소생함을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생명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 장이요 불쌍한 자라고 말한다.(고전15:19)

 

 

 

그래서 예수를 부인하는 자는 생명을 부인하는 자가 된다.

 

그 안에 생명이 없다.

 

 

[요일2:22]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예수를 아는 자는 생명이 그 안에 있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된다.

 

 

 

[고후4:11]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생명은 세상이 없는 것이다.

 

세상이 있는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이다.

 

 

 

세상은 죽음이 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한계 앞에서 두려워 한다.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어둠 가운데서 영원히 방황한다.

 

하지만 생명을 가진 자는 죽음도 이기, 육체의 한계를 넘는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

 

육은 무익하다 했다.(6:63)

 

 

 

 

육체의 마지막인 육신의 죽음으로, 육체의 안락으로, 보잘것 없고 하루살이 들풀과 같이,

 

없어질 안개와 같이 사라질 모든 육체의 정욕으로 영원한 영의 생명의 역사를 제한시키고 있다.

 

 

 

사탄은 생명 없는 자들로 조롱하며, 그들을 놀이게 감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앞에 심한 통곡으로 하나님께 아뢰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믿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죽음에서 잠깐 고난을 당하나 생명으로 불러주실 것을 믿었다.

 

 

[요5: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그러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죽음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된다

 

 

 

[요21: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예수님이 생명이고 그분의 말씀이 생명이다.

 

 

 

[요11: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생명이 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제한 받지 않는 사람이 된다.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된다.

 

 

 

 

 

생명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생명은 사랑에 기인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어두움에 있었다.

 

절망으로 그들의 인생에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

 

죽음을 넘어선 생명, 완전한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시고,

 

그 생명 있음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다시 부어주셨다.

 

 

완전한 생명이다.

 

죽어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죽음을 이기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실 때

 

우리의 어두운 인생은 빛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생명을 만나면 그안에 따뜻함을 체험한다.

 

 

 

 

'생명을 지속적으로 경험함'

 

고1때 예수를 만난 뒤,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뭔가가 늘 나를 이끌었다.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렇게 끌리듯 날마다 교회에서 한시간 이상씩 기도를 했다.

 

고등학교 3년을 그렇게 보냈다.

 

내 가슴은 기도할 때마다 부어주시는 뜨거운 가슴으로 늘 벅차오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더욱 뜨겁게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원리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한번 받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시키고 그 생명력이 더욱 뜨겁게 자라나게끔 지속적인 그분과의 만남이

 

나를 더욱 춤추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도 시험이 찾아왔다.

 

친구 때문이다.

 

전도축제를 했는데 중고등부가 다해서 4-5명이 왔다.

 

임원 한명이 그런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우리가 전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운운한다.

 

뭔가 잘 모르던 나는 그 친구의 말 때문에 하나님이 안계신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시험은 몇 주가 계속되었다.

 

중고등부 예배 때 눈뜨고 있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나의 생명이 죽어간다.

 

그렇게 있던 차에 가장 좋아하는 선배, 나의 선생님이 나의 형편을 알고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럼 나를 믿고 기도해보라.

 

신실하셨던 그분 때문에 다시 기도하게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방언을 받았고, 다시 알 수 없는 생명의 뜨거움이 살아났다.

 

생명은 있으나 환경에 의해 그 생명이 씨앗이 소멸되기도 하고 잘 자라지 못하기도 한다.

 

씨뿌리는 비유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자 내가 만나는 후배들이 이상하다며 찾아오기 시작한다.

 

함께하는 아이들이 생명이 들어감을 본다.

 

함께 기도하면 그들에게도 방언이 임하고 은혜가 임하기 시작한다.

 

 

기도회를 인도했다.

 

저녁 9시면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며 학교를 마친 아이들을 모아 기도회를 한참동안 인도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리더쉽도 주신다.

 

남들 앞에 잘 나서지 않던 내가 학교에서 회장도 하고(1,2학년)

 

사람들 사이에서 리더로 점점 세워져 감을 본다.

 

 

예수를 만난 뒤,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어 가시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다 한 친구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싶다고 함께 기도해 달라고 했다.

 

한달을 작정하고 학교에 가기 전, 방과 후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

 

세번의 응답을 받았다.

 

친히 예수님께서 오셔서 머리에 기름 바르심을 체험했다

 

함께 밤거리를 거닐고 그 은혜를 나누며 우리는 예수님의 일하심에 그저 놀랍고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의 길을 축복했다.

 

 

그친구는 고신대 신학과를 나와 지금 뉴질랜드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다.

 

 

생명은 생명을 만들어 낸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존재하고,(10:17)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전해진다.(17:23)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전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받은 그분의 사랑을 경험한 자, 즉 받은자만이 생명을 전해줄 수 있다.

 

아무리 보잘것 없어도 생명의 씨가 내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은 나를 통해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냄을 감사한다고 하셨.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와 어린 아이들을 대비하고 있는가?

 

 

여기서 어린아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야기한다.(10:21)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와 어린아이들의 차이점이 뭔가?

 

그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받은자와 생명이 없는 자의 차이이다.

 

예수님의 생명, 말씀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말한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앞에 단어가 빠졌다.

 

'스스로'라는 말이 빠졌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여겨 지혜와 슬기의 원천인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 자체를 받지 않았다.

 

결국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어린 아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자들의 대명사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생명을 받아들인 자이다.

 

생명의 빛은 어둠의 빛을 물리친다. 그래서 70인이 전도할때 귀신이 떨어지고 병든자가 낫게 된다.

 

예수님이 기뻐하며 돌아온 어린아이들-제자들-에게 한마디 한다.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다.(10:20)

 

하늘에 기록된 사람.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다. 생명을 소유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일의 결과는 우리의 존재가 결정한다.

 

생명을 소유하면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 하실 일을 말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함을 기뻐하라는 말이다.

 

행함이 아니라 존재, doing 아니라 being 기뻐 하라는 말이다.

 

Being 된다면 doing 자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안에 생명을 받았는가?

 

이것은 받은 자는 안다. 생명을 소유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내안에 생명을 어떻게 전할지만 남게 된다.

 

내가 본 것, 내가 경험한 것을 말하고 싶다면 내 안에 생명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생명이 있다면 열매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그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야기를 하는 곳이 두 군데인데 한 군데는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어진다고

 

아버지께 감사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고, 한 군데는 이야기 뒤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30) 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의 말씀을 하셨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온유한 것이고, 겸손한 것이어서 그렇게 하면

 

마음이 쉼을 얻고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한다.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는가?

 

겸손하지 못하는가?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모든 일과 세상살이에서 내가 앞서기 때문이다.

 

그분께 묻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 계산, 경험으로 하니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다.

 

그래서 마음에 쉼이 없어서 고달프고 지친다.

 

짐은 얼마나 무거운지 어깨가 무너져 내린다.

 

내가 내 뜻대로 하니, 내가 책임지니 무겁고 어렵다.

 

예수님의 사역의 원리, 예수님의 쉬움과 가벼움의 원리는 모두 '아버지의 '대로이다.

 

 

 

 

 

 

'더 깊은 하나님을 만남'

 

 

고1을 마치고 2학년인데 학생회 임원을 몇 개 맡았다.

 

3월 한달 무리를 했다.

 

부산시내 고등학교 임원 수련회를 가기전날 병원에 가보니 심각한 간염이란다.

 

그 수치가 엄청나서 심각해질 수도 있단다.

 

결국 일년 후학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나는 더욱 깊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한참 좋을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된다.

 

마치 예수님을 알았던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 생명이 없는 자 같이 떨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아픔은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더욱 더 깊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만 보고 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를 의지 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 하지 않고,

 

세상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중요한 시간이 된 것이다.

 

 

 

복학을 하고,

 

총학생회 임원이 되었다.

 

소위 말하는 총학생회장이다.

 

3학년은 취업으로 일찍 나가서 1,2 학년 총학생회장인 내가 회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알게 되었다.

 

권력이 힘이 얼마나 부패하고, 그것을 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 없는 비리와 술판과

 

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지.

 

3학년 총학생회장이 자연스럽게 되던 어느날, 나는 그 자리를 친구에게 넘겨주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죽였다.

 

그 이후, 나는 한차례도 임원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리더쉽을 주셨지만, 세상의 리더쉽은 이미 부패와 손을 잡지 않으면, 술과 담배와 여자를 가까지 하지 않으면  힘든 것임을 알았기에 그 후에 어떤 형태의 세상 리더는 거절했다.

 

 

신대원에 가서도 매학기 어김없이 찾아오고, 총학생 회장의 자리도 만들어 지지만 이미 내 마음은 그 모든것을 버렸기에

 

나는 그저 묵묵히 하나님과 함께함을 즐겼다.

 

 

그것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더 없는 선물을 주셨다.

 

바로 '친구'이다.

 

 

아프다는 나의 말에 그렇게 전도해도 오지 않던 친구가 교회를 오기 시작했고, 그 친구는 심성이 좋아

 

예수님을 잘 믿고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로 함께한다.

 

세상을 버리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를 주셨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기도하시고, 기회만 되면 홀로 시간을 가지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구원자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고 홀로 시간을 가지실 필요가 있었을까?

 

비밀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묻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가장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가서 그분의 뜻을 발견할 때 그분은 길을 여신다.

 

구한다는 의미는 바로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생명되신 하나님을 만날 때 그분의 놀라운 뜻을 발견하게 될 때 마음에 평안함이 온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대신 일들을 풀어가신다.

 

그럼 우리가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수시로 알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14:16)

 

그분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함께 일하는 자로 부르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토록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함께 공감하고, 그분을 이해하며 그분의 영원한 뜻을 발견하고

 

세상의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이 그분의 뜻을 존중하는

 

생명의 유기체로서의 삶을 원하신다.

 

 

 

 

 

아담은 모든 것을 누렸으나 스스로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지 않았다.

 

결과 세상으로 갔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그분의 높고 측량할 수 없는 존귀한 뜻을 알아드리고 그냥 공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들을 하나님의 손을 통하여, 천사를 통하여 이루어 가시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자의 특권이자 기쁨이다.

 

하나님의 이런 기쁨을 우리는 결단코 뺏어서는 안될것이다.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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