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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쉐마)삼말(삼마)

삼하(쉐마)삼말(삼마)

 

 

 

 

 

 

6: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6: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6: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6: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6: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6: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6: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6: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6:19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6: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6: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6: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6:23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6: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공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해야할 세가지와 하지 말아야할 세가지"

신명기6장1-25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사람이 어떤 말을 할때 그 무게감이 달라지는 것이 말이다.

그냥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진심을 다해 그진실성을 담아서 그의 말을 전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말을 해도 그사람이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말과 삶이  다른데서오는 괴리감을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은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얼굴이다.

그사람의 영혼이고, 그사람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말한마디를 해도 정말 믿어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해도 하면 할수록 화가나는 사람이 있다.

 

목사가 말을때할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

목사도 사람이어서 허물이 많고 부족함이 많아서 말의 권위나 말의 진실성이 떨어질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약함을 보지 않고 말씀 자체가 권위를 가지도록 보호하심을 볼수 있다.

단, 그 목사가 진심으로 하나님앞에 서있을때 이야기이다.

 

하나님앞에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과 자신의 삶과 말이 한 방향을 향하여 나아갈때

가능하여 지는 것이다.

 

언제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을 전하지만 그 말씀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목사의 삶과 말이 같은 방향을 향하여 서있지 않을때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여 서있을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100%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다.

 

한마디로 오해가 생기기 시작한다.

목사의 말이 진실성이 없다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까지 진실성이 없는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버린다.

엄청난 죄악이 아닐수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두번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다.

 

한번은 잘 넘어갔지만 나머지 한번은 큰 실수를 하게 된다.

반석을 두번쳐서 백성들에게 화를 낸일이다.

 

이 일로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이유가 뭔가? 간단하다.

 

'모세가 이스라엘 목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민20:12)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아니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입장에서 그렇게 항변할수 있다.

 

그래서 실제 그는 수도 없이 하나님께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서, 하나님 앞에 너무 불경해서 내가 화를 내었습니다. 한번인데 안됩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일로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라'(신3:26)

 

 

 

하나님께서 한번의 실수를 왜이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거룩을 잃어버릴때 아무리 모세라 할지라도 그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사역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아니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본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곧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모습을 볼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모세이다.

 

그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을 잃어버릴때 하나님은 모세의 사명을 제한 하셨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역자의 말과 삶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실수나 약함도 용납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민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리고 좀 우쭐해졌는가?

모세가 구스여자를 첩으로 맞았다.

 

구스여자는 이디오피아여자를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문둥병이 나게해서 혼을 내셨다.

 

개인적인 실수는 하나님께서 문제 삼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권위를 말씀하시면서 이 모세는 너희가 건들지 마라라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사실 말한번 잘못하는것보다 여자를 취해서 사는것이 더 큰 문제 같은데

 

하나님은 말잘못한것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시고 모세의 사명을 제한하셨다.

 

왜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집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개인적인 일일수 있다.

 

그러나 공교회앞에서 행한 말은 곧 하나님의 대언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개인에 의해 제한받고 그 거룩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그자체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얼굴을 대면하여 본 모세도 용납받지 못했다.

 

한번의 실수가 모세가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만드는 일이 된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수종드는자가 하나님의 거룩을 유지하기 원하신다.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잃어버릴때 하나님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신 여러 사건들을 본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이미 그 곳에는 하나님의 사명이 제한되어진다.

 

 

 

그런 배경에서 모세는 가나안이 보이는 요단강 이쪽편에서

 

백성들을 향하여 설교한 것이 3편의 설교 신명기이다. 

 

가나안을 보면서도 가지 못하는 처절한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모세는 설교하고 있다.

 

 

 

조상적부터 그렇게 갈망하고 수많은 우여곡절끝에 내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자신의 과거와 경험과 체험과 인격을 세편의 설교를 통해 부어놓고 있다.

 

자신의 실수를 안타까와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계시고 지금까지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이스라엘이 행한 것을 돌아보며 어느 길로 가야할지를 피를 ?아가면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것도 죽기 한달전에 전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간절하고 간곡하게 자신의 심정을 전하고 있겠는가?

 

 

 

 

신명기서의 중요성

 

오늘본문은 이스라엘 교육의 핵심이고 신명기의 핵심이다.

 

'쉐마(Shema)'란 '들으라'라는 명령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 말로 시작합니다. 듣고순종행야만 하는  절대 명령이다.

 

이 성경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예수님께서 40일 광야 시험에서 마귀에게 말씀으로 이기셨는데

 

그때 인용한 성경이 모두 신명기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릴적부터 이것을 외우고 암송하게하는것이 민족의 교육이다. 

 

모세의 심정이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전해져 그들이 조상 대대로 그것을 교육하고 있다. 

 

 

그 교육이 전세계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의 이스라엘을 만든 배경이다.  

 

 

 

'삼하삼말'

 

 

모세가 전한 이 '쉐마'는 결국

 

세가지 행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 세가지로 구분된다.

 

그래서 삼하삼말이 된다. 

 

삼하삼말이 쉐마삼마로 들리지 않는가?

 

말을 해서하면 '들으라 여호와께서 저기 계신다'가 된다.

 

 

 

무엇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만들었고, 모세가 죽어가면서 중요하게여기는 신앙의 원칙이 뭔가?

 

그것은 주사위의 여섯면과 같다.

 

아무리 던져도 여섯게 중에 하나가 나온다.

 

 

 

해야할것 세가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사랑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기 힘든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 말인가?라고 물을수 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느냐를 살펴보면 우상섬기듯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다.

 

나를 좀 인격으로 대해서 사랑해 달라는 말이다.

 

맹목적이고 비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 대화하고 말하고 듣고하는 사랑을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뭔지 구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참사랑은 인격적 교제안에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는것이 사랑이다.

 

그분이 원하는것을 해 드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을 할때 가장 힘든것이 뭔가?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첫사랑을 실패했다.

이유는 하나다. 내 방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했다.

팔장을 끼자고 하면 나는 학생이어서 안됩니다라고 했다.

그쪽은 대학생이고 나는 고등학교 4년을 다녀서 고3이다.

나는 학생이니 학생 신분에 맞게 하자했고, 여자는 대학생이고 나이가 있는데했다.

아무튼 나는 내 방식을 고수했더니 떠났다.

 

결혼을 하고 살면서 힘든것은 사랑을 해도 내 방식을 자꾸 요구하게된다.

그럼 반드시 행복하지 않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것을 듣고 그대로 해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언제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아들 이삭을 달라할때 그냥 드렸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다.

 

듣고 알때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할것을 찾는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더니 그것을 하나님께서 경외하는줄 안다고 하시면서 그를 의로 여기셨다.

 

 

아무리 신앙생활해도 그분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사랑할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그분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한다.

 

그래야 마음을 다하든지 성품을 다하든지 뜻을 다하듯지 할수 있다.

 

그래서 곧바로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가? 아니 사랑해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가?

 

그분을 인격적으로 접근하라.

 

그리고 그분께 당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들어라.

 

그래서 쉐마의 주제는 '들으라'이다.

 

들어야 사랑을 한다.

 

아직 자기사랑에 빠져 그분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좀 들어라'라거 명령형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명령형으로 말씀하시는것은 너무 중요한것들만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도 명령형이다.

 

 

왜 사랑이 안되나?

못들으면 사랑이 안된다.

 

가면히 생각해보면 교회는 열심히 다녔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뭘 원하시는지 듣지를 못한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인격적으로 내 문제를 말하고 그리고 기도가운데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마음을 다해, 성품을 다해, 뜻을 다해 그 음성을 따르는것이 사랑이다.

 

 

왜 자꾸 먼저 행하려고 하는가? 들어라 그래야 길이 보인다.

 

나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은 들은것을 할때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했다. 성경에서 저주는 극악한 사람에게 주는 단어이다.

 

아담을 꾀었던 뱀을 저주했다.

 

그 단어를 쓰고 있다. 뱀과 사랑을 하지 않은 자와 같은 동급으로 여길만큼 사랑하지않음은 무서운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지 잘 알아야한다.

 

늘 하지 않아도 된다.

 

듣는것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말씀을 다 원하지 않으신다.

 

지금 이순간 내 앞에 있는 상황에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

 

결단해야할것이 있다.

 

그 순간에 내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듣고 그것을 행하면 된다.

 

듣지 못하면 사랑도 못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 들어야하지!!!

 

'들으라 이스라엘아~~'

 

 

 

 

 

둘째, 지켜 행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는 반드시 전제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나누는 하나님과의 관계라 했다.

 

관계의 성장, 관계의 깊어짐은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것이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가 듣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있다는 전제이다.

 

우리가 듣는가?

 

나에게, 나의 삶에 우리 공동체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행한다.

 

 

 

아무리 에덴동산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하신다.

 

그래서 아담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아담은 들었는데 그것이 손대도 선악과를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유지할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말씀하시지만,  

 

사람의 형편과 여건과 수준에 따라 구별된 말씀을 하신다.

 

구별된 말씀이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 하나님의 계획을 포괄적으로 내포한 상태에서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나를 가장 존귀케 만드시는데 필요한 시간 그 현장에서 필요한 말씀을 말한다.

 

 

 

모세에게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원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처럼 애굽에서 아내를 속일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를 인도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믿음의 훈련만을 시키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전성기를 맞을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

 

 

 

 

 

모세에게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훈련을 하셨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기록한다.

 

 

 

 

 

모세가 받은 훈련은 그것이었다.

 

내가 나서지 않는것,

 

내가 앞서지 않는것,

 

하나님의 뜻만 구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훈련.

 

그래야 수백만의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상대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니다.

 

그에게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것은 온유함이 아니다.

 

적들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싸워 나갈때 선봉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강한 용사,

 

탁월한 장군으로서의 담대함이 필요했던것이다.

 

구별된 말씀은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과 직결된다.

 

 

 

 

사명이 어떻게 오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결단코 다르게 온다.

 

사명이 올때, 각자에게 구별된 말씀으로 올때

 

하나님은 강압적으로 요구하지 않으신다.

 

정말 인격적으로 말씀을 받아들일수 있는 상황으로 인도하신다.

 

인격적인 관계로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미리 체험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셔서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함께 받아들이도록 만드신다.

 

하나님은 무지막지하게 피도 눈물도 없이 사명을 주시지 않고, 말씀도 주시지 않는다.

 

 

 

 

 

성도는 성도에 맞는 체험을 통해 말씀하시고,

 

목사는 목사에 맞는 인격의 만지심을 통하여 감당하도록 베려하신다.

 

 

 

 

 

나는 선교를 나오기전에 신학교 3 동안 선교를 깊이 연구하거나 사명을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정말 사람을 세우는 목회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남들보다 10년을 늦게 시작한 상황에서 이제는 말씀대로 앞만보고 달려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둔 몇개월전 느닷없이 하나님은 아프리카를 가라고 하신다.

이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마음이 올때 정말 아무 갈등없이 ''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부모님의 상황이나,

내가 기도하고 준비한 방향을 볼때 말도 안되는 결정이다.

그러나 하루밤만에 결정한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사명을 주신때는 20살때로 기억한다.

그때 나의 기도가 하나님과 만날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부족합니다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몇차례 하나님과 씨름을 그렇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래 그러고는 10년을 돌았다. 10 인것이 감사하다^^

 

다시 사명이 왔다. 아프리카다.

갈등없이 ''라고 했고, 인격을 다해 진심으로 하나님 원하시면 갑니다라는 고백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주고받음이다.

할수 없는데 억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인격적으로 고백하고 갈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나는 아프라카에서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때 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말씀으로 말할수 없는 감격으로

 

하나님 알아가기를 통해 인격으로 그분의 사랑을 알게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가신다.

 

그리고 각자에 맞는 사명을 위해 구별된 말씀으로 찾아오시다.

 

이때 개인이나 공동체가 ''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면 행할수있는 여건을 만드시고,

 

행할수 있는 힘도 주신다.

 

그리고 말씀을 행할때 기적 같은 은혜들이 일어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행할 없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일일이 적용해서 살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현장,

 

특별한 하나님의 이정표에서 말씀을 행하기 원하신다.

 

그때 우리는 말씀을 행하면 되는것이다.

 

 

 

 

말씀을 행하는 것이 어려운가?

 

지금 나에게 주신 구별된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함속에 있어서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에게 '들으라 이스라엘아'라고 외치고 계신다.

 

각자의 현장속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들으라' 되야 행할수 있다. 

 

 

 

한국교회는 7,80년대의 부흥회운동,

 

90년대 제자훈련과 찬양,

 

2000년대의 큐티를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큰 길을 내었다.

 

그럼 2010년부터는 어떤 운동은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나아가야하는가?

 

아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큰 부흥과 은혜의 물줄기를 어떻게 흘러내리기를 원하시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많은 문제를 세상으로부터 질타를 받는다.

 

교회마다 성도들은 교회가 이래서 안된다 우리 목사님이 이래서 안된다는

 

수많은 자기 반성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수 있을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한다.

 

한국교회는 이미 교회를 가는것과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체질화 되어있다.

 

하지만, 그것이 능력을 내지 못한다.

 

 

 

아프리카 남아공은 예수를 믿은지 300년이 넘었다.

백인들이 이나라에 들어올때 이미 복음을 들고 들어왔다.

내가 사는 미들버그만 해도 100년이 넘은 교회가 몇개가 있다.

초창기 백인들 정착할때 모습 그대로를 보전한 선교사 마을도 있다.

교회도 주일이면 다들 교회가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말씀을 묵상하고 큐티하고 개인적 하나님과의 관계갖기는 전무하다.

큐티라는 것은 모른다.

성경도 없는 사람이 태반이다.

한국교회는 너무도 신앙의 유산을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다.

 

전세계 어느 나라가 새벽마다 말씀을 들으며,

기도회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는 고정화된 프로그램이 있는가?

인생의 문제가 있을때 나무뿌리정도는 뽑아야한다는 신앙적관습을 가지고 있는가?

특별한 문제가 있을때 금식하고,

티비만 틀면 주옥같은 설교가 흘러넘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왜 세상은 교회를 욕하는가?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너무 관심을 많이 가졌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시각을 너무 의식하고 살았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세상의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이정도는 형편이 되야 세상에서 할말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정도는 잘 살아야 세상에서 욕먹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축복이 아니라 내 기준에서

 

아니 세상의 기준에서 축복을 구했고,

 

나의 자녀도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고 축복하시는 자녀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자녀를 평가하고 그렇게 잘 되기를 바라고 왔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라기보다는

 

세상에서 기죽지 않는 자녀로 열심히 열심히 땀흘리고 살았다.

 

그결과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외형적 축복을 통해 소위 성장이라는 것을 주셨지만

 

외형적 축복이 오는 동안 잃어버린 한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는 눈을 잃어버린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존경하게하는 방법이라는 글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것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높이시는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을 들어갈때, 애굽을 나올때, 광야에서 생활할때

 

그들이 한것이 하나도 없다.

 

 

이리 가라면 갔다.

 

저리 가라면 갔다.

 

시간이 지나보니 아무것도 안한것 같은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되었다.(6:11-)

 

파지도 않은 우물을 얻게 되었고,

 

심지도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어 배불리 먹게 되었다.

 

 

그들이 심지도 않고

 

짓지도 않은 큰 집과 과수원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받게 되었다.

 

 

말씀대로 행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높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혹여 그들이 오해할까 한마디 더 하셨다.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땅으로 인도하셔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9:4)

 

 

내가 열심히 간구하고 기도하고 노력해서 내 집이 내 자녀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두 날려버리고

 

믿음은 하루 아침에 모레위에 지은 집과 같이 날라간다.

 

 

한국교회는 외형적 축복이 곧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착각한다.

 

그것은 그저 일부분이다.

 

왜 일부분이라고 말하는가?

 

외형적 축복은 믿지 않는 나라들도 많이 받았다.

 

외형적 축복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망한다.

 

진정한 축복은 우리가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축복이 된다.

 

내가 뭔가 물질적 복을 받았다고 기뻐하지 말라.

 

 

진정 기뻐할것은 나의 약함을 통해서,  나의 부유함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을 통하여 드러날때 그것이 기쁨의 이유가 되는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하나님의 눈이다. 하나님의 시각이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눈을 가질때 다시 일어설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말씀을 들을때 그럼 제가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으라.

 

아침마다 큐티를 하면서 그럼 제가 뭘할까요라고 물으라.

 

기도할때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으라.

 

그리고

 

'행하라'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할것이다.

 

말씀을 듣고 가라면 가면된다.

 

말씀을 듣고 서라면 서면 된다.

 

짐을 싸라면 싸고

 

소리를 지르라고 하면 소리를 지르면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실때,

 

말씀으로 임재하실때는 반드시 우리가 뭔가를 해야할 상황에서 나타나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때는 행함을 반드시 전제한다.

 

하나님은 행하시는 하나님이다.

 

말씀의 임재, 말씀의 선포는 행함의 의무른 낳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뭔가를 행해야할때 나타나셨다.

 

 

 

'너는 본토아비집을 떠나라'

 

'바로에게 가라'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는 우리 인생 지금까지 알고 경험한 하나님을 통해

 

지금 내 앞에 있는 그 구별된 말씀을 목숨걸고 지켜낼때

 

하나님은 홍해도 가르시고, 요단강도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도 무너뜨릴것이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의 행함이다.

믿음으로 받고 행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다.

 

 

 

 

세째, 가르치라

 

 

수많은 시간을 가르쳤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안다.

 

교회마다 성경퀴즈다 무슨 성경공부다해서 어지간한 이야기는 안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제목만 들어도 오늘 목사님이 이렇게 시작하고 저렇게 결론을 내겠구나하고는

 

설교내내 주보를 보든지 스스로 자기만의 하나님을 만난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목사로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 성경자체를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의 규례와 법도와 말씀 자체를 가르쳐서 아이가 신앙안에서 자라는 것이 없는 교육이다.

 

이스라엘교육의 핵심은 토라 자체를 가르치고 성경을 일찍부터 외우면서 지혜롭게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달라 세상에서 사는 원리를 일찍부터 깨우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하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목적은 행하기 위해서이다. (6:1)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어릴적부터 가르치는 것은 아이가 성경의 원리를 깨닫고

 

세상의 원리는 성경의 원리에서 나왔기에 성경을 배우면 뭔가 다른 아이로 자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아이로 키울수 있다.

 

 

 

 

 

, 전제가 있다.

 

가르치는 자의 법칙이다.

 

체험한 것을 가르치라.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성경의 원리대로 체험이 있을때 그것이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

 

성경말씀은 성경자체만으로 능력이 있으나,

 

가르치는 자가 체험한 하나님을 이야기할때 능력이 배가가 된다.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많이 해도 경험이 없는 말씀을 전하는 것과

 

말씀 때문에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전할때와는 너무 다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보고 들은것' 다른 말로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본것들 그리고 직접 예수님께 들은것을 전하지 않을수 없다'라고 한다.

 

그들이 말씀과 함께하며 체험한 예수님을 전할때 그것이 듣는 사람에게 능력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수없이 성경을 가르쳤다.

 

하나님과 함께한 체험없는 말씀만을 가르치면 절에서 불경을 외울때와 다름없는 힘없는 말씀이 된다.

 

 

 

 

 

 

성경은 가르치라고 말할때는

 

반드시 네가 경험한 하나님,

 

체험한 하나님을 전제로 해서 가르치라고 말한다.

 

내가 경험한 말씀이 아니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신화나 전설과 다를바가 없어진다.

 

말씀이 능력이 있는 것은 내가 들은 말씀,

 

내가 경험한 말씀을 가르칠때 말씀은 나를 통해 그대로 전달된다.

 

물론, 말씀자체가 능력이 있다.

 

그래서 내가 말씀자체를 보고 읽고 묵상할때 능력이 나타나지만,

 

그것을 가르칠때는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경외함을 가르치라고하다.(4:10)

 

하나님 경외함을 가르쳐야한다

 

 

경외함이란

 

말씀을 듣고 행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는 까지 이다.

 

 

 

그것을 가르쳐야한다.

 

하나님을 목도한 일을 가르치는것이 가르치는것이다.

 

개인적인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나누고 가르쳐야한다.

 

그래서 개인의 간증이나 가정에서 개인이나 가정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자녀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하나님 경외함의 시작이다.

 

말씀과 함께 그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결단코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목도한 일을 자녀에게 손자에게 이야기 하라고 한다.

 

 

그것이 6 20부터 25절까지 이야기이다.

 

'여호와의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뜻이냐고 자녀들이 묻는다면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 애굽에서 광야에서 베푸신 기적과 은혜며

 

그것을 지킬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것을 지킬때 항상 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라고 가르치라고 한다.

 

 

 

삶에 가정에 공동체에 역사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하신 말씀들,

 

그리고 그것을 지킬때 항상 하나님의 복가운데 있다는 원리이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그때 함께한 말씀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고 지킬때

 

하나님은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자의 조건이 뭔가?

 

 

경험해보지 못하면서 성경자체만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다.

 

 

짧은 말씀, 간단한 성경을 이야기해도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가르치라는것이다.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조건이다.

 

과거에라도 역사하신 하나님을 나누라.

 

오늘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가르쳐야 다음 세대가 하나님 경외하기를 잊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는가?

 

 

말씀을 전하는 자가 경험한 하나님이 없어서이다.

 

갈수록 말씀을 듣기 위해서 존재하고 행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은 오로지 지켜행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가르칠수 있다.

 

 

작은 역사라도 내가 말씀앞에 하나님을 체험했다면 그것을 가르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감동을 전할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지식전달에서 체험전달로 변해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을 전하지 말고 삶에 역사한 말씀을 전해야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자녀에게 손자에게 전했다.

 

그래서 말씀이 능력이 있는것이다.

 

파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속에서 일하셨던 하나님을 자녀에게 영혼들에게 전하라.

 

그것이 수없이 외치는 경험 없는 생명력 없는 성경 이야기를 전하는 보다 힘이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면 가만히 있지못하는가?

 

경험, 체험은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경험하지 못하면 가르칠 것이 없다.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다음세대의 숙제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하게 것인가?

 

 

경제적으로 편해진 한국과 한국교회가 이제 무엇을 두고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것인가?

 

그것을 잡는 것이 살아남는 비결이다.

 

 

이미 다 아는 하나님의 이야기, 이미 아는 교회이야기!

 

그것이 개인의 체험으로 내려올 ,

 

교회가 함께 하나님을 말씀 중심으로 체험할 때,

 

개인과 교회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다음세대가 나올 것이다.

 

 

 

 

 

 

 

 

 

 

 

(아래 세가지는 다음에 계속해서 올립니다. 너무 글이 길어서 보기가 힘듭니다^^)

 

 

하지 말아야 할 세가지

 

 

 

 

 

 

 

 

신명기 6장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는 부분을

"쉐마 이스라엘"이라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고 아도나이(주님)로 바꾸어 말한다)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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