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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나?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나?

 

 

 

 

4:41 그 때에 모세가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4:42 이는 과거에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 곳으로 도피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 중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가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기 위함이라

4:43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나?"(도피성)

신명기 4:41-43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어떤 분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다.

 

"목사님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그럼 나는 바로 대답한다.

 

"집사님 그럴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산다.

 

그래서 우리의 결국이 잘사는것,

 

부자가 되는것,

 

영적으로 풍요한 삶을 사는것을 목표로한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그 목표를 향하여 가다보면 잃어 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아니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사람이 언제 실망을 많이 하는가를 보면,

 

더 많이 믿었기 때문에 더 많이 실망하게 된다.

 

그런데 많이 믿는 사람을 향하여 늘 기억해야 할것중에 한가지는

 

그 사람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사는 삶에 중독이 되어서인가?

 

그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이다.

 

그럼 사람은?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다.

 

이것이 꼬이면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나?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다.

 

 

 

 

감사한것은 평생 사람때문에 힘들어 본적이 없었다.

 

오직 군대 갔을때 3개월을 힘들어 했다.

 

일반 포병으로 들어갔다가 행정병 소위 서무계로 자리가 바뀌었는데

 

인사계님이 나에게 그렇게 힘든 존재일수 없었다.

 

내일 전역을 하는 사람도 그 분앞에서 벌벌떨고, 이분이 한번 이놈하면 그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내가 왜 서무계로 들어가게 되었냐면 내 앞 선임이 인사계님때문에 정신병이 나서 들어가게 되었다.

 

병원으로 후송을 간 그 선임이 이 인사계님을 보면 온몸이 떨려서 밥을 먹다 숟가락이 떨려서 입으로 손이 들어가지 못할정도다.

 

그 후임으로 내가 들어가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3개월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국 감사하게 그분이 나를 잘 알게 되고 한번도 혼나지 않고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분이 문제가 아니라 군인들이 군인의 역할을 못하니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분이 어느날 집으로 초대를 해서 갔더니 왠 여자분이 있었다.

 

그분의 처제다. 부산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불러서 선을 보게 한것이다.

 

서병장 내 처남하자하신다. 

 

감사하게 그 분이 나의 아내는 아니다.

 

하나님은 힘든 시간을 은혜로 잘 넘어가게 하셨다.

 

 

최근 몇달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에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하는 마음이다.

 

결론은 그럴수 있다이다.

 

 

우리는 이렇게 가끔 이런 일들을 겪게된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우리가 사람을 너무 믿은것이다.

 

왜 충격이 큰가?

 

그 사람이 그럴줄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땅을 허락하시면서 동일하게 도피성을 만들라고 하신다.

 

도피성은 한마디로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사람이 정당한 재판을 받기 전까지 피할수 있는 장소이다.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만드시면서 도피성을 동일하게 만드셨나?

 

 

그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럴수 있다는것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아 사람은 그럴수 있구나하고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어날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알고 계신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쩔수 없이 일어나는 사고나 어려움이 있다는것을 그분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가나안이지만 가나안을 주시면서 동일하게 예외의 일들을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에 대해서 그분은 너무도 잘 아신다.

 

사람의 약함을 너무도 잘 아신다.

 

그래서 실수로 부족해서 한 실수를 받아주시고 정당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도록 피난처를 만들어 주신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도 중요하지만 가나안과 동일하게 약함을 피할, 부지중에 일어난 실수를 받아주실

 

그분만의 그늘을 같이 만들어 주셨다.

 

 

사람이 저지를수 있는 최고의 죄는 살인이다.

 

사람이 아무리 실수를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만큼 큰 실수는 없다.

 

그 살인도 받아주실 정도면 하나님은 모든 실수를 용납해주실 용의가 있다는 말이고

 

사람은 그런 실수를 할수 있고, 약할수 있음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은 반드시 본인이 그 도피성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도움을 주면 안되고 본인이 그 도피성으로 가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다른 사람이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그 도피성으로 피해야한다.

 

도피성으로 가면 살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가라는 것이다.

 

본인의 믿음을 테스트한다. 본인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해도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죄의 여부를 파악하기 전에 죽인 사람들의 친척 형제로부터 죽을수 있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믿음으로 가야한다.

 

이것이 첫째 원리이다.

 

본인의 의지, 본인의 마음이 도피성으로 가야한다는 뜻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것을 주어도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

 

뜻이 있으면 길을 찾도록 하나님은 만드셨다. 

 

그 어떤 어려움, 죄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나아게 도움을 줄수 없다.

 

구원의 문제는 내가 의지를 가져야한다.

 

내가 믿음을 가져야 갈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도피성이다.

 

나에게 문제가 생길때 내가 의지를 가지고 믿음으로 가야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길을 찾을수 있다.

 

 

 

둘째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아무리 살인자라도 모든것이 용서가 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처음에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제사장이 죽는것과 살인자의 죄가 용서가 된다는것이 무슨의미가있나?

 

구약의 죄사함은 제사장이 제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동물의 피를 통해서만 용서되었다.

 

피는 피로 용서를 받는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죽는다는 말은 그 모든 죄를 대제사장이 다 지고 간다는 것이다.

 

나의 죄를 동물이 아니라 사람인 대제사장이 지고 죽는 다는 말이다.

 

내 죄값을 그가 진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유이다.

 

그 법을 가나안땅을 허락함과 동시에 도피성을 짓고 이법을 반포하셨다.

 

 

 

아무리 가나안이라도 사람이 사는곳임을 하나님은 알기에

 

일어날수 있는 최고의 죄를 살인으로 보고 그 살인도 용서받을수 있는 기회를 열어놓으신것이다.

 

결국 그 대제사장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죽을때 동물의 피로 한사람의 죄가 해결되지만,

 

대제사장의 피로 도피성 모든 죄가 사함받고,

 

결국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피흘리심으로 인류의 죄가 사함받는 원리를 설명하고 계신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가나안을 정복해도 해결되지 않는것 한가지는 우리의 죄 문제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것을 누린다해도 내안에서 끊임없이 울부짖는 죄의 소리를 해결할수 없다는것이다.

 

교회를 가면 갈수록 해결되지 못하는 내안의 죄로 통곡하고 탄식하는 내 영혼의 눈물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을 주심과 동시에 가나안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여기서부터 보게 되는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든 지을수 있는 부지중의 죄, 가장 큰 살인까지도 끌어안고 갈 해법을 내 놓고 계신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약함을 안고 가시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내가 이렇게 사랑을 베풀었는데 네가 그럴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시고

 

그냥 말없이 대제사장이 죽음으로 우리의 약함을 채우시길 원하신다.

 

 

세상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할 말이 많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네가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라고 묻지 않고

 

그냥 죽음으로 나를 안고 가시길 원하신다.

 

 

그분이 택하신 영적 원리는 그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아담부터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해야할 대상인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면,

 

우리의 약함을 보시고 모든 죄도 안고가시며 품고 가시는 그분의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도대체 당신이 나한테 그럴수 있는가?'라는 항변을 하기전에

 

그들도 그럴수 있다라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대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피뿌림을 해야할것이다.

 

 

그들의 약함을 내 몸에 채우는 사랑의 흔적을 통해

 

하나님의 도피성이 내안에 존재하도록 해야할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 된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도피성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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