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04월 27일 한인교회 설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어떻습니까?
여러분 기쁠때는 찬양하고 힘들때는 기도하고 아플때는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인줄 믿습니다.
밥 쇼그린과 제널드 로빈슨이 [Cat and Dog Theology]라는 책을 썼는데 [강아지 성도 고양이 신자]라는 책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내용이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저자가 집에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면서 두 동물의 너무 다르게 사는 모습을 통해 예수를 믿는 사람과 비교해서 글을 적은 내용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생각부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는 “당신이 나를 귀여워해주고, 먹여주며, 보살펴주고, 사랑해주는 것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이 분명하군요.”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는 주인이 오면 꼬리를 흔들고 반기고 좋아서 어쩔줄을 모는다는 것입니다.
개는 모든 중심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고양이는“당신이 나를 귀여워해주고, 먹여주며, 보살펴주고,
사랑해주는 것을 보니 내가 하나님이 분명하군요.”
그래서 고양이는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양이는 자신이 영역이나 물건에 몸을 비비는대
주인에게도 다가와 몸을 비비고 갑니다.
왜 그럴까요?
너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개는 자기 영역에 오줌을 누는데 절대 주인에게는 오줌을 싸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비빕니다.
그래서 개와 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고양이처럼 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나의 도우미라고 여기는 성도입니다. 고양이의 삶의 목적은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개는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고 나는 그분의 충성스런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주인이 한번 만져주면 감격해 하고 감사해하고 좋아합니다. 여러분 개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이전에는 개 같은 이러면 욕인데 이 책을 통해보니 개처럼 이 말은 칭찬입니다.
옆 사람에게 칭찬 한번 하시지요. 당신을 보니 충성스런 개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오신 분이고 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인줄 믿습니다.
맞습니까? 그럼 왜 나의 죄를 위해 구원을 위해 오셨을까요?
좋은 말 할 때 대답해 보세요. 왜 구원을 주실까요?
구원이 목적이면 우리는 예수를 믿고 천국으로 가야합니다. 그럼 왜 살아 있을까요?
그 대답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처음으로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4장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나의 죄, 구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 다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 몇 일을 사셨나요? 사십일입니다.
그럼 그 사십일 동안 무엇을 하셨나요? 사도행전1장 3절입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하십니다.(마6:33)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나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십시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하나님께 남은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자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셔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만물이 밑에 있고 사람이 그 위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편이 아니고 세상의 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 때문에 빼앗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자를 죽이셨고, 성령을 보내셨고, 성부는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진 전부를 거셨습니다.
자 그런데 왜 하나님 나라를 잃어 버렸을까요?
왜 세상에 문제가 생겼을까요?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 전체를 이해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나?
그것은 만과 도가 바뀌면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원래 사람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섬기던 사람이 자신만 섬기게 되고 자신만 사랑하게 되고
자신만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할 사람이 나만 섬기라하고 나만 사랑하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입니다.
자기만 중요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율법 중에 어는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인가?
왜 질문할까요? 시험코자함입니다. 모함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가장 잘 아는 율법사가 무엇으로 시험합니까? 율법입니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이 곧 무기가 됩니다.
사람들은 질문을 하고 대화를 할 때 어떻게 할까요?
항상 의도를 가지고 합니다. 대화를 할 때 대화를 하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합니다.
사람들의 약점을 찾으려고합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대화는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코자 올무에 빠뜨릴 목적이 있습니다. 내 뜻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자기가 잘하는 것으로 힘들게 합니다.
학력이 되는 사람은 모든 관점은 학력이구요, 자녀가 잘된 사람은 자녀가 기준입니다.
다 잘해도 자녀가 잘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기준 미달이라고 여깁니다.
돈이 많으면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실력과 능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만과 도가 바뀔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것을 모릅니까?
이 말씀은 신명기 6:5절부터 있는 쉐마라고 유대인들이 어릴적부터 그렇게 외우던 성경구절입니다.
죽도록 외우고 외우던 말씀인데 이 율법사가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럼 왜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까요? 왜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인간의 행복 3가지 조건을 만드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만을 사랑할 때 행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는 사람도 사랑할 때 행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 좋으셨는데 유일하게 안좋은 한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일까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혼자 있는 것은 악입니다. not good 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을때 그리고 사람과의 사랑안에 있을때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밥맛이 언제 없던가요? 다른 조건이 다 채워져도 사람관계가 깨어지면 밥멋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명입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사람이 사명을 감당할 때 인생의 행복을 느끼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행복 두가지 조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사랑이 다시 회복할 때 참 행복을 누리기에
그것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난후에 다시 잃어버렸던 세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첫 번째 두 번째가 회복되지 않으면 세 번째 사명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첫 번 두 번째가 안되기에 첫 번두번째를 말하고 제자들은 세 번째 까지 말하고 명령합니다.
이 세가지가 없으면 여러분 아무리 다른것을 채워도 행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말씀하십니다.
왜요? 이스라엘이 몰랐나요 아닙니다. 잘 알았습니다.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만이 붙어야할 자리에 도가 붙게 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원래 하나님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으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섬기게 됩니까?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섬기고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습니다.
하나님만 섬겨야할 사람이 자신만 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세상나라입니다.
모든 인류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경배해야 할 하나님을 이용하고 이용해야 할 돈을 경배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해야 할 세상은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뀐 세상입니다.
하나님만에서 하나님도라고 바뀌는 순간
아담은 세상을 받았지만 세상도 떠나가고 영생도 받았지만 영생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자신만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여야할 만을 자신에게 붙이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자기만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 하는 것 내가 가진것, 내가 잘하는 것, 내가 뛰어난 것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다 나만 보여서 그렇습니다.
마귀가 대표적입니다.
자신의 가진 것으로 시험합니다.
예수님께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귀에게 마귀가 가진 것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영광과 높은 성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은 마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세상 전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세상을 걸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시험에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예수님의 시험은 타락한 인류를 대신하는 시험입니다.
그 마지막이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만과 도가 바뀐 세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만과 도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만과 도를 바꾸기 위해 오셨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힘이 듭니까?
나의 아픔이 가장 큰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생각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당신도 힘들다고 생각할 때 문제는 적어집니다.
나도 힘들지만 당신도 힘들고,
내 문제도 중요하지만 당신 문제도 중요하다고 여길 때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하는데 나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만 섬겨야하는데 나도 섬기라고 하니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담의 문제는 하나님만에서 나만으로 변화되었고
세상은 오직 나만 높아지려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만과 도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만 보이던 것에서 하나님만 보이고 하나님만 사랑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인류의 시작,
모든 계명의 핵심인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해답을 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해답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할 때 그때부터 해답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성경은 자신을 사랑하라고는 명령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원래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바르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나에게 생긴 문제는 나에게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 만 사랑하십시오. 그게 답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를때 부터입니다.
언제부터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을때입니다.
언제부터 세상을 향하여 마음이 갔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희미해 질 때부터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내 속에 흐릿해질 때 세상의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부흥이 언제 옵니까?
부흥은 하나님만 사랑할 때 옵니다.
성령이 임하면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성령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내 인생의 부흥이 오고 교회의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식이 많아지고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부흥이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 인생과 교회의 부흥을 회복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러분께 용서를 구할 것이 있습니다.
작년입니다.
어는 한 권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내 가슴에 못처럼 박혀있습니다.
"사랑의 모범을 보여야 할 목사님들이 사랑하는데 문제가 있으면 어떻합니까?"
평생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단 한사람과도 문제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이 말씀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내 평생에 내 삶을 두고 가장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고
지금까지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말로 따지면 할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말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삶으로 말하는 사람인 것을 알기에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한것은 가장큰 죄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란 그런 것이구나.
내가 열심히 산다고 살지만 보여 지기에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여러분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혹 선교사 때문에 목사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걸림돌이 되고
지옥문으로 인도하는 허물이 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수 많은 말씀을 외치지만
진짜 보여줘야 할 것은 번지르한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가장 중요한 계명조차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고 허물 많은 저의 모습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구원해야 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교인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저 같은 목사가 문제입니다.
할 말로 따지면 얼마나 할 말이 많습니까?
바리새인처럼 율법사처럼 얼마나 우리가 똑똑합니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말로 따지면 우리가 어디 바리새인과 율법사보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입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인류의 문제, 아담과 하와의 문제, 우리의 문제는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는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다른 사람을 향하여 다 회개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들이
정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정작 사랑으로 교인을 인도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지옥문으로 인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 교인이 열심을 내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정작 지도자가 교인을 섬기지 못하고,
왜 헌신하지 않느냐고 말은 많이 하지만
교인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이 없습니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고 섬길 줄은 모르며
헌신 받기를 좋아하지만 헌신하지 않는 저와 같은 한국교회의 사역자들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목박는 것입니다.
이 핵심을 빼 놓고 아무리 수 많은 이야기,
수 많은 설교를 한들 말이 통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떠난 마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문제가 사역자에게만 있나요?
이런 약함이 저에게만 있는 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세 가지 정도 대안을 내 놓습니다.
첫째는 비교하지 않아야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사망은 죄 때문에 오구요,
죄는 욕심에서 왔습니다.
자 그럼 욕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욕심은 비교에서 왔습니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것이 모든 욕심과 죄와 사망의 시작입니다.
아담은 자신과 하나님을 비교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욕심의 시작입니다.
내 것은 작아 보이고 남의 것은 커 보이면
내 것은 늘 초라하고 남들의 가진 것은 늘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남보다 낫고 나의 경험과 지식은 남보다 높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느낀것은 그것입니다.
가나안사람들이 너무 농사를 잘짓고 잘사는 것을 보고
그들도 하나님만 섬겨서는 못살겠다 여겨,
세상방법 세상의 원리를 좇아 높아지고 잘 살고 싶어 가나안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입니다.
오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의 오류가 그것입니다.
나는 남들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남들보다 경험도 많으면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의 잣대로 다른 사람에게 비교하고 그것을 요구할 때
이미 그 지식과 경험은 악이 됩니다.
비교가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왜 아주머니들이 동창회를 갔다 오면 집에 와서 목소리가 높아집니까?
왜 우리 부모님들은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나에게 화를 많이 냅니까?
비교입니다.
자녀에 대해서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우리 집 사이즈와 차의 크기에 대해서
자족하시기 바랍니다.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여기고
행복의 일체의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나의 가진 것은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에 사용되지 않을 때
다시 그것은 죄가 되고 악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위에 존재합니다.
세상보다 크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비교하지말고 절대만족대신 하나님만 바라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교에 자유 할 수는 없으나 비교가 올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가장 중심 되는 가지를 잘라야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자기의, 자기애입니다.
자기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죄의 시작은 자기애, 자기사랑입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아는 지식이고,
부자 청년은 재물입니다.
베드로는 혈기이고
가롯유다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입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잘 살고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내 인생 내 생각의 가지를 꺾어야합니다.
파파야 나무가 있습니다. 파파야라고도 하고 파오파오 라고도 하는 과일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새순이 나고 나무가 자랄 때 가만히 두면 한도 없이 키가 큰다.
높이 자라는 나무는 4-50미터까지 자란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란 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한다고 한다.
열매를 따먹기도 힘들 뿐더러 열매도 많이 맺히지 않는다.
자기 자란다고 열매는 안중에는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은 이 나무가 적당한 높이에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랄 때 가운데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한다.
그럼 이 나무는 높이 자라지 않고 적당한 높이에 열매를 맺는데 충실 한다고 한다.
그렇게 잘 자란 나무는 가지를 대충 잘라서 심어도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또 된다고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더 믿고 있는 것,
더 아끼는 것,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나의 학력 나의 물질, 나의 자녀, 나의 명예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잘라 버리지 않으면 내가 높아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높아지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기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높아지고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자신의 전부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신 이유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으십니까?
많이 피우십시요.
그러나 기억할 것은 반드시 꽃은 떨어져야 합니다.
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꽃인 것처럼 착각하면 하나님이 일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목적, 꽃을 피우는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옵니다.
여러분의 중심 가지를 자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함입니다.
하나님은 만과 도를 다시 바꾸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그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는 아픔이지만 광야가 아니면
우리가 만과 도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한번 맛을 들인 우리들의 육체와 마음은
광야가 아니고는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의 시작 전에 죽음의 끝자락 사십일 금식을 통해서
그것도 성령에 이끌리어 만과 도를 정확하게 구분하셨고,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40년의 광야를 지났습니다.
광야를 통해 섬겨야할 하나님,
그리고 사랑해야 할 대상을 명확하게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가 죽음의 장소인지 지름길인지 구별만 된다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죽음의 장소로 생각했고 그래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을 준비하는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 가나안을 준비하는 곳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광야에 계십니까?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기억하십시요.
가나안을 위한 준비의 장소라 여기십시요.
그러면 가나안이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광야가 아니고는 하나님만을 보지 못하는
세상의 눈과 가치관과 원리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광야에 두고 계십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입니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어중간 하게 죽지 말고 완전히 죽어야합니다.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가지를 자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세째는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랑의 해법을 이렇게 내 놓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높아지리라"(마23:12)
세상의 영은 세상에서 누리는 전부를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영이 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뭔지 아십니까?
낮아지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체질적으로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 안 됩니다.
세상의 체질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체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과 거꾸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에 내 놓으신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새로운 원리입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들,
예수님을 시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자들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아지셨고 섬기셨습니다.
왜요?
낮아지고 섬길 때만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여러분~
새로운 생명은 높아질 때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야 생명이 태어납니다.
내가 낮아질 때 사람에 세워집니다.
씨가 죽어야 생명이 자랍니다.
내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낮아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 오신 것부터입니다.
한마디로 입장바꿔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가르침과 선지자의 정신이 무엇일까요?
[마7: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런데 이 말씀하기 전에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주시고 악한 자도 부모에게 구하면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겠느냐라는 말씀을 하고 12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글에는 없는데 원어는 앞에 ‘그리하여, 그래서’라는 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도 뭘 구할 때 그 사람입장에서 주는데
너희도 삶을 살 때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너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해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온 율법의 정신입니다.
사랑은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대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말만 하는 자를 본받지 말라. (마23:3)
그러나 미워하지도 말라.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부터 잘못입니다.
목사가 뭐 저런가라고 하시는 성도여러분!
목사가 그렇습니다.
목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의 대상입니다.
목사가 약할 수밖에 없는 부족함을 용납해 주시기바랍니다.
왜 문제가 생깁니까?
사랑해야 할 목사를 사랑하지 않고 믿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요.
사랑해야 할 대상과 믿어야 할 대상이 바뀌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만과 도가 바뀌면 인생에 눈물이 찾아옵니다.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사랑할 때 나타나는 특징, 하나님 만을 사랑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에서 볼수 있는데 이 열매의 특징은 나와 이웃에게 나타납니다.
9가지를 두 종류로 나누어서 보면
첫째 나에게는 평화, 평강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성령안에서 드리고 난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셨던 것은 평강입니다.
우리가 성령안에서 살면 나 자신은 평강을 얻습니다.
둘째로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옵니다.
나로 인해서 행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산산수훈에서 예수님은 윤리,도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말씀하십니다.
형제에 대하여 윤리 도덕으로 문제를 말씀하지 않고
노할 때 심판받고 가고 라가라 할 때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 할 때 지옥불에 들어간다했습니다.
이것의 설명은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저는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섬길까를 생각합니다. (천목사님 카메라/파니 양/ 샘 자녀 병원비 등)
성도여러분! 강아지 같은 성도로 사시겠습니까? 고양이 같은 신자로 사시겠습니까?
하나님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럴수 도 있다고 여기기 바랍니다.
세상은 만과 도를 바꾸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은 이 만과 도를 다시 바꿀때 찾아올줄 믿습니다.
개는 주인이 떠나면 같이 떠나고 고양이는 주인이 떠나면 떠나지 않고 집을 지킵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나는 세상의 누릴 것을 붙잡고 하나님을 떠나 보내는 사람은 아닙니까?
주인 없는 집에 남은 고양이는 결국 도둑고양이가 됩니다.
그러나 거처는 없어도 주인과 함께하는 개는 어디든 평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곳에 나도 가고 하나님이 서는 곳에 나도 서는 삶은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만과 도를 바꾸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참 기쁨의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