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밥을 먹고 평생 살수는 없다.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평생 그 은혜를 추억하며 살수는 없다.
신앙은 현재이다.
은혜는 재 생산 되어야 한다.
일차적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다.
그러나 이차적 은혜는 나로부터다.
은혜의 연속성,
은혜의 재 생산 구조를 만들어라.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그 은혜가 한번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재 생산되는 것을 볼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은혜의 재상산 구도가 자리를 잡았다.
무슨 말인가?
일차적으로 받은 은혜는 성령의 은혜, 하늘로부터 왔다.
그런데 그 받은 은혜가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게 만드는 구조가 되었다.
그들의 각자 가진 것들을 나누고 함께 하는 장소와 시간과 공간을 만들었다.
즉, 나의 은혜를 공유하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일차적 은혜의 재생산 구도이다.
제자들은 함께 먹고 마시며 자신의 것들을 나누는 곳으로 교회를 사용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장소 공간이 될때 재생산의 은혜가 임한다.
그것은 교획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적 은혜의 재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것이다.
사람들은 나누고 섬기는 것을 교회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인색하고 힘들어 한다.
이유가 뭔가?
그것이 당장 나의 유익을 위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라 여겨서 그렇다.
그런데 실상은 교회나 이웃이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은혜의 지속적 재생산을 위해서 그렇다.
자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다시 세상을 향하여 섬기고 나누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나가도록 하나님은 구조적으로 만드셨다.
이유는 아담의 입장에서 아담자신의 영적인 은혜의 지속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은혜의 지속적 사이클의 걸림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
예수님의 시험이 광야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시험이 될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시험이다.
왜?
시험은 내 안에 있다.
내 안에서 영적 재 생산적 구도를 만들지 않으면 은혜의 지속적 공급은 어려워진다.
은혜는 표현해 내는 구조를 가질 때 더큰 은혜가 하늘로부터 다시 임하게 된다.
초대교회의 구조는 재생산의 구조, 더큰 은혜를 받는 구조로 구성되어있었다.
핍박이 있어도
다시 그들이 받은 은혜를 풀어내는 현장을 만들어 내는 구조를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소멸할수 없는 성령의 일하심과 함께 있었다.
한국교회안에 있는 문제는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은혜의 재생산 구도를 만들지 않아서 그렇다.
풀어내는 현장,
받은 은혜를 다시 하나님께 향기로 올려드리는 구조를 만들어 내야한다.
우리의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도하나
육체의 풀어냄이기도하다.
은혜의 풀어냄 없는 영혼의 은혜는
영적 비만과 영적 교만을 만들어내는 머리형신자를 양산한다.
은혜의 재생산 구도를 만들어내라
그러면 네 영혼이 푸른 초장에서 뛰 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