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영적 원칙 - "공동체속에서의 원칙"
부제- "왜 먼저 누리게 되었는가?"
신명기3:18-29
3:18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다.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에게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이 땅을 주셔서 차지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동기인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도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너희의 용사들은 무장을 하고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보다 앞서서 요단 강을 건너가거라.
3:19 다만 너희의 아내와 어린 아이들은 여기에 남아 있게 하여라. 그리고 너희에게 집짐승이 많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으니, 그 집짐승도 너희의 가족과 함께, 내가 너희에게 나누어 준 성읍에 머물러 있게 하여라.
3:20 주께서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동기들에게도 편히 쉴 곳을 주실 것이니, 그들이 주 너희의 하나님은 요단 강 서쪽에 마련하여 주신 땅을 차지한 다음에라야, 너희는 제각기 내가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
3:21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너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이 두 아모리 왕에게 어떻게 하였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주께서는 내가 지나가는 모든 나라에서도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3:22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3:23 <모세가 가나안 진입을 허락받지 못하다> "그때에 내가 주께 간구하였다.
3:24 주 하나님, 주께서는 주의 크심과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신이 주께서 권능으로 하신 것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3:25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요단 저쪽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3:26 그러나 주께서는 너희 때문에 나에게 진노하셔서, 나의 간구를 들어 주지 않으셨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
3:27 너는 이 요단 강을 건너가지 못할 것이니, 저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너의 눈을 들어,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아라.
3: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너의 직분을 맡겨서,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어라. 그는 이 백성을 이끌고 건너갈 사람이며, 네가 보는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이다.
3:29 그 때에 우리는 벳브올 맞은쪽 골짜기에 머물러 있었다." (표준새번역)
세상을 살다보면 궁금한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질물을 한다.
그중에 한가지는 왜 이땅에 잘사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냐는 것이다.
다 잘살면 좋고 다 행복하면 좋은데 왜 그렇지가 못하는가이다.
잘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잘사는것 즉, 부자가 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것 같다.
부자가 되는것이 최고 였다고 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부자로 우리를 만드셨을 것이고,
똑똑한 것, 머리가 좋은것이 최고 였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처음부터 그렇게 좋은 머리, 똑똑한 사람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이세상에 평범한 사람을 가장 많이 만드신것을 평범한것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 최고의 기쁨이 있을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도 가능하리라 본다.
중요한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이다.
천국이 왜 천국이고 지옥이 왜 지옥인가?
천국이 왜 천국인가?
천국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천국이다.
지옥은 왜 지옥인가?
지옥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곳이 지옥이다.
지금 이땅에 살면서 내 사는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곳이 천국이다.
내가 없는것 없이 다 가지고 사람들 부러워하는 조건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함께 계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곳이 지옥일것이다.
사람은 가진것, 높은곳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래서 가보면 사실 아무것도 없다.
가는 과정속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고 동해하시는 그 과정이 중요하지
어느 목표가 나에게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 그 목표를 향하여 함께 하나님과 나아가는 시간이 행복이고 천국인 것이다.
내일은 내것이 안니다. 오늘 하나님을 느꼈느냐? 오늘 그분과 동행하는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에녹을 봐도 그렇다.
하나님은 에녹과 함께 동행하고 대화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것 자체를 너무 기뻐하셨다.
그래서 그 행복을 빼앗기기 싫어서 하나님께서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그냥 천국으로 데려가셨다.
에녹이 그렇게 하나님보시기에 좋았고 능력있고 잘했다면 어떤 결과를 이땅에서 만들었을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결과를 주신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이세상의 삶을 충분하게 하셨다.
그에게 죽음이 의미가 없는것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죽어가도 주님과 동행하고 함께함을 느낀다면 잠깐 죽음이야 견딜수 있는 넉넉함이 있을것이라 믿는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백성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백성이 정탐한후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믿음에 실패해서 말로 하나님께 거역하였다.
그 결과 광야에서 38년을 방황하다 이제 곧 가나안을 정복하게 된다.
말로 거역했던 장정들은 다 죽었다.
심판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시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단 건너기전 땅인 헤스본과 바산땅을 쳐서 요단 이편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땅을 12지파중 르우벤지파, 갓지파에게 주시고 므낫세 지파중 반(half)지파에게 그 땅들을 주셨다.
그것이 2장과 3장 17절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면서 두지파 반(르우벤,갓,므낫세 반 지파)에게 중요한 영적 원리를 요구한다
1. 먼저 받은 너희가 먼저 희생하고 더 많이 섬기라는 것이다.(18)
먼저 받은자가 더 많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영적원리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산상수훈의 전체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마10:8)라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원하셨다.
두지파 반은 이미 안식을 얻었다. 평생 먹고 놀아도 될 땅과 육축이 있다.
이제 싸워야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것같다.
내가 사는것이 내 가족 내 자녀를 돌보고 넉넉한 삶, 부자되고 잘사는 삶을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그것을 얻었으니 좀 편안하게 놀고 먹고 즐기자고 말해도 되는 상황이다.
싸움을 하지 않은것도 아니고, 고생을 하지 않은것도 아니다.
광야에서 죽을 고생해서 지냈고, 편히 쉬지 않고 달려 왔는데 이제 이땅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좀 쉬자라고 한다면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에게 선봉에서 싸우라고 말한다.
왜그런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영적원칙들을 말씀하고 계신다.
먼저 받은 사람이 먼저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야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중에 부자가 있고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왜 능력이 있고, 넉넉한 삶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먼저 얻은자가 더 많이 섬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신앙의 고백을 하라는 것이다.
내가 더 가졌기 때문에 더 주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더 넉넉하기 때문에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의 원리와 다를것이 없다.
그럼 무슨 말인가?
내가 가진것이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신앙의 고백을 선봉에 서서 싸우는것으로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넉넉해서가 아니라 더 가져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안식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환경을 주셨음을
신앙의 고백으로 섬김으로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18)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 주셨음을 고백하는 삶의 모습이요,
영적 이스라엘의 영적 고백이 될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영적 원리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세상을 우주를 다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에게 우리가 없는것을 주러 오셨다.
가지셔서 오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가진것을 아무때나 마음껏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럼 왜 그분이 오셨는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 사랑의 증거를 이땅에서 표현하신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것을 주셨고, 사랑하신 사랑에 대한
진정한 고백으로 순종하셨고,
낮으자로 오셔서 종으로 오셔서 우리를 섬기셨다.
가졌기에,
넉넉하기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내가 소유했기때문에는 세상의 원리이시만,
그분의 사랑에 못이겨서,
그분이 나에게 이런 좋은것을 주셨기에 그것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아직 누리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고 헐벗고 아직 안식을 누리지 못한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한다.
더 많이 수고하는 자리,
더 많이 번거로운 자리,
더 많이 땀흘리느 자리가 내가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하는 진정한 자리이다.
그자리에 있는것 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신 영적원리이며 하나님 나라의 영적 원칙이다.
2. 영적 원리를 따라가면 없던 땅도 생기지만,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있던 땅도 빼앗긴다.
3:21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너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이 두 아모리 왕에게 어떻게 하였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주께서는 내가 지나가는 모든 나라에서도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가나안으로 가다 만난 두나라 헤스본과 바산은 정중하게 대화해서 지나가게만 해달라고 했다.
싸울 의사가없고 지나만 가겠으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평화의 말로 대사를 통해서 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
마음이 강퍅하여 허락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땅들을 빼았기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있던 땅도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말씀을 따라가면서 없던 땅도 얻게 되었다.
말씀의 원리를 따라가면 없던 땅도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영적 법칙이다.
한마디로 말씀을 들으면 없던 땅도 생기지만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있던 땅도 빼앗기게 된다.
우리는 늘 우리가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죽어라고 수고하고 땀흘리고 한다.
물론 그렇게 해야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곳에서 열심히 한들 결국 남는것이없는 싸움이 될가능성이 많다. (1:43)
영적인 말씀을 따라가면 생각지도 않은 열매들을 얻을 경우가 많다.
별거 아닌데 말씀을 따라가면 어려운 길도 열리고, 생각지 않은 사람을 만나 만사가 쉽게 풀리는 것을 보게된다.
내가 잘해서?
내가 열심히 땀흘려서?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원리를 따라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 길을 택하신것이다.
일부러 헤스본과 바산왕의 마음을 강퍅케하사 싸우게 하시고 그 땅을 샘플로 주신것이다.
이렇게 영적원리를 따르면 앞으로 너희의 삶이 이런 삶이 될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굳이 가나안 전에 요단강 건너기 전에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싸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원리는 그런것이다라고 가르치고 보여주고 목도하게 만드시고 싶으신거다.
영적원리대로 살면 너희가 앞으로 가나안에서 이런 축복을 받을것이라는 맛보기를 보여주신것이다.
그것을 안 두지파 반은 비록 안식을 얻었고, 가질것을 가졌지만 말씀의 윈리를 따르면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선봉에서라는 두려운 말씀을 갈등없이 순종하게 된것이다.
혹 말씀을 따라 원리를 따라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들을 경험 하는가?
앞으로 그렇게 살아보라고 맛보기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런 원리가 삶으로 체득될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
3. 큰 승리전에 작은 승리를 체험하게 하신다. (21)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진짜 싸움을 하기전에 영적원리를 순종할때 작은 승리들을 맛보게 하신다.
진짜 전쟁인 가나안 전쟁전에 작은 승리-헤스본, 바산-를 통해 영적 원리대로 가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을 맛본 사람은 다시 그 원리대로 가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사람은 사람인지라 결코 경험해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하려하지 않는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이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광야에서 맛나를 날마다 주셨고,
메추라기를 주셨고,
날마다 구원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구나를 알게 하셨다.
하지만, 전쟁은 달랐다. 싸움을 달랐다.
광야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지만 가나안은 보이는 적과의 싸움이다.
눈에 보이는 적들과 싸워서 이겨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가나안 정복을 믿음으로 갈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그 본성을 아시고 두나라를 그렇게 교보재로 이용하신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귀하게 쓰임 받기 원한다.
그렇다면 오늘 작은 영적원리를 붙들고 보이는 세상에서 이겨내는 승리를 맛봐야한다.
그래야 먹고사는 문제,
목숨문제,
사람과의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낼수 있다.
왜 믿음이 없는가?
믿음을 갈질 기회가 없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목도한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일을 목도하게 하셨고,
수도 없이 '목도'라는 단어를 쓰시면서 잊지 말라고 하신다. (개역한글 33번사용)
누가 하나님을 증거 할수 있는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사람이다. 작은 승리를 경험해본 사람이 할수 있다.
누가 하나님을 이야기 할수 있는가?
문둥이라 할지라도 은혤를 체험하면 하나님을 이야기 하게된다.
자신이 부끄러워도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심정이 된다
이 하나님을 체험해 보지 못하니 할 말이 없는것이다.
오늘 하루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이 영적원리인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을 위해 이웃과 가지지 못한자,
누리지 못한자, 헐벗은자, 목마른자에게 나의 것을 나눌때 하나님 앞에 신앙의 고백의 삶을 살수 있다.
하나님은 작은 영적원리라도 따를 때 우리에게 먼저 누릴수 있는 축복을 주시고,
베풀고 섬길수 있는 헌신의 자리를 영광스럽게 허락하신다.
4.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세우라. (28)
하나님 나라는 내가 못하면 나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사명이 다하면, 나의 사명이 아니면 그일을 하지 못한다.
사명이 있으면 설렁설렁해도 하나님은 길을 여신다.
하지만 사명이 아니면 아무리 노력해도 할수없다.
모세가 가나안을 들어가고 싶었지만, 모세의 사명은 가나안 앞까지다.
아무리 기도하고 철야하고 떼를 써도 하나님은 안된다라고 한다. 더이상 말하지 말라고 강경하게 나오신다.
왜?
사명이 거기까지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한다.
작은 승리를 경험하는것이 중요하지만 그 작은 승리가 하나님 앞에 사명을 앞서갈수 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서는 안된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것이 사명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사명이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렸다가 맞아 죽을뻔했다.
사도바울은 이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렀고,
베드로는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셨다.
각자 맡은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따를때 하나님을 길을 쉽게 여신다.
왜 아픔이 생기나?
사명을 따르지 않으면 풍랑이 인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더니 풍랑이 인다.
물고기 뱃속까지 가보는 엄청난 아픔을 체험한다.
사명이 보이지 않으면 늘 방황하게 된다.
사명을 잡지 않으면 헛발질 하게 된다
내가 평생 할수 있는 역량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까지이다.
더 하려면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라'라고 하나님은 엄히 명하신다.
내가 못하면 그 사명을 감당할 사람을 세우면 된다.
내가 못한다고 포기하거나 대충 살거나 하면 안된다.
내가 못하면 할 사람을 세우는 것이 사명이다.
엘리야가 로뎀을 지나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다.
갖은 기적을 체험해도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지 않으셨다.
결국 엘리야에게 주신 사명이 뭔가?
사람을 세우라는 것이다.
네가 못해도 다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도록 사람을 세우라는 것이다.
왜 내가 다하려고 하는가?
내 인생의 한계가 있음을 일찍부터 알아야한다.
작은 승리로 우리의 인생이 영원할것처럼 철없이 굴어서는 안된다.
젊을때, 물질 있을때 미리부터 사람을 세워야한다.
내가 없어도 사명을 감당할 사람을 세워야한다.
그런 측면에서 자녀는 내가 다 못한 하나님의 사명을 이어갈 좋은 대안이다.
거룩한 일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고 싶은가? 자녀를 일찍부터 훈련키시고, 교육키시고 정말 좋은 교역자를 만나도록 기도하라.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네 자녀에게 네 손자에게 가르치라고 말한다.(4:9)
지혜로운 자는 사명을 이어갈 사람을 미리 준비한다.
모세는 광야에서부터 늘 여호수아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모세처럼 훈련을 시켰다.
예수님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떼어 데리고 다니셨다.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다음을 준비하라.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할수 있도록 담대케하고(용기를 주고), 강경케(격려해서 강하게 하라)해야한다.
한국의 많은 담임목사님들이 사람이 없다고 한다.
준비된 사역자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이 준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언제 사람을 준비시켰느냐고 묻고싶다.
준비 시키지 않은 사람은 언제든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내가 가진것, 내가 먼저 받은것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것으로 믿고 그 믿음의 고백으로
없는 자들을 위해 가지 못하고 필요한 자들의 아래에서 헌신하고 섬기는 것이다.
곧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원리는 결국 사람을 섬기고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모든 사역과 신앙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아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실지 모르는
중요한 영적원칙이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모로가면 안된다.
못가도 바로 가야한다. 바른 방법으로 가야한다.
우리는 내일을 알수 없다.
오늘 하루를 살아도 바른 방법, 영적원리를 좇아 살때 하나님께서 내일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내일이 내것인양 오늘을 모로가는 어리석음을 버려야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내 삶을 더 많이 섬기고 헌신하는 자리에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