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세상을 이기고 싶은가?

세상을 이기고 싶은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세상이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최후의 보루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에 볼모가 되어 있는가?

 

 

 

 

한국의 역사를 보면 중국에서 왕자들을 요구하였다.

 

한국이 중국의 신하 나라로서 복종과 섬김의 표로 왕자들을 볼모로 중국에 보내는 일이 있었다.

 

왕자를 잡고 있는 동안 중국은 한국이 자신들을 섬기고 어떤 정치적 군사적 도발을 못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세상의 영이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최후의 보루가 무엇일까?

 

죽음이다.

 

 

 

 

세상의 영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죽음 앞에 힘을 쓰지 못한다.

 

 

 

 

근본 문제가 해결 되지 않으면 어떤 형통이나 축복이나 성공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모두 죽는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세상사는 동안 잘살고 싶어하고

 

살아 있는 동안 높이 올라가가 싶어하고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려고 한다.

 

죽음을 넘지 못한 행위이다.

 

 

 

 

죽음에 초연해 지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죽음은 한번 넘어본 사람,

 

죽음의 고비를 한번 경험해 사람은 이전과 다른 삶을 산다.

 

 

 

 

 

그러나 죽음을 넘지 못한 사람은 계속 세상에서 갈등하며 엉뚱한 것을 잡으려 더욱 열심을 낸다.

 

그럼 우리가 세상의 , 세상을 이기지는 못하는가?

 

방법은 없는가?

 

 

답은 간단하다.

 

 

죽으면 된다.

 

 

죽는 것이다.

 

 

살려고 하니 더욱 죽음의 수렁으로 떨어진다.

 

 

 

아담이 죽었나?

 

살려고 하다 죽음이 찾아왔다.

 

 

우리가 사는 방법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죽어야 살고 살려면 죽는다.

 

 

 

 

세상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는 영이다.

 

세상의 목적은 오직 우리를 죽이려 한다.

 

우리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우리의 형통,

 

우리의 부함,

 

우리의 능력,

 

우리의 위치 모든 것을 이용해 우리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택하셨나?

 

죽음이 아니고는 세상에서 살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셨다.

 

 

 

 

세상에서 죽지 않아도 다른 길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아니 하나님은 길을 택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도 하지 말라.

 

세상에서 죽음이 아니면 살수 없다.

 

 

 

 

죽어야 산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야 산다.

 

 

예수님이 위해 죽었다고

 

나는 죽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어야 산다.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어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나의 모든 것이 죽어야,

 

요단강을 건너야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서 자꾸 살려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이 부추기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죽으라 하고

 

세상은 자꾸 열심히 살라고 한다.

 

 

 

 

과연 무엇이 답일까?

 

 

 

 

그럼 내가 죽으면 이제는 어떻게 사는가?

 

내가 죽으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죽을 수록 하나님이 사신다.

 

그리스도가 사신다.

 

어떻게?

 

 

 

 

성령이 사는 것이다.

 

 

 

 

내가 죽을 수록 성령하나님이 더욱 명확하게 안에 보이고 들리고 강력하게 이끄신다.

 

 

 

아브라함이고 모세고 엘리야고 빠지고 지치고

 

자신에게 소망이 없을 하나님이 부르시는가?

 

 

 

죽어야 사는데

 

자꾸 살려고 하니까 시간이 가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완벽한 아담도 넘어갔다.

 

세상에 대해서 높아지고 잘나고 살려고 하였다.

 

이것은 처절하게 속에 숨은 욕망이다.

 

 

 

 

 

완전히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완전히 일하지 않으신다.

 

내가 살려고 하니 능력만큼 아니 능력도 못하게 산다.

 

그러나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일하심 만큼 축복이 오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사는 죽는 역사이다.

 

자신이 죽고 하나님이 사는 역사이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죽는 것이다.

 

완전히 죽을 완전히 산다.

 

 

 

 

예수님은 가시고 성령이 오셨나?

 

성령이 오셔서 세상에 대하여 죽은 나를 인도해야 내가 사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것은 것이 아니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이후에 사람들은 영의 존재가 아니라 육체가 되었다

 

 

 

 

 

[창6: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신이 없으면 사람은 그냥 육체다.

 

고기 덩어리다.

 

세상에  대해서 사는 것은 그냥 고기덩어리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 성경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세상은 세상에 대해서 더욱 살려고 하는 육체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오직 육체의 유익과 육체의 편함과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사는 육체적 존재가 것이다.

 

 

 

 

 

육체에 필요한

 

육체에 생명을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사람, 생기가 있는 생령이 되는 방법은

 

오직 성령만이 방법이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 육체에 생기가 돌아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에스겔 골짜기의 육체들이 것은 오직 성령의 바람, 생령이 들어갈 때이다.

 

 

 

 

성령은 죽음을 지나야 찾아온다.

 

성령이 먼저 오시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고 성령이 오셨다.

 

 

 

 

죽음이 지나야 성령이 온다.

 

죽음을 지나지 않으면 생기의 역사는 찾아오지 않는다.

 

 

 

 

회개는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는 것이다.

 

죄의 고백,

 

죄의 실체를 회개라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회개는 십자가에 나를 함께 묶는 것이다.

 

회개는 예수님과 나를 연합하는 시작점이다.

 

회개가 없는 죽음은 없다.

 

 

 

 

기도할 내가 죽는 방법은

 

무조건 회개로 자신을 죽이라.

 

 

 

 

그것이 죽음의 고백이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처절한 회개의 눈물과 고백 없이는 성령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회개는 죽음을 부르고 죽음은 성령을 일하게 한다.

 

 

 

 

광야 없는 가나안은 없고

 

죽음을 지나지 않는 성령의 축복은 없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가?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말할 없고

 

들을 없고

 

일할 힘이 없다.

 

 

성령이 일하지 않는가?

 

죽어야 일하신다.

 

열심을 내지 말고 많이 죽어라.

 

공로를 쌓지 말고 부족함에 몸서리를 쳐야 한다.

 

자신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성령의 완전한 간섭을 부른다.

 

 

 

 

 

어중간한 죽음은 어중간한 성령의 역사를 부른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