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자가 죽어야 하나님의 일은 시작된다"
신명기 2:1-17
앞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어느 영적시점에 있는지를 분별해 내는 것이 능력이고 지혜이다.
나의 공동체(이스라엘)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고 가야 바르게 인도 할수 있다.
똑같은 광야이지만 홍해를 떠나온 후의 광야인지,
가나안 정탐을 하고 난후 하나님께서 방황케하시는 시점에서의 광야가 다르다.
세례요한의 광야가 다르고,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던 광야가 다르다.
같은 광야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볼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나안을 향하여 떠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있을때 이때는 기회가 있다.
아직 12정탐꾼들이 말로 범죄하기 전이라면 아직은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이미 이스라엘이 말로 믿음에서 실패했다면 그 다음은 아무리 싸움을 해도 이길수 없고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 승리를 맛볼수 없다.
하나님은 이들이-믿음에 실패하고 그래서 말로 실패한 사람들-
다 죽기까지 기다리신다.
예수님도 어린시절 피난하셨다가 예수님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다 죽고 난후에 이스라엘로 돌아오셨다. (마2:20)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오늘 모두 끝낼것처럼 하지 않으신다.
축복을 받을 자에게 축복을 충분히 받을 시간을 주신다.
하나님의 믿음에 못미쳐 심판 받을 사람들이 죽을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오늘 성경에 2:14절을 보면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 다 멸절되었나니 ~ 여호와께서 맹세하신대로 진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라고 기록한다.
어떨때는 하나님의 축복의 시간을 위해서 죽어야 할자들이 죽어야 하는 것을 본다.
은혜를 받았다고 기적을 체험 했다고 모든것이 한순간에 변할것처럼 해서는 하나님의 시간을 좇아갈수 없다.
죽어야 할 자들이 죽어야 그 다음 축복을 기대할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려니와'(5:9)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신 분이다.
하루 아침에 일하지 않으신다.
순리에 맞게 봄이오면 여름이 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영적 법칙도 시간과 결과를 자연법칙의 원리를 따라 일하신다.
개인이 한번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지으면
그것을 회개한다고 당장 없던일로 하지 않으신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한 자라고하였지만 그 죄의 댓가를 아들에게까지 넘어가게 하셔서 피눈물 나는 시간을 보내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한 나라가 하나님 주신 기회를 놓치면 적어도 몇십년은 지나야 아물고 돌이키는 기회를 잡게 된다.
남아공은 백인들이 유럽으로부터와서 이나라의 자연과 자원들을 맘껏누리며 살았다.
땅만 파면 수없이 솟아져 나오는 지하자원을 통해 재물을 쌓고 부를 누렸다.
교회는 어느 곳을 가나 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자신들에게만 주신줄로 착각했다.
피부색이 다르고, 지식이 떨어지고, 삶의 환경이 어려운 흑인들을 분리하는 정책을 통해
고아와 과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가난한 소자에게 물 한그릇을 대접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외면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외압과 내적분쟁을 통해 흑인에게 정부를 넘겨주지만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이 되었다.
94년부터 흑인정부가 들어서고 난후 수많은 백인들은 흑인들의 역인종차별과 강도,강간, 살인의 위협적이고 불안정한 사회를
못이기고 이민을 가게된다.
지금껏 살고 있는 백인들들 늘 불안함 가운데 총의 위협과 강도의 위협가운데 떨면서 살고있다.
이제 16년이 지났다.
아직 그때 분리정책을 썼던 사람들이 살아있다.
언제쯤 이나라가 안정이 될까?
그 사람들이 죽어야한다.
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원리가 그렇다.
그 사람들이 진짜 죽어야한다는 말보다 영적으로 완전히 회개하고 주도권을 포기하고 복음의 빚을 다시 값아야 그 기회가 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더 없이 좋은것이나,
그것을 감당해야하는 책임이 따른다.
1906년 평양 대 부흥운동이 있었다.
그것을 공산주의 자들이 눌러버렸다.
은혜 충만한 평양,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렀던 평양에, 부흥이 임했던 교회에 김일성동상이 세워질때
하나님은 그 나라를 버렸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죽을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
한 나라가 믿음에 실패할때 적어도 4-50년은 죽은것처럼 없는것 처럼 비참한 삶을 살아야한다.
겨우 죽기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면 축복은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
내 믿음의 실패는 내 자손에게 죄를 물려주게된다.
내가 죽어야 내 자손이 회복의 기회를 얻는다.
'삼사대~' 무서운 말이다.
죽을 자가 죽어야되는 가슴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고 공동체가 있고 개인이 있다.
하나님은 한번 버리면 적어도 몇십년이다.
공동체가 한번 죄를 지으면 적어도 십수년은 고통당한다.
그 죄가 어디서 오는가?
주로 리더들로부터온다.
이스라엘은 장로들이다.
리더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실수하고 믿음에 실패할때 백성이 망하고, 다음 세대까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왜 나의 가정이 이런 아픔이 있는가?
앞선 어른이 믿음을 택하지 않아서이다.
왜 우리 공동체가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가?
앞선 리더들이 영적으로 좋지 못한 토양을 가지고 있어서 백성들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다.
가족들이 다 잘해도 영적가장이 바로 서지 못하면 그 가정은 늘 광야다.
열명의 아이들이 아무리잘해도 교사 한사람 잘못하면 아무 소용이없다.
교사 열명이 아무리 잘해도 한명의 전도사님이 바르지 못하면 그 교사들은 아픔을 겪는다.
열명의 성도가 아무리 잘해도 한명의 장로님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면 광야에서 방황하게된다.
백명의 성도가 회개해도 한명의 목사가 바른길을 가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는 영적 가나안을 볼수 없다.
지금의 개인과 공동체는 과거 그들이 가졌던 믿음의 결과이다.
시간이 가야한다.
죽어야 할자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시간을 줄일수 있다.
그러나 두려워 할것은 믿음에 실패하고 말에 실패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것에 실패하면
'내가 그들중에 있지 않니하니~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시고'(신1:42,45)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내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수준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죽어야 할자가 죽지 않으면 일하지 않으신다.
믿음에 실패하지 않아야 소망이 있다.
믿음에 성공할때 천대의 복을 받고
믿음에 실패하면 삼대가 망한다.
이스라엘은 초상날 받아놓은 사람들이다.
날 받아 놓고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죽어야 산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산다.
나는 오늘도 죽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