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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지으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 메일로 교제를 나누는 사람으로부터 글을 받고 글을 보냈습니다.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요즘은 천목사님 가시고 빈 선교관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무우랑, 열무랑, 얼갈이 배추, 총각무우, 적상추, 청겨자, 푸른상추, 깻잎, 쑥갓 등등

 

 

 

농사를 지으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상의 원리를 또 생각해봅니다.

 

 

햇볕과 바람과의 관계

 

땅과 씨와의 관계

 

개체수와 자람의 관계

 

큰 나무와 작은 나무와의 관계

 

기다림과 열매의 관계 등등입니다.

 

 

 

하나님은 풀 한 포기 나무 하나에도 심오한 진리와 그분의 성품을 심어 놓으셨더군요.

 

 

 

덕분에 요즘은 날마다 쌈을 먹고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된장이 있으니 날마다 쌈에 살이 찌고 있습니다. ^^

 

 

 

 

지지난주에는 선교관 석류나무에 석류가 한참 열렸습니다.

 

석류차를 만들려고 항아리들을 가득사서 석류차를 열 통이나 담았습니다.

 

집안 찬장 위에는 각종 차들이 오래묵은 순서대로 널려 있습니다.

 

 

 

 

시간입니다.

 

열매를 넣고 설탕을 넣고 그리고 덮게 덮고는 그리고 시간이라는 재료를 오동안 넣어야

 

이 놈이 깊은 맛을 냅니다.

 

 

 

 

시간입니다.

 

 

재료가 다 준비 되었다고 다 끝이 아닙니다.

 

내가 준비한 재료와 시간이라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재료가 합해져야 세상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깊은 맛을 냅니다.

 

 

 

그 시간이 길수록 그 시간이 오랜동안 숙성될 수록 하나님의 맛을 알아갑니다.

 

 

 

 

 

4-5년 된  석류항아리가 있습니다. 진한 원액입니다. 

 

포도도 있고 레몬도 있습니다.

 

시간입니다.

 

 

 

갓 담은 것은 그냥 재료맛만 납니다.

 

 

오래 된것일수록 하나님의 맛이 납니다.

 

 

 

 

 

참 신기합니다.

 

모든 재료가 있어도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재료 맛만 나지만

 

그 재료에 시간,

 

하나님의 재료가 더해지니 깊은 맛을 느낍니다.

 

 

 

 

 

사람을 만드시는 방법도 자연의 그것과 같습니다.

 

 

때로 발효될 때 시큼한 맛도 나고

 

보기 싫은 기포도 생기고 색깔이 영 그렇습니다.

 

 

 

 

그런데 잊어버리고 깊은 찬장 높은 곳에 쳐 박아 둔 것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고급 향과 맛이 납니다.

 

 

 

 

 

 

시간이 가야합니다.

 

모든것이 다 갖추어졌다고 된 것이 아니고

 

그 재료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발효 시간과 맛을 내시는 인내의 과정이 지나면서

 

 깊음 가운데 운행하시는 성령의 역사 하시는 시간 먹어야 합니다.

 

 

 

 

 

 

그 시간은 아브라함에게 45년 아니 120년

 

 

모세에게 40년 아니 80년

 

이스라엘에게 430년이나 가야했습니다.

 

 

 

 

땅도 있고 민족도 있는데 하나님의 발효하시는 시간

 

토양을 바꾸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땅도 거름을 주는 땅과 주지 않는 땅은 다릅니다.

 

그런데 거름을 준다고 그 해 당장 농사가 잘 되지않습니다.

 

적어도 몇년은 거름을 주고 토질이 변해야 농사가 잘 되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거름이라는 것도 쉽게 똥입니다.

 

 

 

 

평소에는 필요하지 않고 쓸모도 없어 버리워지고

 

가능하면 가까이 하고싶지 않은 것인데

 

토질을 바꾸는데는 이것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이 토양을 바꾸는 시간입니다.

 

더러운 것,

 

피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만나고 싶지 않은 ,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만 토질이 변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되었다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세상에 물들고 말라버린 우리의 토양이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 토양으로 변화되는데는

 

금방 그렇게 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바쁨도 쓰시고

 

모름도 쓰시고

 

괴로움도 쓰시고

 

때로 나의 약함도 쓰십니다.

 

 

 

 

그 모든 재료에 하나님의 시간이 합쳐져서 온전한

 

 

< 나 >

 

 

되는 것입니다.

 

 

 

 

 

 

재료만 보는 사람은 일만 보게 됩니다.

 

재료가 다 모이면 일의 결과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재료가 아니라 재료의 숙성을 봅니다.

 

땅을 보지 않고 땅속의 토양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막을 보시지 않고

 

사막도 가나안처럼 사는 우리의 토양을 바꾸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은 토질 교체기간입니다.

 

숙성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그냥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씨를 뿌림이 아니라

 

씨를 받는 밭이 옥토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토양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시간속에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 인식이 우리를 넉넉하게 하고

 

우리를 열심보다 본질을 잡게하고

 

일보다 생명되신 그분을 만나게 합니다.

 

 

 

 

 

너무 많은 태양 빛도

 

너무 많은 물도 농사를 망칩니다.

 

 

 

무우 잎이 어떤 놈은 썩어가고

 

어떤 놈은 말라갑니다.

 

 

적당한 서로 간의 간격이 필요하고

 

적당한 물과 적당한 빛이 필요합니다.

 

 

 

너무 빽빽한 곳은 서로 다 죽더군요.

 

너무 큰놈 밑에 작은 놈들도 다 죽더군요.

 

 

 

토양이 좋아도 또 신경써야할 것이 많습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도 꾸준한 열매가 있으니 사는 재미가 납니다.

 

 

 

 

함께 하나님의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으니 오늘도 행복한 마음입니다.

 

 

 

 

 

 

 

 

 

 

 

 

 

 

 

 

메일의 내용처럼 나는 요즘 농사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배워간다.

 

 

 

닭을 키우고 오리를 키우고 거위를 키우면서

 

목자되신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다.

 

목자되신 하나님 마음의 핵심은 돌봄이다.

 

지키심이다.

 

 

 

 

그리고 이제는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되신 아버지의 마음을 배운다.

 

농부되신 하나님 마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이다.

 

그분은 열매를 원하신다.

 

 

 

열매를 위한 기다림이다.

 

열매는 반드시 그분의 안에 있어야 하고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매를 위한 조건이 가지 있다.

 

 

그분의 땅에 있어야 한다.

 

그분이 돌보는 통치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돌봄 안에 있지 않을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의 보호하심 안에 있지 못한다.

 

 

 

< 안에 거하라 >

 

그것이 조건이다.

 

 

 

우리는 자꾸 그분 밖에서 하려고 한다.

 

설령 그분 안에 있다 해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내가 열심을 내려 한다.

 

아니다.

 

열매는 그분이 맺는 것이다.

 

가지는 그저 나무 뿌리가 주는 영양분과 안에 돌봄을 누리면 된다.

 

내가 태양빛도 받으려 애쓰고

 

물도 억지로 받으려 하고

 

열매도 내가 맺으려 한다.

 

아니다.

 

나를 내려놓고 그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조건다.

 

 

 

그리고 시간이다.

 

내려놓음은 시간을 전제한다.

 

 

 

내려놓음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결과다.

 

내가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보면 내가 보인다.

 

하나님의 시간,

 

나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시간 동안 나는 재료가 아니라 재질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내려 놓을 하나님이 열매를 맺는다.

 

앞선 글인 파파야 나무 이야기에서도 말했지만

 

나의 가장 중요한 중심 줄기를 꺾어야 하나님이 열매를 주신다.

 

태양빛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중심 가지를꺾지 않으면 하나님의 열매는 없고

 

오직 나의 열심으로 이룬  가지 열매만 있다.

 

열매는 세상 사람 맺는 열매 정도 이다.

 

아니 그것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의 , 울타리에 살면서

 

그분의 나무에 붙어 살면서 나무의 능력은 거부하고

 

오직 가지의 힘만으로 있는 것이 제한 적인데

 

우리는 오직 나의 능력을 따라 살려 한다.

 

그것이 사는 것인 착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매를 위하지 않고

 

토양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신다.

 

 

씨가 문제가 아니다.

 

나무가 문제가 아니다.

 

씨도 나무도 멀쩡하데 토양이 변화지 않으니

 

지속적인 성장과 열매가 없다.

 

 

 

 

 

토양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집중하고 묵상하고 노력해야 한다.

 

 

부서나 교회를 무엇을 보는가?

 

어떤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은가?

 

어떤 가능성이 많은가?

 

어떤 일을 있는가?

 

혹시 이런 관점으로 보는가?

 

 

 

 

 

시작부터 잘못이다.

 

토양이다.

 

공동체의 토양이 어떤 토양인가를 보지 않으면 모든 것을 망치게 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씨를 뿌려도 땅이 어떠냐에 따라 자라는 속도와 크기와 열매가 다르다.

 

 

선교관 밭과 우리 밭에 씨를 뿌렸다.

 

선교관은 년간 일군 땅이고 우리 땅은 그냥 정원이다.

 

그냥  밭이다.

 

 

결과는 어떤가?

 

자람이 다르고 열매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

 

 

 

씨가 문제인가?

 

아니다 같은 모종이다.

 

햇볕이 다른가?

 

아니다. 같은 하늘 아래다.

 

물을 주지 않았나?

 

아니다. 내가 얼마나 우리 정원도 정성을 드려 주는지 모른다.

 

 

 

 

그럼 뭐가 다른가?

 

토양이다.

 

토양이 다르니 열매도 다르다.

 

 

 

농부되신 하나님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래서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셨다.

 

 

 

 

땅이 열매를 결정한다.

 

토양이 열매를 결정한다.

 

 

 

 

 

공동체는 능력을 보지 말고 토양을 봐라.

 

사람은 능력으로 말하지 말고 마음 밭을 봐야 한다.

 

 

능력으로 사람을 썼다가

 

마음 밭이 문제인 사람은 모두를 죽인다.

 

 

 

공동체는 토양을 준비해야한다.

 

이것은 한번의 설교나 가르침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때로 좋은 햇볕을 통해 토질이 변해야한다.

 

 

오래된 교회가 뭔가를 할려할 하기 어려운 것이 이것이다.

 

 

오랫동안 버려진 땅은 한번 거름 준다고 되지 않는다.

 

적어도 3년은 기다려야한다.

 

예수님은 나무의 열매를 말씀하실 적어도 삼년의 시간을 기다리셨다.

 

 

 

공동체가 체질이 변하는 것은 삼년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삼년 가야 사람이 사람다워진다.

 

 

 

이년은 토양 준비 기간이다.

 

이때 뭔가를 하려면 땅도 상하고 씨도 상할 뿐더러 뿌린 자도 상한다.

 

 

예수님도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을 보내 준비 시킨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것은 자연법칙을 기억해야한다.

 

영적인 법칙은 초자연적인 법칙이나 자연법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그래서 토양의 변화 체질의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결코 하루 아침에 변할 없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바뀌어지만

 

그가 한번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님만 믿고 변한 것이 아니다.

 

 

다음날 에서를 만날 간괴한 꾀를 내어

 

자기보기에 중요한 것들부터 에서에게 보낸다.

 

양과 소를 보내고

 

종들을 보내고

 

자식과 아내도 중요한 사람부터 보낸다.

 

 

은혜를 받고 확신이 들면 그냥 가면 되는데

 

그게 안되는 것이 야곱이다.

 

 

 

이것이 사람이다.

 

이것인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전날 그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이름이 바뀌어지는 축복,

 

앞으로 나라를 이루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몇시간 지나지 않아 그는 그의 본성대로 사는 것을 본다.

 

이것이 사람이다.

 

 

 

 

요나가 평생 살던 방식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사명이 와서

 

사명따라가 아니라 자기의 살던 방식과 생각대로 간다.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다.

 

그러다 결국 물고기 속에서 삼일삼야를 죽음에서 지내다 살았다.

 

 

그럼 사람이 변할 만한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초점을 두고 일하신다.

 

요나는 구원이 아니라 심판에 초점이 있다.

 

 

박넝쿨이 하룻밤만에 자라나 신기한 기적을 경험한다.

 

그런데도 요나는 변하지 않는다.

 

 

삼일삼야를 죽다 살고

 

하루만에 박넝쿨이 자라나 기적을 맛보아도

 

그의 체질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가시고

 

토양을 바꾸시는 것이 목적이다.

 

 

 

땅에서 우리는 완전함을 가질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완성도는 깊어진다. 

 

 

 

한번의 은혜에 목숨을 걸지 말고

 

체질이 변화됨이 은혜이고 축복이다.

 

 

 

기적 같은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아도

 

내가, 사람이 변화되고 깊어질 우리는 하나님과 닮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문제가 한번 있었다면

 

그것은 하루 아침에 변화 것이 아니다.

 

그러데 사람들은

 

사람이 교회가 하루 아침에 변화될것으로 믿고 기도한다.

 

물론 기도는 해야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변화되기는 어렵다.

 

 

 

 

 

분재를 아는가?

 

자라는 나무를 자라지 못하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바꾸어 작지만

 

형상이 아름다운 나무가 분재형식의 나무이다.

 

작게는 몇만원에서 많게는 몇백 몇천까지 한다고 한다.

 

 

 

분재가 그렇게 놓은 가격을 받는가?

 

모양이 예술이어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이상한 모양으로 자라서 그렇다.

 

높이 자라는 것이 낮게 자라고 옆으로 자라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일반 나무에서 없는 특이한 형상이어서 그렇다.

 

 

 

분재를 만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를 바꾸고 지지대를 세운다.

 

그리고 가는 방향에서 반대 방향으로 모양을 틀어서 오랜 시간 지나면

 

형상이 바뀌고 모양이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번 잘못 나간 가지는 하루아침에 바꾸지 못한다.

 

아니 바꾸면 가지는 꺾어져 부러져 죽는다.

 

가던 방향을 바꾸어서 돌아 오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은 사람이 변화될 것을 하루 아침에 기대한다.

 

착각이다.

 

 

한번 못나간 가지가 돌아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듯

 

사람도 가던 방향을 바꾸어 오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뀌지 않느냐고 화를 내고 실망하고 좌절한다.

 

이미 사람에게 한번 속았는데 이상하게

 

기대한다.

 

기대가 기대하는 사람을 절망에 빠뜨린다.

 

 

 

한번 사람에 실패해놓고서는 사람을 기대하고 믿으려한다.

 

사람을 믿지 마라.

 

이미 우리는 속을 만큼 속았다.

 

그냥 잘못나간 가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림

 

하나님의 시간에 묻혀야한다.

 

 

 

 

 

 

 

 

 

하나님의 시간

 

토양이 바뀌는 시간

 

지구가 움직이는 시간

 

사람의 그릇, 크기에 맞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러운 것이 정화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풀을 밟았다 다시 서는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버섯은 하루만에 자라고

 

비가 오고 땅이 굳는데는 일이 걸린다

 

 

 

그러나 나무가 상처가 나면 옹이 생기는 데는 달이 걸리고

 

땅의 체질이 변하는데도 길게는 가까이 걸린다.

 

 

 

사람이 못된 길을 회복하는데도 년이 걸린다.

 

그러나 지구가 가진 상처를 회복하는데는

 

년이 걸린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위해 수년 아니 년을 준비시키신다.

 

 

그래서 인류의 문제를 회복 하시는데는   백년 년이 걸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질서와 영적인 질서를 처음 만드신 법칙을 무너뜨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보면 기적같은 일을 가끔 보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을 회복하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있는 대목이다.

 

 

 

 

 

 

 

 

 

 

열매보다 토양,

 

체질을 변화시키는데 에너지의 많은 부분 신앙의 대부분을 힘써야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

 

나아가

 

 

좋은 땅은 좋은 나무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나무를 맺는다.

 

 

 

 

내가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를 원하는가?

 

 

체질을 바꾸라.

 

토양을 바꾸라.

 

 

 

 

 

토양을 바꾸고

 

체질을 바꾸는데 좋은 것은 똥이다.

 

거름이다.

 

 

말이 거름이지 오물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연 이치를 만드셨다.

 

죽은 낙엽이 떨어지면

 

땅은 죽은 낙엽으로 다시 회복한다.

 

 

 

태풍이 일어야 바다가 산다.

 

폭풍우가 불어야 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린다.

 

 

 

거름이 쌓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시간과 만날 그곳에는

 

미생물이 살아나고 지렁이가 살아나고

 

죽은 같으나 그곳에는 수많은 생명이 움직인다.

 

 

 

 

 

당장 좋은 것은 당장 쓰기에 좋으나

 

길게가면 좋지 않다.

 

 

 

 

사람들이 편리를 위해 과학이 사회가 발달한다.

 

그러나 가장 발달한 나라일 수록  덕보다는 해가 많다.

 

 

나라가 선진국일 수록 자살률은 높고

 

과학, 사회발전, 경제 발전, 교육이라는 이름아래

 

사람이 죽을 지경이고

 

삭막해지고

 

자연과 사람이 사는 곳에는 악함과 좋지 못한 결과가 더욱 많이 드러난다.

 

 

공해며 개인주의며 사회악은 나라와 사회가 발전한 곳일수록 심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음식이 좋은 음식인가?

 

입맛에 맞는 것이 좋은 음식이라 여긴다.

 

어떤 책이 좋은가?

 

마음을 표현한 책을 좋은 책이라 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공감해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그럼 어떤 약이 좋은 약인가?

 

입에 맞는 약인가?

 

먹기에 좋은 약인가?

 

보기에 좋은 약인가?

 

아니다.

 

입에는 쓰고 보기에는 그래도

 

병이 낫는 약이 좋은 약이다.

 

 

 

그럼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인가?

 

당장 입에는 달지 않고,

 

당장 마음에 닿지 않아도

 

영혼이 힘을 얻고 인생의 길을 발견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므로 길에 전부를 있도록 하는 설교이다.

 

 

비록 헌신을 요구하고,

 

비록 섬김을 요구하고,

 

비록 아픔의 길을 가게 한다 할지라도

 

당장의 단맛이 없고

 

당장의 마음에 불편함이 있어도

 

영혼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뜻대로 가도록 만드는 설교!

 

그런 설교가 좋은 설교이다.

 

 

 

설교는 음식도 아니고,

 

설교는 옷도 아니며

 

설교는 책도 아니다.

 

설교는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며

 

가장 하나님의 뜻을 가도록 만드는 유일한 인생의 불빛이다.

 

 

 

 

나는 입에 맞는 설교도 것이다.

 

나는 마음에 닿는 설교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불편해도 영혼이 바른 길을 가도록 하는 설교

 

하나님의 바른 뜻을 전하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설교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 설교자로서 일차적 목표이다.

 

 

 

 

 

 

 

이것은 당장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설교는 사람을 잠시 잠깐 주는 진통제 같은 역할을 뿐이다.

 

 

심장을 도려파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끊이없이 요구하고

 

불편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전달할 사람은 근본 문제가 해결되고

 

근본 병의 증상인 외적 증상이 사라진다.

 

외적 증상을 없애기만 해서는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

 

 

 

나무가 병이 들면 가지를 고치지 마라.

 

뿌리를 고쳐야 한다.

 

뿌리가 고쳐지지 않으면 토양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이다.

 

 

 

 

한국은 당장 입에 좋은,

 

귀에 좋은 설교에 익숙해 있다.

 

그랬더니 한국교회 년이 지나고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없이 잘됨만을 강조하다

 

잘됨이 하나님의 축복의 전부인양 강조한다.

 

잘되야한다.

 

그러나 당장 손해가 와도 말씀의 도를 지키는 범위 안에서 잘됨이어야 한다.

 

 

당장 가지만 그럴싸하면

 

가지는 얼마 가지 않아 말라 죽거나  병들어 죽는다.

 

뿌리,

 

토양이 건강하면 가지는 시간은 가도 오랫동안 푸르르고

 

열매도 다름을 있다.

 

 

 

 

 

 

 

토양을 확인하라.

 

체질을 확인하라.

 

 

 

하나님의 체질로,

 

천국의 토양으로 바꾸지 않으면

 

같은 문제 같은 아픔이 평생 나를 따를 것이다.

 

 

 

 

 

 

 

같은 문제로 자꾸 넘어지는가?

 

사람문제로 넘어지는 사람은 자꾸 사람 문제로 넘어지고

 

돈으로 넘어지는 사람은 자꾸 돈으로 넘어진다.

 

명예로 넘어지면 자꾸 명예에 목숨을 걸고

 

여자로 넘어지면 자꾸 여자로 걸림이 된다.

 

 

 

이유가 뭔가?

 

제질이다.

 

토양이다.

 

 

 

문제의 반복은 체질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시다.

 

하나님은 목양 하시는 목자시다.

 

 

 

 

그분은 우리를 돌보시고

 

기다리시고 인내하신다.

 

 

우리의 토양과 체질의 변화를 위해~

 

 

그것이 일차적인 하나님의 일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