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넘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스스로 나를 넘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일을 대신 해주기 전에
마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나를 넘는지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넘을 수 있는 시간을 주신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하실 거라면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믿음의 모든 부분이
나 스스로 나를 넘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아무것도 안하시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넘도록
때로 광야라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하시고
나 스스로를 충분히 볼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만드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나 때로 내가 나를 너무 힘겨워할 때
까마귀를 보내시기도
생각지 않은 위로의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하신다.
생각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사랑의 목적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원하시지
필요적 구함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시다.
세상의 모든 것도 만드시고
하늘의 해와 달도 멈추시고 바다도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힘이 없어서 나에게 기적을 못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다 할수 있으나 할 수 없는 것을 원하시는데
그것이 의지적 감정적 전인격적 사랑이다.
하나님이 다 하시나 하시지 않는 것은
오직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 내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파파야라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파파야라고도 하고 파오파오 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나무는 새순이 나고 나무가 자랄 때 가만히 두면 한도 없이 키가 큰다.
높이 자라는 나무는 4-50미터까지 자란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란 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한다고 한다.
열매를 따먹기도 힘들 뿐더러 열매도 많이 맺히지 않는다.
자기 자란다고 열매는 안중에는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은
이 나무가 적당한 높이에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랄 때
가운데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한다.
그럼 이 나무는 높이 자라지 않고 적당한 높이에
열매를 맺는데 충실 한다고 한다.
그렇게 잘 자란 나무는 가지를 대충 잘라서 심어도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또 된다고 한다.
이 파파야 나무가 참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고 여긴다.
우리는 자꾸 높이 자라려 한다.
그러면 열매는 없다.
높이 자라는 것에 모든 열정을 솟으면 열매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중심 가지를 잘라놓으면
열매를 맺는 것에 모든 영양분이 돌아간다.
성경 말씀이 생각나다.
[요12: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꺽을 때 하나님은 그 때부터 열매를 주신다.
내가 맺는 열매와 하나님이 맺게 하시는 열매는 다르다.
내가 열심히 열매를 맺어봐야 내 능력까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가장 중요한 가지를 꺾을 때 주시는 열매는
삼십 배 육십 백 백배의 열매를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많은 열매를 원하신다.
성령의 열매는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나오는가?
육체가 죽어야 나온다.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는 상극이다.
육체가 죽어야 성령이 살고
성령이 살려면 육체는 죽어야 한다.
별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너무 많이 고집을 부린다.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백도 없으면서
무슨 자존심은 그렇게 강하고
무슨 배짱은 그렇게 많은지 놀랄 지경이다.
그렇다고 높이 높이 자라 세상에 자랑 할 만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얼마나 강력하게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사는지 모른다.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조건은 육체의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나를 넘도록
내가 나를 넘어 내 의지를 죽이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지를 꺾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기도는 내가 죽는 시작점이요
기도를 통해서만 겸손을 얻을 수 있다.
기도를 통해서만 육체의 중심가지가 죽고
기도를 통해서만 성령께서 나를 움직인다.
그래서 기도는 내뜻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보물 창고로 가는 보물통로이다.
비록 가는 길이 협착하고 어둡고 힘들어도
그 길만 잘 통과하면
하늘의 보물과 기쁨을 이땅에서 누리는 보물통로이다.
예수님은 그 통로로 날마다 하늘의 보물을 먹고 사셨고
하늘의 양식을 먹고 영혼의 살찜을 경험하셨다.
세상이 주는 유혹도 세상에서 안주하고 싶은 욕망도 넘었고
자신의 전부를 주어도 넉넉한 하늘의 보물을 간직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의 마음,
하늘의 만나를 맛보았다.
그래서 그분은 스스로 만나이시다.
이 땅을 살면서 하늘과 통하지 않는 자는 하늘의 사람이 아니다.
날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맛보는 자만이
이 세상에서 하늘의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몰라서 못하지 않는다.
알아도 나를 이기지 못해서 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해야하는 일,
반드시 받아내야 하는 고백이라면
죽을 만큼 아픔의 시간,
죽을 만큼 고통의 시간을 주셔서라도 그 고백을 받아내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 많은 기회를 허락하신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우리가 죽지 않으니
그리스도가 죽으셨다.
나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다.
나의 가장 중요한 가운데 가지를 꺾지 않는 이상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