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 하나님의 회복 > 으로
시작한 11편의 글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회복을 하실 것인지 이야기 하였다.
하나님의 유일한 소원은
< 하나님 나라의 회복 > 이라는 1편을 시작으로
< 믿음 >
< 영생 >
< 공의 >
< 존재 >
< 예배 >
< 기쁨과 평화 >
< 권세 >
< 사명 >
< 육체 >
< 만물 > 까지 왔다.
이제 이 모든 것의 회복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원래 상태로 돌려 놓으신 후에 그분 하나님께서 찾으시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 영광 > 이다.
오늘은 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의 마지막인
< 하나님의 영광 > 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회복하신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온전하게 드러내실 것이며
우리는 가히 그 영광에 눈을 떠서 보지 못할 만큼 영광스러움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런 분이시다.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을 하나님은 가지시고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신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선다면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눈물 말고는 드릴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런 분이시다.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세상 자체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하늘과 땅과 우주와 온 만물은 그 만들어진 모습과 형상으로도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지식의 풍성함이 드러난다.
사람이 아무리 정교하게 침을 만들어도
동물의 침보다 정교할 수 없으며
아무리 섬세하게 만들어도 나뭇잎 하나의 정교함에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구성과 형성은 가히 놀랄만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 세상과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였다.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그런 세상이 오직 사람의 믿음의 상실로 모든 것이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의 상실로 가리워졌고,
세상 만물이 소리치며 높이던 하나님의 영광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과 만물을 보는 방법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믿음의 눈이 있어야 세상이 소리치며 찬양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을 수 있다.
믿음의 상실은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고 사명을 감당하며 일하지 못하게 한다.
그 믿음의 소유자이자 믿음의 매개체인 사람이 믿음을 상실 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졌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형상과 만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의 것으로 대체하려 한다.
[롬1: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믿음은 하늘을 구하게 하고 믿음의 상실은 오직 세상을 구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의 서론을 어떻게 시작하는가?
[출20:3-4]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다른 신 즉 세상의 다른 형상이다.
믿음이 사라지면 가장 큰 증상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의식은 오직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의 조건을 애굽 땅,
세상의 종 되었던 곳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자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이 가능하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그냥 하나님을 믿으라 하지 않았다.
믿음을 일으킬 만한 사건을 주시고 하나님을 믿으라 한다.
열가지 재앙은 애굽을 향한 심판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믿음의 사건이다.
믿음의 씨앗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75세에 주시고 45년 후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 나온다.
그 45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사건은 오직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믿음의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위기이나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시고
개입하실 구실이 생기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세상을 섬기는가?
왜 사람들이 우상을 가지는가?
왜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세상을 위하여 사는가?
믿음이 사라지며 오직 세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임을 느끼지 못하고
결국 세상 속에 숨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상의 앞잡이가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영광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형상을 회복하고 계시는 중이시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고전11:7]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원래 하나님의 형상은 영광 자체이다.
우리 사람은 그분의 놀라운 영광자체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우리 형상자체는
그분의 놀라운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보다 높으며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며 정복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가진
< 스스로 드러내는 영광 >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예수그리스도의 영광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믿음으로 회복될 때 이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골3: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우리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만이 새로운 모습으로 회복되며
모든 것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
구약의 율법을 그림자라 한다.
참 형상이 아니라 한다.
[히10: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그렇기에 율법은 영광스러움에 이를 수 없다.
다만 영광을 보게 하는 방편이다.
사람들은 참 형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방편에 목숨을 건다.
예수를 믿음으로 믿고 난 후에도 다시 이 율법으로 돌아가려 한다.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다.
아니다.
제발 부탁하는데 열심으로 하나님의 형상 즉 영광이 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런 분이시다.
다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존재론적 회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이다.
기도를 더 열심히,
전도를 더 열심히,
봉사를 더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
열심은 율법이다.
열심을 내지 말고 참 형상을 회복하라.
무언가를 하려는 것보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더욱 고민해야 한다.
내가 내 안에 믿음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고 자라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신다.
내가 일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라.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면 그때 일하라.
그것이 청지기의 역할 이다.
내가 주인인 양 내가 소유자인 양 내가 내 인생의 주체이며 주관자인 양
착각하고 살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율법 즉 우리의 열심으로 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 즉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연결자인 사람이 영광을 가리자
세상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첫째는 원래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창세기 3장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이 여기서부터 문제이다.
모든 하나님의 영광 즉 그분의 질서와 사람과의 관계와
사람을 통한 세상과의 관계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믿음의 모습, 관계로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 모든 것이 회복된 영광으로 이르지 못하심을 안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원상복구를 좋아하신다.
처음 에덴동산으로의 회복이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은 다시 사람을 통하여
모든 영광을 회복하신다.
그 원래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오직 < 믿음의 회복 > 이다.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외친 것은
< 오직 믿음 > 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것은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향하여 믿음을 가지도록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전파하셨다.
가르치고 고치고 전파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믿음의 회복이 시작이자 전부이다.
우리의 회복이 아니고는 하나님은 세상을 회복하실 수 없다.
우리의 회복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 스스로 영광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영광의 집약체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이며 자연의 섭리이자 영적인 원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오직 우리를 통해서 받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이고 원칙이고 방법이다.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은 다른 영광으로 마음이 차지 아니 하신다.
그분이 가지신 그 놀라운 영광스러움을 사람과 더불어 나누기 원하신다.
사람을 통해서 받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렇게 고백한다.
[시8: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자 기쁨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다.
그 기도의 핵심이 무엇인가?
영광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다.
[마6: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의 목적은 그분의 영광이다.
그 영광의 핵심이 무엇인가?
우리의 행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기에 믿음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라는 것이다.
구원이냐 구원이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구원 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영광 돌림은
빛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즉 착한 행실로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과
용서하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을 회복한 백성들의 < 용서하는 삶 > 과
빛으로서의 < 착한 행실 > 을 말한다.
주기도문의 마지막인 6장 12절 다음에 오는 말씀이 바로 용서이다.
[마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이 용서는 앞서 5장에서 빛으로서의 삶인 착한 행실의 연장이다.
주기도문의 기도는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고백적 신앙고백이며 간구이다.
용서를 뺀 기도,
용서를 뺀 믿음은 거짓이다.
착한 행실을 뺀 영광
착한 행실을 뺀 빛으로서의 삶은 가짜이다.
용서와 착한 행실은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돌리는 최상의 수준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의 최고 수준의 영광이다.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기억해야 한다.
둘째, 세상도 영광을 줄 수 있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영광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세상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도 우리에게 영광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을 잡고 있던 영이 예수님에게 시험한 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광이다.
그 영광을 가지고 시험을 한 것이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도 가지도록 유혹했다.
원래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사단은 그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했다.
세상의 영광은 모두 세상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은 영광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영광은 다 우상이 된다.
예수님은 이것을 경계하셨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영광도 세상의 영광이 있고
하늘의 영광이 있다.
사람이 주는 영광은 진정한 영광이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 진정한 영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하는 것조차
스스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하셨다.
스스로 말하는 자,
자신의 뜻을 좇아 말하는 자는 결국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지혜로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나온 십자가를 철저히 따랐고 믿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성령의 생각을 좇아 사는 삶을 요구하였다.
자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결국 자신의 영광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 그것이 시작이다.
내 생각,
내 말을 내려놓지 않는 자는 자신의 영광을 결국 구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과 말을 구하라.
성령은 그래서 우리안에 내주하신다.
내려놓음은 내 생각을 십자가에 죽이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죽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마음과 생각을 좇아 가는 삶이 내려놓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단회적인 믿음에 필요한
조건으로만 생각한다.
아니다.
이 십자가에 죽음은 세상에 반응하지 않고
성령에만 하나님의 생각에만 반응하는 삶을 말한다.
믿음은 단회적 사건임과 동시에
지속적 행위까지 포함한다.
이 행위라 함은
예수님이 가신 삶의 방식을 나도 믿고 따를 때 하나님의 나라와 회복이
가능함을 믿는 것이다.
영광은 단회적이지 않다.
영광은 믿음으로 들어와 고백한 자가
믿음의 방법을 따를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쁨이자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한다.
내가 죽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포괄적 삶의 과정속에
그분이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사역의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영광이다.
내가 죽어야 그분의 영광이 임한다.
내가 내 뜻과 계획을 버릴 때 그분의 임재가 내안에 임하게 된다.
그 감격과 경험이 없다면
아직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내 경험으로 사는 율법적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야한다.
믿음의 세계에 들어왔으나
아직 내 발은 율법의 방법을 따르는 이중적 삶으로
소속은 천국이나 삶은 아직 세상속에서 이중적 발걸음을 걷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걱정 말라.
좀 맞고~
좀 터지면 주여~하고 돌아오게 된다.
차라리 맞고 얻어 터지는 것이 감사하다.
이런 하나님의 조정의 시간없이 죽음앞에 맞닥드리면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며 아직 광야가운데 있음을 알기에
그에 맞는 훈련과 수고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회복해가시는 것이
완성되지 않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완전한 믿음안에 있지 않으면
수시로 세상만 보이고
주는 온데간데 없다.
그래서 세상이 악하고 세상이 혼탁할수록
하나님과 만나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자주 만들지 않으면
오직 세상만 보이고 주는 내 안에 영광의 만남을 주실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이 주는 영광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난과 아픔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십자가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세상과 하나님의 영광이 다름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법칙은 올라가는 법칙이다.
잡으려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고 오직 나만의 영광이 목적이다.
세상은 올라가면 더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 곳이 세상이다.
세상의 영은 만족함이 없다.
하나님을 노린 세상의 영이 하나님이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가진 전부를 가지지 않고서는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이 세상의 영의 본성이다.
그 세상 속에 하나님의 영광은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존경과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차지하고 뺏으려는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세상 영의 욕심의 방향성이자 영광을 향한 본심이다.
그런 세상 속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을 새롭게 제시하셨다.
스스로 높아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이심으로 영광을 얻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높이시는 방법은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하셨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천사도 타락한 세상의 영도 하나님이 그 본심을 아신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의 영이 절대로 흉내내지 못하며
그들의 본성을 역이용 하셔서 만든 영광의 길이
바로 < 고난을 통한 영광 > 이다.
나는 이것을
< 영광의 고난 > 이라 부른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세상의 영은 우리에게 세상의 영광으로 유혹하며
그 방법만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길 인 것처럼,
생존하는 유일한 이유인 것처럼 속인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영이 흉내 못낼 방법 즉,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로 하나님의 지혜를 발휘하셨다.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서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죄를 위해 맞으시고 피 흘리셔야 하셨다.
고난이 아니고는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방법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새 방법이다.
하나님은 이제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택하셨다.
고난이 아니고는 영광을 얻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고난은 죄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다.
고난과 피 흘림이 없이는 영광의 자리도 없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에게만 국한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이 내어놓으신 하나님 나라로 가는 방법을 믿음과 동시에
그분이 가셨던 그 길을 믿기 때문에 나도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이 행한 방법도 믿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어떻게 영광을 얻으시는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신다.
세상이 주는 올라감,
높아짐,
잡으려 함 등등은 세상의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과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 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것을 통해
그분은 영광을 얻으신다.
[딤후1: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2:3]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골1: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 온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
세상의 영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신
< 영광의 법칙 > 이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다.
십자가가 없는 면류관이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하나님은 내 고난을 통해 그분이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이다.
아니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고난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나의 고난으로 채워짐을 기억하라.
그것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하나님의 지혜이다.
< 영광의 법칙 > 의 총 집약체는
바로 < 십자가 > 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영광으로 관 씌우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며 영광으로 함께하는 것이다.
십자가 즉 고난이 없는 영광은 이 땅에서 없다.
그래서 " No cross no crown" 이라고 말한다.
창세 때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영이 뺏으려했다.
그리고 세상을 잡았다.
세상의 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것으로 바꾸려한다.
높아지려는 것,
남보다 더 나아지려는 것이 세상 영의 본성이다.
그 본성에 반대되는 개념이
< 고난 > 이다.
고난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영광을 위하여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터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를 허락하신다.
광야는 세상의 법으로 물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으로 살도록 만드는 훈련소이자
< 체질개선 프로그램 > 이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체질개선 프로그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
요셉,
모세,
여호수아…
누구든지 성경에 하나님이 쓰신 사람은 모두 이 프로그램을 거치고 나서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내었다.
이 과정을 지나야 세상적으로 보던 눈이 변하고
세상적으로 잘나가려는 본성이 때를 벗는다.
묵은 때를
묵은 땅을 기경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의 원리의 싹을 틔울 수 없다.
토양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씨를 심어도 바르게 자랄 수 없다.
토양이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하려면 씨에 맞는 체질로 변화되어야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는
세상적으로 물든 토양과 맞지 않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변화되려면 반드시 이 시간은 지나야한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이 체질이 변화되지 않으니
교회안에서 더 높아지려하고
이름이 나지 않으니 교회를 떠나고
알아주지 않으니 화를 낸다.
다 체질이 변하지 않아서 그렇다.
왜 하나님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라 했는가?
체질의 변화이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변화이다.
애굽은 땅이 너무 좋다.
그래서 씨를 뿌리고 발로 한번 쓱 밀어주면 자연히 농사가 되는 곳이다.
세상은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하면 되는 곳이다.
그런데 가나안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비를 주지 않으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내 힘,
내 능력을 내려 놓아야 되는 곳이 가나안이다.
그런데 급기야 이스라엘이 농사의 신인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 섬기게 되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아니라 농사의 신인 그들을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만 믿고 겸손하게 나아가야하는데
그것도 싫어진 것이다.
그냥 내가 편할 때 부르고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바알을 섬기고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고난은 그 바알을 없애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고 내가 원하는 때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게 만드는 것이 고난이다.
세상의 법과 세상의 원리와 정반대가
고난으로 이루는 영광이다.
예화를 잘 들지 않지만 하나 들어보면
아프리카에 원숭이를 잡는 법이 특이한 나라가있다.
이 사람들은 항아리에 바나나를 넣어두는데 이 항아리의 주둥이가 작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아서 쥐고 손을 빼면 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바나나를 잡은 원숭이를 보면 사람들이 잡으러 좇아가는데
사람들이 원숭이를 잡으러 와도 원숭이는 바나나를 놓지 않는다고 한다.
바나나가 원숭이를 잡은 건지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은 건지~
우리는 세상에서 바나나만 보고 사는 존재다.
그러니 바나나를 위해서는 전부를 건다.
그런데 바나나 때문에 자신이 죽는지 사는지 모른다.
덫 이다.
원숭이에게 바나나에 잡혀 죽지 않게 하려면
항아리 속의 바나나가 아니라
나무 위의 바나나를 보게 해야 한다.
그렇게 많이 널려있는 바나나보다
항아리 속의 바나나만 보이게 되면 원숭이는 죽는다.
자연이 주는 하늘이 주는 나무 위의 바나나를 보고 나무 위를 올라가게 해야 한다.
그 훈련이 광야이고
고난이다.
눈에 보이는 항아리속의 바나나를 버리는 훈련이 고난이다.
항아리속의 바나나를 던져 버리는 것이 내려놓음의 광야이다.
세상은 늘 항아리를 준비한다.
덫을 놓은 항아리!
그것이 세상이 주는 안목의 정욕이요 이생의 자랑이다.
그것을 잡았다고 다들 좋아한다.
그러나 곧 죽는지 모른다.
나에게 주어진 바나나가 항아리 속 바나나인지,
나무 위의 자연 속의 내가 노력하고 나무를 타서 얻은 바나나인지 구분해야 한다.
그것을 선명하게 보는 것이 광야, 고난이다.
예수님은 사역의 시작을 어디서 하셨나?
광야이다.
마귀에게 이끌리셨나?
아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셨다.
성령께서 광야로 이끄셨음을 기억해야한다.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상하지 않은가?
마귀가 데려간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이끄셨다.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장소이다.
시험은 뭐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시험을 하는가?
고난이다.
육체의 고난은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이게 한다.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명확하게 구분짓게 한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
그렇다.
시험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 시험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 > 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세상에 반응하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훈련을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것과 하나님이 주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셔서 말씀하셨다.
첫째,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하셨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정확하게 구분하셨다.
둘째,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했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셋째,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섬기는 대상으로 아셨다.
이 모든 말씀은 사십일을 굶으신 상태에서의 고백이다.
죽음을 각오한 말씀이다.
때로 사람이 너무 고난이 오면 영적인것과 육적인 것이 흔들리고
세상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되지 않을 것 같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반대이다.
힘들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차라리 편하게 될 때 조건이 좋을 때 하나님을 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시험은 환경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내 안에 시시각각 도사리고 있는 불신앙과 세상의 법을 따르려는
죄의 본성들이 나를 삼키려한다.
고난은 이 모든 세상의 욕망 즉 육체의 소욕을 잠재우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이미 이 세상은 자신의 영광을 채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산다.
그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은
< 세상이 가는 반대의 길 >
즉 < 고난과 섬김과 겸손을 통한 길 > 말고는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늘 이 두 갈림길에서 갈등했다.
쉽게 생각하지 말라.
세상이 주는 영광도 가히 유혹에 넘어 갈만하다.
그 모든 유혹을 끊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택한다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하나님을 의존함이 아니면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은 < 좁은 길 > 이라 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언약의 백성들이 걷는 고난의 좁은 길을 통해 받으신다.
이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신비이다.
넷째로 우리의 전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의 존재의 목적은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말하는 것
행하는 것
생각까지도 오직 그분의 영광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행하고 생각해야 한다.
영광이 아닌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다.
죄가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다.
영광을 위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물론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은 상태였으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결론은 오직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다.
왜 우리가 영광스런 백성인가?
이름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야곱의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왔다.
이름 속에 하나님이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로 우리가 복이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살았다.
내가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 발꿈치를 잡고
살아보겠다고 속이고 약탈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사는 것이 내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말은
내 삶에 하나님이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은
내 살던 방식에서 이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겠다는 고백적 신앙이다.
이전에는 내가 살려고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삶으로
하나님이 내 이름에 내 안에 들어오시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복을 받는 자가 아니다.
복 자체가 되는 것이다.
왜 복이 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그렇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
하나님 간섭하고 하나님이 인도하고 하나님이 주관하는 삶 차제가
복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 복의 근원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고
야곱을 찾아와서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것이다.
이제는 네 마음대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이 간섭하고 주관하고 인도하는 삶으로 그분의 이름이 들어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영광이다.
하나님으로 내 안에 있게 하라.
그것이 우리가 영광스런 삶을 살게 하며
그분으로 영광을 얻으시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도가 좀 어눌하고
성경을 잘 알지 못하고
헌금도 적게 드리고
예배도 잘 참석을 못해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자신이 내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영광스런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되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먼저 되려는 싸움이다.
높아지려는 싸움이다.
더 잘 나려는 싸움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서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자는
모든 것이 달라지는 인생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복된 민족이다.
이유는 그들의 이름 속에 하나님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세상을 잡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셨기 때문에 복된 민족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온 족속 속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광이요 축복이다.
세상을 잡지 말라.
하나님을 잡으라.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다.
그러나 야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왜?
그는 고난가운데 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지경에 있었다.
그 광야가
그 고난이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기회가 되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기도 하고
축복을 잡는 기회이기도 하다.
야곱은 고난을 이스라엘이 되는 축복의 기회로 삼았다.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 온다.
고난이 아닌 곳에는 영광이 없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도 축복이 되며
하나님 때문에 아픔도 영광의 이유가 된다.
하나님 자신이 내 안에 살게 하라.
하나님 자신이 내 삶의 전부가 되게 하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이유가 되게 하라.
그것이 이 땅에서 사는 보잘것 없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영광이다.
내 안에 주의 영광을 보게 하라.
*** 하나님의 회복 총 12편을 마무리하며~~ ***
이제 하나님의 회복 12편을 마무리 한다.
감사한 시간이었다.
놀라운 감동과 영감과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다시 다음 말씀을 주셔서
다음을 기다리는 설렘을 주신 것 또한 감사한다.
다음은 < 예수 그리스도 > 이다.
몇 편을 할지 알지 못하나 이미 마음을 주셨으니
순종밖에 없다.
글들의 제목들은 내가 정한 것이 없다.
마음을 주셔서 제목을 정하고
앉으면 글의 내용을 주신다.
그저 따름이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동행해 주기를 바란다.
글을 올리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읽는지 알지 못한다.
궁금하기도하고
가끔씩 올라오는 댓글이 큰 힘이 되기도 한다.
함께함의 의미가 더욱 크기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