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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왜 연단하십니까?

하나님 왜 연단하십니까?

 

 

 

 

 

 

 

 

 

 

 

 

 

 

하나님 연단하십니까?

 

 

 

 

 

 

 

 

하나님의 세상 운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아름다운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다.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선포하시고 언약을 통하여 그분의 나라를 회복하심이다.

 

 

 

 

그런데 언약은 아무나 따르도록 하지 않으신다.

 

아니 평범한 사람을 언약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약속을 이루려 한다.

 

 

 

이것이 < 교만 > 된다.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는 노력, 열심, 수고가 결국 교만이 된다.

 

그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력과 수고와 열심으로 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도록

 

고난의 시간을 허락하신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은 하나님의 약속은

 

도무지 현실에서 이루어 질것 같지 않은 상황처럼 보이게 만드신다.

 

 

 

 

현실적인 , 눈에 보이는 눈으로 보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 믿음 > 이라는 방법을 우리에게 주신다.

 

 

 

 

 

 

믿음이 아니면

 

모든 현실에서 불가능할 같은 말씀과 언약과 약속들을 이룰 방법이 없도록

 

고백하게 하신다.

 

 

 

 

 

 

 

그래서 믿음은

 

< 불가능의 현실속에서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 > 이다.

 

 

 

 

 

 

가능한 현실,

 

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믿음이 꽃을 피울 없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믿음이 찾아온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약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가신다.

 

하나님의 약속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다.

 

약속이 아니면 차라리 마음이 편한데

 

약속을 생각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상상할 없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약속도 의미 없으며 현실도 약속으로부터 너무 멀게 느껴지는 시간을 허락하신다.

 

 

 

 

 

 

 

 

시간이

 

 

하나님의 < 연단 > 이다.

 

 

 

 

 

 

 

 

믿음이란 불가능의 현실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라면

 

 

연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도록 만드는 비밀통로이다.

 

 

 

 

 

 

 

연단의 목적은 자신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자신의 방법을 빨리 포기하게 만드는 길이 연단이다.

 

 

 

 

 

나의 생각, 계획,

 

그리고 목표를 버리도록 하는 방편이 연단이다.

 

 

 

 

 

그래서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가까이 갈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한다.

 

 

 

 

 

그때,

 

우리 안에 믿음이 발동한다.

 

하나님은 있다.

 

주께 가면 가능하다.

 

하나님만이 일을 있다는 고백,

 

믿음을 받아내신다.

 

 

 

 

 

 

 

우리는 상태를

 

< 겸손 >이라 한다.

 

 

 

 

 

 

나를 내려 놓는 !

 

 

나의 생각, 고집, 경험, 목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

 

그분의 방법,

 

그분의 목적에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것이 겸손이다.

 

 

 

 

 

 

 

그래서 겸손은

 

교만을 지나서,

 

불가능의 현실

 

불가능의 바닥을 지나서

 

나의 생각과 힘과 자아가 죽어짐을 지나서

 

말씀에 의지한 믿음을 만나야

 

그제사 겸손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연단의 시간을 지나야 만이

 

말씀이 선명하게 보인다.

 

말씀의 능력을 붙잡게 된다.

 

이것은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에서 오는 포기 임과 동시에

 

새로운 세상으로 문을 여는 시작점,

 

하나님이 일하시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연단이라는 사막을 지나서 

 

겸손의 강을 만나면

 

우리는 순종이라는 배를 타게 된다.

 

 

 

 

 

 

말씀의 순종의 배는

 

내가 노를 젖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를 저을 때는

 

세상의 바람에

 

세상의 비바람에

 

세상의 폭풍우에 모든 사력을 다해도 배는 전지 하지 않는다.

 

 

 

 

 

오직 말씀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순종이라는 배는

 

하나님의 소원의 항구로 향하게 된다.

 

 

 

 

 

 

하나님 그분의 뜻과 생각을 우리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은 그분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언약을 세우시고 약속하셔서

 

그분의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하신 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이라 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

 

내가 찾아간 것도 아니고

 

그분이 찾아오셔서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뜻을

 

안에 이루기 위해

 

 

그분은 연단이라는 사막으로 우리를 불러내신다.

 

 

 

 

 

 

 

모세는 알지 못하고 광야로 갔고,

 

이스라엘 백성은 불려져서 광야로 갔다.

 

 

 

 

 

 

그들이 자처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연단이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다.

 

세상의 원리,

 

세상의 법칙으로 잡으려하고

 

붙들려하고 올라가려하고 쌓으려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무너져야 새로운 역사 언약을 이루신다.

 

 

 

 

 

 

언약을 위해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셨다.

 

 

우리는 안에 바벨탑을 무너뜨려야 한다.

 

 

 

 

 

 

스스로는 절대 무너뜨릴 없는 것이 바벨탑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돌아갈 고향을 버리게 하시고

 

가족 형제로부터 버림을 당하도록 허락하신다.

 

 

 

 

 

 

 

과정을 지나지 않은 자는

 

연단이라는 사막의 시간을 지나지 않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씨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환도뼈를 치셔야 한다.

 

죽지 않은 이전의 습성과

 

죄악의 본성과

 

세상 방법대로 살려는 처절한 고집들을 내려놓지 못한 나의 모든 자아가 죽어야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연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리이다.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드신 하나님의 자연의 순리가

 

영적인 순리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래서 연단은 세상적으로 아픔이나

 

새로운 세상에서 만나는 축복의 열쇠이다.

 

 

 

 

 

연단 속에 있는가?

 

웃을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그냥 웃어라~~~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