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왜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은혜이다.
그럼 불신자가 누리는 것도 은혜인가?
맞다.
그것도 은혜다.
문제는 그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누리는 우리의 모든 것은 은혜다.
그런데 살다 보면 보편적인 은혜 말고 우리는 특별한 은혜를 원한다.
왜 은혜가 필요한가?
우리는
< 부르심과 사명의 중간 > 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르심을 통해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의 < 사명자들 > 이다.
이미 앞의 글들에서 사람의 존재 가치를 사명으로 설명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통치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악한 영으로 세상의 영에게 넘어갔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 나라를 회복하시는 긴 시간의 역사를 만드셨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하나님 나라)가까왔다고 전파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하나님 나라 회복의 길을 여시고
다시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주셨다.
그것이 지상명령인 가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사명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될때까지 사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명이 없는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말라고 청년 사역을 할 때 가르치기도 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부르심과 사명 사이에 있다.
부르심과 사명의 감당은 다르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강권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나 부르심에서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동안은 우리의 몫이다.
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75세에 부르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완전한 믿음의 고백,
즉 이삭을 바침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믿는 부활의 믿음까지 가는데는 120세 즉
45년이 걸린것이다.
이 부르심에서 사명으로 가는 시간동안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고
그 삶이 달라진다.
자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15일만에 갈 길을 40년이 걸렸다.
모세의 부르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가나안까지 가는 모든 여정속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 은혜 > 이다.
가는 걸음 동안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하심과 하늘의 만나와
땅의 샘물이 필요하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 은혜가 있어야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왕들에게 아내를 넘겼다.
이때 우리의 약함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나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키심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부르심은 사명으로 가는 시작이다.
부르심은 사명의 통로이다.
그러나 부르심과 사명 사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
모세에게는 부르심과 함께 모세와 함께하는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그의 실수에도 미리암과 아론이 병을 얻는 은혜를 주셨다.
가는 곳마다 기도할 때 마다 함께하심의 은혜가 있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몸으로 사는 이땅에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셨던 예수님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
그것이 세례후의 하늘로부터 음성이고
변화산에서의 하늘로부터의 소리이다.
[마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우리는 부르심에서 사명으로 가는 시간이다.
그 길은 세상의 영이 우리를 항상 유혹하고
세상의 법칙대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늘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막연하게 우리가 잘 먹고 잘살고
좀더 나은 집,
좀더 나은 차,
좀더 나은 수입을 위해서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는
부르심에서 사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백성을 위해 세상을 붙들고 있다.
그래서 자연만물은 그분의 손이 붙들고 있다.
그래서 자연만물은 유지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명을 향하여 나아갈 때
특별히 그분의 붙드심 즉 은혜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아차 하나님께서 세상을 세상이 가는대로 버려두면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그분의 능력의 손이 세상을 붙들고 계신다.
[히1: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분이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니 세상이 온전하게 운행이 되지만
잠깐이라도 버려두면 세상은 혼란이 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특별한 하나님이 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 속에서도
야곱의 약탈적 성격과 약은 성질에도
모세의 불 같은 성격에도 그들을 은혜 속에 지켜가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신다.
부르셨다는 것은 사명까지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볼수 있다.
그러나 그 사명이 나의 세대에서 이룰수도 있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도한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장정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
가나안을 향한 사명자로 부르셨지만
그들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부르신 자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 조급함 > 이다.
잘 모르면 기다려야한다.
물이 없으면 좀더 기다려야한다.
여지껏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이 있었고,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호하심과 기적으로 살았다.
이때 필요한 것은
< 과거를 기억하라 > 이다.
하나님은 절대 보편적 은혜를 넘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절대
사명자로서의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열 가지 재앙을 은혜로 경험하고 체험했다.
그럼에도 물이 없을 때 그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지내온 세월을 생각하면서 착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자신의 힘으로
어찌어찌 당연하게 온 줄로 안다.
아니다.
하나님이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지 않으시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 주의사항을 말씀하셨다.
핵심이 뭔가?
내 힘으로 살았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신8:17]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과거와 현재 내가 존재하고 누리는 복이 내 힘으로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런 복을 주시고 이런 은혜를 주시고 이런 축복과 안정된 삶을 주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명이다.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 은혜의 시간이다.
이 사명을 잊는 순간 우리는 조금함으로 모든 일을 망친다.
모세는 과거를 그리고 사명을 잊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당한다.
이유는 하나다.
조급함으로 화를 내고
화를 냄으로 사명을 잊어버린다.
우리의 존재는 사명이다.
창세후에 사람은 오직 세상을 하나님 뜻대로 다스리고 정복하는 사명으로 존재했다.
사명은 죄로 말미암아 사라진다.
욕심을 부리면 죄는 사라진다.
세상과 나를 비교하면 사명은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사명이 주어졌다.
제자를 삼고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이 사명을 위해 우리는 존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세상 모든 사람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비와 해가 비치듯 은혜가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명을 위하여 특별한 은혜를 약속하셨다.
이 사명을 붙들고 가는 자에게 영원토록 내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명이 있는 자,
약속 즉 부르심을 통해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자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를 위하여 예수를 믿는 자는 오직 나의 필요를 위해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를 위해 예수를 믿는 자는 이 은혜도 예수님의 뜻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하다.
겨우 내 배만 채우고
겨우 내 자녀, 내 가족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은혜가 아니다.
그 수준을 넘어 부르심에서 사명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온전한 사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행하심과 뜻을 명확히 보는 눈과
그분의 음성을 순간순간 들을 수 있는 귀와
사명을 위하여 내 손과 발이 행할 수 있는 힘을 위하여 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