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하나님의 회복 8편- 능력을 원하는가? 죽어라~

하나님의 회복 8편- 능력을 원하는가? 죽어라~

 

 

 

 

 

 

 

 

 

 

하나님의 회복 8-  권세! 능력을 원하는가? 그럼 죽어라!

 

 

 

 

 

[마6: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한번 힘을 가진 사람은 더욱 힘을 가지기 원한다.

 

 

그래서 조금의 맛을 사람은 자꾸 힘을 원한다.

 

 

 

아담과 하와는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마음대로 세상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하사하는 능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의 어떤 것이라도 가질 있고 먹을 있는 힘을 가졌다.

 

 

 

 

문제는 무엇인가?

 

힘은 어떤 원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힘은 좋음이 아닌

 

악함으로 찾아온다.

 

 

 

 

 

요셉을 보라.

 

보디발의 집에 있을 그에게 주어진 권세는 보디발의 아내 외에는 모든 것을 가질 있었다.

 

그것이 권세의 조건이었다.

 

 

 

권세의 조건은 무엇이었나?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이다.

 

다스림과 정복의 의미는 하나님이 만드신 원칙과 법칙 안에서,

 

하나님의 안에서 허락된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권세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만약 요셉이 모든 것을 가지고

 

보디발의 아내까지 욕심을 내었다면

 

요셉에게 주어진 결과는 감옥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

 

하나님이 정한 안에 있었다.

 

 

그것이 권세를 다시 허락 받는 조건이다.

 

 

 

그가 보다발의 집에서 하나님이 정한 ,

 

하나님이 정한 안에 있었기에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게 창조된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권세와 다스림을 잃어버렸다.

 

모든 권세와 힘은 사람 스스로 결코 회복할 없는 것이다.

 

 

권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지는 권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 원리를 가질 얻어지는 권세이다.

 

 

 

 

 

 

에덴에서의 잃어버린 권세의 결과는 죽음이다.

 

죽음의 한계를 넘지 않으면 하나님이 처음 주셨던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세와 힘은 찾아 오지 않는다.

 

 

 

 

원래 사람에게 주어진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권세와 힘이 주어졌으나

 

사람은 권세를 하나님이 정한 선을 넘음으로 잃어버렸다.

 

 

 

 

하나니의 , 하나님의 원칙이 파괴 것이다.

 

이상 권세,

 

하나님나라의 권세는 힘을 쓰지 못한다.

 

 

?

 

 

하나님의 권세는 사람의 욕심, 죄로 인해

 

세상에 속한 영에게 넘어가 버렸다.

 

권세는 원래 선하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한 권세와 힘이지만

 

권세와 힘은

 

오직 욕심을 위해,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힘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은 권세를 회복하기 위해 다른 방법,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권세 회복의 길을 정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힘을

 

모아 세상을 만드셨고,

 

모든 힘과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는데

 

사람이 모든 힘과 권세를 세상의 영의 방법으로 사용하게 것이 타락이다.

 

 

 

오직 자신의 것을 위해,

 

오직 욕심으로,

 

오직 자신의 것을 채우려는 세상의 영의 법칙을 좇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에 매여 세상의 법칙대로

 

욕심을 좇아

 

세상 영을 좇아 때에는 처음 권세를 결코 회복할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며

 

권세를 다시 회복하기 원하시고

 

회복되어 믿음의 , 영생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권세를 다시 주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회복케 하시는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처음 잃어 버린 권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세였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으나

 

욕심을 따라 세상의 영의 법칙대로 사는 자에게 백성의 권세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 정한 믿음의 길을 가는 자에게 백성이 아닌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과 같은 형제로 후사를 이을 자로의 권세이다.

 

 

 

 

 

하나님은 잃어 버린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이전의 백성으로서의 권세가 아닌

 

높은 자녀의 권세로 우리를 다시 회복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자녀가 이전에 에덴에서 누렸던 영광보다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서게 되는 것이다.

 

 

 

 

권세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이다.

 

 

 

 

착각 해서는 되는 것이 우리는 원래 자녀가 아니다.

 

 

 

자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전에는 백성이었는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정한 믿음의 법을 택할 때에는 이전 보다 놀라운

 

권세로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자격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것이다.

 

 

 

 

흥정으로 따지면,

 

새롭게 제시하는 하나님의 계약, 언약의 조건 치고는 너무 파격적이고

 

놀라운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다가

 

몰래 몰래 들어온 사람들에게 땅을 빼앗겼다고 하자.

 

그런데 주인이 땅을 찾고

 

회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그렇게 제시를 했다.

 

만약 내가 제시한 법을 따르면

 

내가 다른 곳에도 땅이 엄청 많고 나라도 있는데

 

나라와 땅을 분배할

 

나의 아들과 같은 자격으로 줄테니

 

나의 법을 따르고 나에게 속한 사람으로 오라는 것이다.

 

 

 

양자로 삼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줄테니

 

나의 자녀로 등록을 하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이전에 지었던 모든 허물과 몰래 들어와서

 

땅에서 법대로 살지 않았던 모든 것을 잃어 줄테니

 

이제 나를 믿고 나의 자녀로 오기만 하면

 

모든 권세와 힘을 아들과 함께 주겠다는 것이다.

 

 

 

 

주인의 입자에서나 몰래 주인의 땅에서 마음대로 살던 백성들의 입장에서나

 

놀라운 제안이고 파격적인 계약조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 말을 믿지 않는다.

 

가보지도 않은 나라와 땅이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주인이 나를 정말 받아 줄지도 모르겠고

 

나는 방식대로 살다가 나중에 심판 받고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이나 구약에 보면 이런 비유들이 자주 나온다.

 

 

 

탕자 이야기나,

 

아들을 내어준 왕의 이야기나,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나,

 

포두원 품꾼 비유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 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셨던 권세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라는 문구가 나온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이 회복하시기 원하시는 회복의 내용들이다.

 

 

 

그렇게 수도 없이 외우던 기도문에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회복하기 원하셨던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아픈 마음,

 

하나님의 목표, 하나님의 뜻이 기도문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이방인들이 중언부언하듯 예배의 마무리용이나

 

어중간한 시간에 외우는 기도문 정도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회복을 향한,

 

권세를 다시 찾기 위한 의지를 느껴야 한다.

 

 

 

 

우리가 권세를 회복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권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사람 사람이 회복해야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권세를 회복할 자들을 찾고 만들고 세우라는 것이다.

 

 

 

 

 

 

 

 

 

 

권세는 언제 다시 회복 되는가?

 

 

 

하나님은 ,

 

권세를 회복하는 길을 다시 만드셨다.

 

 

 

하나님은 권세를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악한 영이 가진 권세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새로운 법과 원리로 권세를 차지 하기 원하신다.

 

세상이 흉내 없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방법으로 권세를 회복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그저 하나님의 백성의 권세를 받았다.

 

공짜다.

 

그런데 공짜의 권세와 힘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욕심을 부렸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생각한 것이다.

 

힘은 철저히 하나님이 주신 나라와 세상에서 질서를 위해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되었으나

 

자신을 위한 욕심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사용될 힘은 힘이 아닌 악이 되었다.

 

 

그래서 권세의 회복은 세상의 논리처럼

 

있는 자가 차지하고 가지는 것이 아니라

 

힘의 정반대 개념,

 

오직 믿음으로만 가도록 정하셨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을 내려 놓지 않으면,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논리를 내려 놓지 않으면

 

절대 가지지 못하는

 

 

< 믿음의 > 정하셨다.

 

 

 

 

 

이런 법을 정하셨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하나님의 권세를 주시지 않는다.

 

세상의 힘에

 

세상의 논리에 젖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겸손히 귀를 열고 눈을 여는 자가 아니면

 

결코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이유는 다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빼앗기고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세상의 논리에 너무 빠져있고,

 

자신의 의에 너무 높은 교만과 자만으로 빠진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아예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힘을 가진 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논리와 법을 버리고

 

자신의 전부를 포기 아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세리와 창기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 예수님은 지내셨는지를 생각해야한다.

 

 

 

그들과 힘의 소유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구분하셨는지를 생각해야한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힘으로 가지 못한다.

 

세상의 논리에 잡혀서 힘을 잡고 권력을 잡으려는 자에게

 

결코 하나님은 다시금 잃어버렸던 논리의 힘을 주지 않으신다.

 

 

새로운 권세를 가질 자격은 힘과 전혀 반대의 원리를 주셨고

 

원리를 알고 따르는 자에게

 

땅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권세를 주시고 세상을 다스릴 힘을 주신다.

 

 

 

 

 

 

 

 

권세는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첫째로 죽어야 한다.

 

 

 

 

힘을 줬더니 살고자 선악과를 먹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는 자는 산다 했다.

 

 

 

 

[눅17: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원리를 기억해야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함을 아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여시기를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길을 하나님은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

 

 

 

 

[마28: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길은 죽어야 권세를 회복 하도록 만드셨다.

 

 

 

 

권세는 죽어야 가지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을 죽이셨다.

 

 

 

 

 

버려야 가지도록 하셨다.

 

제자들은 버렸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다.

 

 

 

 

주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고백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이 그렇게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놀라운 권세를 주셨는가?

 

 

 

 

 

 

[마16:17-2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세상 영의 논리,

 

세상의 힘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신 원리를 믿고 고백해서 그렇다.

 

 

 

 

 

 

고백의 장소는 가이샤랴 빌립보이다.

 

황제의 도시이다. 황제의 이름으로 건립된 황제의 도시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도시이다.

 

그곳에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세상의 논리에 반하는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세우시고 길을 여시는

 

그리스도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메시야입니다라고 고백이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세상에 길을 여시는 분이 바로 당신 예수님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세상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원리를 따르고 가시는 당신이 구세주 입니다라는

 

고백을 베드로가 황제의 도시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고백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여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논리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이 땅에 유일하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 교회 > 이다.

 

 

 

 

 

 

 

교회는 세상의 논리가 아니

 

하나님의 논리,

 

힘의 논리가 아닌

 

죽음의 논리로 세워진 땅의 유일한 장소이자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주권이 살아 있는 나라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죽음의 원리 위에 세워진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나?

 

 

교회는 세상의 , 권력, 욕심으로 세워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곳이

 

새롭게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힘의 논리가 절대 통하지 않는 곳이 교회이다.

 

 

죽어야 세워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며

 

죽음으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권세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

 

하나님이 정하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인 죽음의 길을

 

기꺼이 가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아니라

 

앞으로 세상을 심판할 권세도 주셨다.

 

 

 

 

 

믿음은 죽음으로 증명된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은 십자가로 증명하셨다.

 

 

 

죽지 않으면 자녀가 되지 못하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세상에 대하여

 

힘의 논리에 대하여,

 

세상 권세에 대하여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는다.

 

 

 

 

살려고 하다가 죽은 아담의 실패를

 

죽어야 살게 되는 새로운 둘째 아담의 길을 우리가 따를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권세,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얻는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다는 의미는

 

그냥 믿음으로 내가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함과 동시에

 

세상에 대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십자가에 내가 못박힌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나의 욕심과 정욕을 못박는 다는 것이다.

 

 

 

 

[갈5: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세상의 정욕과 탐심과 육체를 세상에 못박는가?

 

그것이 세상의 영이 가진 것이다.

 

세상의 영이 주는 것이다.

 

 

세상의 나라는 오직 정과 욕심이다.

 

길에 반대 되는 것이 십자가이다.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은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여신 예수님의 ,

 

세상의 원리와 힘의 논리가 아닌

 

오직 죽어야 사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믿고 다는 말이다.

 

 

 

 

 

오직 세상에 대하여, 세상의 힘과 세상의 권세에 대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박고 죽어야

 

반응하지 않아야 내가 산다는 것이다.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구원의 ,

 

세상의 원리가 아닌,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

 

힘으로 구원받고,

 

권세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죽음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 받고

 

예수님이 가신 삶과 죽음의 길이 오직 영생의 길임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그냥 한번 믿는다는 말로 결정 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다는 말은

 

믿음의 내용을 삶에 적용하고 살겠다는 것을 포함한다.

 

 

말로 믿는다하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다면 그곳에는

 

세상의 원리가 그대로 지배하는 곳이니

 

세상의 나라가 지배하는 세상 사람이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한다.

 

 

 

[약2: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더욱이 요한일서에서는 앞서 말한 원리를 그대로 설명한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것은 반대라고 말한다.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속에 없다 했다.

 

 

말은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하나님 나라의 ,

 

하나님의 원리를 믿지 않는 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은 세상에 속한 세상 나라의 논리며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속에서 일하지 않고 원리가 없으니 나라도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한다.

 

 

그래야 새로운 권세가 주어진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잃어버린 힘의 논리, 권세의 논리는

 

오직 죽어야 얻어지는 것으로 새롭게 창조하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 권세의 법칙 > 이다.

 

 

 

 

 

 

 

우리의 권세를 막는 마지막 능력이 무엇인가?

 

 

죽음이다.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반응이 없고

 

세상의 논리에 대하여 우리가 영향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죽음의 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논리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세상의 힘에 대하여, 권세에 대하여, 영광에 대하여

 

반응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도 불사하고 죽음의 십자가를 선택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을 없다.

 

죽지 않고 믿음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죽음을 믿으면 동일한 효과를 주시도록 하셨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증명 되어야 한다.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반응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논리, , 권세, 영광에 대하여 반응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죽음으로 얻은 믿음이 있음을

 

세상에 대하여 반응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사랑으로 증명하라 했고,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형제들에 대하여 반응하라 했다.

 

 

 

[약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울러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칠 믿음을 증명했다 했다.

 

 

 

 

[약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믿음은 증명이 필요하다.

 

 

만약 예수님의 한편 강도처럼 당장 숨이 넘어가는 시간에는 믿음의 증명이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삶으로 증명 되어야한다.

 

그것이 진짜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받았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길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고

 

나의 삶을 통해,

 

내가 먼저 제자됨으로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면 되는 것이다.

 

 

제자는 제자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원리만 기억하면 된다.

 

 

 

 

 

 

하늘의 권세는 내가 죽을 얻어 진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안에 산다면

 

성령께서 놀라운 권세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힘을 가지려 아담과 하와는 정말 죽었다.

 

영생을 잃었고, 하나님 나라를 잃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시 새로운 영적,

 

하나님나라의 법은

 

세상의 앞에 죽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다.

 

 

죽음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권세의 법칙이다.

 

 

 

 

죽어야 힘을 얻는다.

 

죽어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권세를 얻는다.

 

버려야 권세를 얻게 된다.

 

 

 

 

요셉을 기억하라.

 

그는 욕심의 유혹앞에 자신을 죽였다.

 

 

아브라함을 기억하라.

 

그는 이삭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버렸다.

 

 

모세를 기억하라.

 

그는 힘을 내려 놓을때 하나님이 쓰셨다.

 

 

여호수아를 기억하라.

 

신을 벗었다.

 

 

 

다윗을 기억하라.

 

사울 앞에서 칼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

 

 

 

 

권세는 세상의 앞에 나를 내려 놓아야 하나님이 높이신다.

 

요셉은 하나님이 총리로 높이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높이셨다.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장본인이 되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정복자가 되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섰다.

 

 

 

그리고 당신이다.

 

 

 

 

당신은 무엇을 내려 놓을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죽음으로 증명해야 한다.

 

믿음은 죽음으로 증명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의 논리에 죽어야 권세를 주신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길이 없고 오직 그분의 방법,

 

피와 죽음과 십자가로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는다면 세상에 대하여 죽으라.

 

그래야 자녀가 되고,

 

죄를 사하시며

 

기도의 능력을 받으며

 

오는 세상에서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부활의 영광을 얻으며

 

영원이 새롭게 다가오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된다.

 

 

 

 

 

 

땅에서의 삶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권세를 맛보는 곳이다.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로 주어지는 진정한 능력과 권세를 맛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다.

 

 

 

 

당신에게 세상에 대하여 죽는 권세를 먼저 경험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고 세상에 대하여 죽은 우리에게

 

놀라운 권세로 새롭게 하실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세상에 대해 죽지 않으면

 

죽음이 계속 나에게 노릇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병에 대한 두려움

 

사는 것에 대한 염려가 찾아와서

 

결국 사망에 매임바 되어 진정한 평화가 찾아 오지 못한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거나

 

세상에 대하여 맛을 아는 사람은

 

영생에 대한 확신과

 

하늘의 마음 기쁨과 평화가 오지 못하며

 

하늘의 권세를 결코 가지지 못한다.

 

 

 

 

 

 

 

 

 

 

앞에 이야기한 배경에서 산상수훈을 생각해 보자.

 

 

 

팔복의 이야기는 모두 세상에서 힘을 가지거나 권세를 가진 자가 결코 가질수 없는 마음이다.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과연 세상에서 힘과 권세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인가?

 

 

 

 

 

구제와 금식과 기도와 보물등을 이야기하셨는데

 

모든 것의 전제는 < 사람에게 보이려고 > 이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의를 세우며

 

의로 힘과 권력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보여서 힘과 권력으로 승화하려는 우리의 심성을 파악하고 있다.

 

 

 

 

모두다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이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권세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영은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힘으로 잡아서

 

권세와 능력을 잡으라고 한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능력을 원하는가?

 

 

 

 

그럼 죽어라!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