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회복 6편
예배! 너희는 모르고 예배하고 우리는 알고 예배한다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원래 창조된 사람은 예배가 필요 없었다.
이미 삶이 예배이고,
경배이고,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돌림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훈련이다.
잃어버린 예배,
하나님을 경배하는 연습, 훈련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삶은 예배가 필요 없다.
이미 하나님과 하나이고,
삶 자체가 예배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회복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예배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의 법도를 가르치셨고,
예배하는 법을 알게 하셨다.
그것이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르치시는 구약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완전한 예배를 위하여 불 완전한 예배를 통해 훈련하는 것이다.
완전한 나라에서 드릴 예배의 맛을 이 땅에서 보는 것이다.
그럼 왜 예배가 중요한가?
예배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배는 십일조와 같다.
무슨 말인가?
십일조의 의미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다.
믿음이다.
하나님이 나의 삶과 생명과 모든 것의 주인이며 그분이 나에게 주셨다는 고백으로서의 시간이 예배이다.
타락 전에는 십일조가 필요 없다.
아니 십일조는 선악과를 먹지 않음이다.
믿음의 증명을 보이는 것이 십일조이다.
마찬가지로 선악과는 믿음 있음의 증명이다.
마찬가지로 예배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그분의 백성들의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 만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 교제를 갖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세상 나라로부터의 분리이며
하나님을 경험한 자만 드리는 믿음의 증명이다.
문제는 이 예배는 구약에서는 형식이었다.
본질이 없는 그림자였다.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자 예표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늘 교통하며 교제하며 하나님을 항시 예배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 상태가 파괴되고,
예배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영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 예배의 상태를 완전하게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완전한 예배,
완전한 연합의 상태를 원하신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그 상태가 어렵다.
그래서 제사를 통해 완전한 회복을 향한 맛보기를 한 것이 구약의 예배이다.
믿음을 잃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니 예배는 오직 세상 영을 향한 예배이다.
세상의 영은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모든 우상을 만들어 사람으로 예배하게 한다.
구약은 그 예배의 대상에 대한 싸움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회복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도록 나아가는 역사가 성경의 역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며 제일계명을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셨다.
첫번째가 문제가 생기면 다른 모든 것이 문제가 생긴다.
예배의 대상이 달라지니 모든 인생의 목적과 방향도 달라지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문제는 믿음의 상실로 예배, 경배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이것을 바로 잡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인간의 회복이다.
예배의 대상을 명확하게 찾고 예배가 회복될 때 우리의 모든 것이 충만한 가운데 이른다.
그리서 하나님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이스라엘과 애굽의 모습을 만드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 백년 동안 종살이 하는 가운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는 목적을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3: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을 부르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제사, 예배드림이 목적이다.
원래의 목적으로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의 종에서,
세상의 종에서 부르시는 것이다.
섬길 자를 바로 찾고,
예배의 대상을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이다.
그러나 사람은 예배의 대상,
섬김의 대상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사람을 가만히 두면 그 사라진 감각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
원래 사람은 무언가를 섬기며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어졌기에
하나님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라도 섬기고 예배하는 존재다.
그 대상이 하나님에 대해서 감각이 사라졌기에 어떤 것이라도 섬기기를 원하는 본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원래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
왜?
애굽과 하나님의 대조처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원래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자,
세상 나라에 사는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하는 자로 세우심이 하나님의 역사라 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우상을 섬기는 자, 세상 영을 섬기는 자에서
인생의 원래 섬길 자,
예배할 대상을 찾는 것으로 회복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고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창12:7-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 오실 때는 반드시 사명을 가지고 찾아오신다.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 사명을 이루어 가는 삶이 곧 행복이다.
사람은 원래 예배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후 하나님을 찾을 수도 예배할 수도 없는데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예배의 욕구가 생긴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어떤 대상을 향하여 예배하고 섬기는 존재를 만드는 인간이
하나님,
예배의 핵심이자,
섬김의 대상인 하나님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예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어떤 것이라도 무지하게 예배하게 된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갔다가 더디오자
아론이 미쳤다.
바로 자신들의 하나님을 송아지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는 그 우상에게 예배한다.
[출32:8]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왜 사람은 우상을 만드나?
본질이,
사람의 본성이,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우리 세포 속에는 무언가를 예배하는 구조가 있다.
그런데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니 그 어떤 것이라도 우상으로 섬기려 한다.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하려 한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은
그 본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이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고 예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의 본성에서 나왔다.
그 본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본성의 방향을 바꾸어 주신 것이다.
[출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풀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기 전에 원래 섬기던 하나님 자신을 먼저 언급하신다.
사람이 원래 섬기고, 경배하고, 예배하던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이끌어낸 전능의 하나님,
원래 너희가 예배하던 그 하나님이니
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예배하지 말며, 절하지 말며,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예배의 대상,
섬김의 대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선지자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대상을 회복하는 역사가 선지자의 역사이다.
자 엘리야를 보자.
그가 갈멜산에서 850대 1로 싸움을 한다.
그가 한 내용이 뭔가?
왜 삼 년 반 동안 가뭄이 있고, 갈멜산에서 이런 싸움을 벌이는가?
싸움을 시작하는 때에 엘리야가 백성들을 향한 이야기 속에 그 답이 나온다.
[왕상18:20-21]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무엇과 무엇의 싸움인가?
하나님과 바알의 싸움이다.
하나님과 세상의 싸움이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냐, 세상 우상이냐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인생을 돌아보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도 동일한 이야기이다.
[수24: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안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기적들, 사건들을 통해서 인식시키고
그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 예배의 대상으로 회복하게 하시고
세상의 영은 계속 우상을 섬기며,
끝없는 죽음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회복, 섬길 자에 대한 회복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회복이다.
원래 예배하던 자에게 예배하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찾아주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은 끝까지 세상이 좋고, 세상이 매력적이며
보암직도, 먹음직도하다고 세상을 유혹한다.
세상의 영의 이름은 거짓말 하는 자요,
살인자라 했다.
[요8: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단은 사람을 죽인, 영생에서 아담과 하와를 죽인 살인자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세상의 영은 오직 거짓으로 자신을 섬기게 하고, 예배하게 한다.
모든 것이 거짓이다.
말로 속이고, 사람을 영원한 불에 죽이게 만드는 살인자이다.
사단의 습성은, 본성은 거짓이다.
처음부터 거짓이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속이며,
일시적 쾌락이 영원한 것처럼 속이는 자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처럼 사람의 영혼도 죽이는 살인자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 예배의 대상을 속이는 자, 살인자인 우상, 사단으로 대한다.
섬김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물질, 세상의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자는 세상 영의 자식으로 보고 심판하신다 했다.
[계21: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거짓은 사단의 속성이다.
속이는 것은 사단이다.
우리속에 그 속성이 살아서 믿는다 하면서 거짓을 일삼는다.
결코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삭개오는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재산의 반을 나누고 속이고 토색한 것은 네배나 갚겠다고 결심하고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
[눅19: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거짓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세상의 영이 떠날 때 가장 크게 나타나는 외적인 특징은
거짓에서 떠난 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거짓은 예배와 상관이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영이 거짓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영이 다르면 예배가 회복된다.
육체의 문제는 영의 문제에 기인한다.
육체적 문제는 영적으로 해결해야 그 답을 얻는다.
인간의 문제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생기니 육체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속했을 때는 하늘의 것을 말하고 예배하며
사람이 세상의 영에 속했을 때는 세상의 것을 말하고 세상의 것을 예배한다.
[요일4:5-6]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예배하는지 모르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영으로 만나자는 무엇을 예배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섬기며 예배한다.
[고후10: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속한 영과 하나님께 속한 영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영이 다르니 말도 다르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매지 말라 했다.
영이 다르면 육체도, 목적도, 방향도,
섬기는 대상도, 예배의 대상도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배를 어떻게 정의 했나 ?
하나님께 이 예배의 회복을 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참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영이 회복된 자.
하나님의 영으로 덧입은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요4:23]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영으로 덧입은 자를 하나님은 찾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적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영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요4: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
율법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진정한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왜?
하나님이 영이시다.
[요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기를 사람의 코에 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육체는 육체일 뿐이다.
동물이 예배하지 않는다.
동물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없다.
오직 이 땅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교제하고 예배를 통해 교제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분의 나라, 왕국을 잃어버린 것이다.
원래 사람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영이 믿음의 상실로 사라졌다.
그래서 참된 예배가 사라졌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하나님과 사람의 길을 여셨다.
이제 그분은 그분께 오는 자들을 받으시며 예배를 받으신다.
문제가 생겼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내셨으나 영이 없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과 연합되며 하나되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 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야한다.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께로 가야한다고 했다.
그것이 의라 했다.
[요16: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가 회복되어야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서는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셔야
창세기의 그 영,
사람 속에 있던 그 생령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이다.
성령은 오실 수 밖에 없다.
왜?
우리의 온전한 예배를 위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삶,
영원히 예배하는 삶을 위해,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늘도 다시 가시고
성령이,
보혜사가 오셔야만 하는 것이다.
이분이 오셔야 영으로 예배하는 완전한 길이 열리는 것이다.
[요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성령과 함께 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래 인간의 예배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예배,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 하지 않는 예배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완전한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예배의 회복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하나님이 다시 보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
성령의 임재 가운데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이다.
이 예배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셨고,
타락 전에 사람의 영적 상태로 회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회복을 원하신다.
섬길 자를 섬기며
예배할 자를 예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류역사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애굽 종 되었던 백성들을 자유케 하시는 목적은 예배하는 백성이다.
그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게 함이 목적이다.
성령은 원래 우리에게 있었고,
그 성령을 회복하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막연하게
예배는 당연하게 드려야 하는 의식이 아니다.
원래 우리가 드리던 섬김과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럼 성령만 받으면 에배가 되는 것인가?
성령, 영으로만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예배의 조건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성령으로 드리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내용이다.
그럼 두번째는 무엇인가?
그렇다.
진리이다.
둘째로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요4: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진리가 빠진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그럼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17: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영생의 길로 걷지 못한다.
진리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거룩이다.
예수님도 스스로 거룩하게 하신다 했다.
[요17: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거룩하지 않은자가 세상을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원래 거룩하셨다.
천사도 알고,
[눅1:35]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사단도 안다.
[눅4: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분은 본체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이 땅에서 육체를 입으시고 사셨다.
그러나 그분은 거룩이시다.
그럼
왜 그분의 거룩함이 필요한가?
왜 그분은 거룩한 상태로 오셨고 거룩의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을 가셨는가?
구약에서 제사의 모든 예는 거룩이다.
거룩을 위하여 피가 필요하다.
흠없는 제물로,
즉 거룩한 피로 모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을 거룩하게 한다.
그래서 제사에 쓰이는 모든 것은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하였다.
피를 뿌림으로 거룩하게 하였다.
[출29:21]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거룩한 것으로 거룩하게 한다.
흠 없는 제물로,
즉 거룩한 제물로 예배드리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모형이다.
왜 예수님이 거룩하셔야 하는가?
거룩케할 대상을 위해서 스스로 거룩하지 않으면 거룩하게 못하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거룩하니 그 거룩으로 그를 따라오는 모든 자가 거룩하여 지는 것이다.
[요17: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히7:26]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히10:10]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피는 거룩이다.
생명이다.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
죄 없으신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약에서 수 없이 드리던 그 수 많은 제사를 폐하시고
완전한 거룩으로 영생의 길을 내어
그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를 거룩하게 하여 흠이 없도록 하시는 것이다.
왜 거룩이 필요한가?
거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분 스스로 거룩하시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히13: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벧전1: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유1:20]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계4: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계20: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을 통하여 거룩한 것이다.
거룩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길에 갈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설수 없다.
이 거룩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중요하며
거룩의 이름은 영광스런 이름이다.
천사도 사도들도 거룩함을 너무 많이 강조하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 거룩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된것이다.
왜 갑자기 진리를 이야기하다가 거룩을 이야기 하는가?
이것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거룩을 이루어 내신 그리스도가 진리이며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된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히 순종하셨고,
한 말씀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면 안 하셨고 안 행하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말씀에 따른 예수그리스도가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진리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때 자유하게 된다.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1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배는
하나님이 영이시니
영, 성령을 입은 자만 하나님을 알며 예배한다.
영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지도 인식도 하지 못한다.
그이 떠난 인간에게 성령께서 다시 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셨고 그것이 의다.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조명해주시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며 경배하며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의 본체는 그리스도시며
그분이 진리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진리시다.
예배는 성령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게 된 백성,
성령의 거룩을 입은 자만이 드리는 회복된 백성만의 특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 예배의 회복은 하나님의 창세 이후 바램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자 회복의 시작점이다.
우리는 예배를 쉽게 생각한다.
드려도 되고 안되면 말고~
아니다.
하나님은 이 예배의 회복을 위해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이 땅에서 거룩으로 지키셨고,
거룩한 피로 우리를 위해 피 뿌림을 흘리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살아난 영으로 창세 당시 드리던 예배를 회복케 하시는 것이다.
길을 내신 거룩한 그리스도,
거룩의 길을 가게 하는 보혜사 성령!
거룩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다.
거룩한 자만이 참여하는 영원한 안식!
기억하는가?
하나님께 육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칠일째 쉬게 하셨다.
누가 쉴 수 있는가?
[창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을 예표한다.
영원한 안식은 거룩한 백성만이 쉴 수 있는 날이다.
아무나 거룩한 안식을 맞지 못한다.
모세가 선 곳 거룩한 땅!
왜 모세를 부르실 때, 여호수아를 전쟁에 보내실 때 신을 벗으라 하셨나?
거룩이다.
거룩한 나라를 위해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다.
예수님의 거룩을 모세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예배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거룩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거룩을 원하셨다.
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나?
지팡이 두 번 두드려서?
열 내어서?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아서 그렇다.
[민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거룩하여야 만이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그 완전한 거룩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시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로 거룩하게 하셔서 예배드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이다.
그 모든 지혜를 내시며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완벽한 종합 작품이
우리와 함께하는 예배이다.
이 한편의 예배를 위해 하나님은 전부를 솟아 부으셨다.
구약의 수 천 년의 그림자, 모형을 통하여
우둔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준비케 하시고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준비케 하셨다.
그리고 거룩하신 그분이 거룩한 영으로 정결케하시고,
스스로 거룩의 길을 피 뿌림으로 회복하셨고,
우리로 그 뒤를 따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
거룩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이 예배이다.
예배를 쉽게 여기지 말라.
이 한번의 영원한 예배를 위해 하나님은 너무도 많은 댓가를 치루셨다.
그리고 그 예배의 회복을 위해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중보 하시고
하나님은 지금까지 일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원한 예배를 위해 일하시는 중이시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