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회복 2편- 믿음!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세상과 좋은 것,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다.
그리고 그 세상을 사람이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람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움직인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사명, 뜻을 좇아 세상을 다스린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믿음과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사람의 믿음과 사랑 사이에 사단이 들어왔다.
그 사단은 오직 한가지를 가져갔다.
믿음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인류최초로 도둑맞은 것이고,
잃어버린 것이고,
사람에게 사라진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고,
연결하는 생명줄이었고,
대화의 통로였다.
믿음은 생명의 통로이다.
그 믿음을 사단은 노렸고,
결국 믿음 상실로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믿음이 사라지니
첫째, 영생이 날라갔다.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졌다.
셋째, 사람과의 관계가 문제가 생겼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도록 된 존재였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세상을 주시고 위임하셨다.
그런데 사람에게 힘을 주자
사단은 그 힘을 빼앗기 위해 믿음을 빼앗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원래 인간은 중간에 어떤 것을 통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믿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난 후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막연하게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뿐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한다.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인간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먼저 영생이 사라졌다.
정영 죽으리라 하셨다.
믿음의 결과는 영생이다.
원래 하나님은 믿음의 존재로 사람을 창조했으나 그 믿음이 사라지면 인간은 그저 흙이다.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믿음의 존재가 믿음이 사라지니 그냥 껍데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영생하는 인간이 이제
믿음의 상실로 흙으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의미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존재의 가치는 믿음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믿음이 사라지면 존재가치는 없다.
누군가가 나를 믿는 만큼 나의 존재 가치는 결정되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시니 나의 존재가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신 것처럼
그분을 믿을 때 하나되며 연합되고 사랑 안에 거하는 생명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속성이 영생, 영원으로 존재 받은 우리가 그 영생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영생이다.
우리도 그 속성을 닮아 영생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영생의 생명줄인 믿음을 잃어버리니 영생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보였다.
그분의 지혜가 보였고,
그분의 성품이 보였고,
그분의 영광이 보였다.
그러나 믿음이 사라지면 오직 자신만이 보인다.
자신의 부끄러움,
자신의 욕망,
오직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아내의 존재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껍데기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 앞에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되고
그 부끄러움 앞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음성으로가 아니라 숨고 싶은 자신의 욕망이 보이는 것이다.
다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아담과 하와가 믿음이 상실되니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된다.
믿음은 감정을 초월한다.
그러나 믿음이 사라지면 감정에 매이게 된다.
상대방의 입장이 아닌 내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각한 것을 느끼지 못할 때 믿음은 사라진다.
믿음의 회복은 하나님이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하나님을 알 수도, 발견하고 찾을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 만이 스스로 나타나셔야 하고 계시하셔야 하고
자신을 드러내셔야 볼 수 있다.
믿음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세계가 보인다.
사람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고 찾고 교제할 수 있었으나
한번 믿음이 사라지고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 없으니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주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의 길, 믿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믿음이 회복되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의 실체가 보이고,
느껴진다.
그러나 이미 믿음에서 한번 떨어진 사람은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방황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믿음에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왜 믿음이 필요한가?
왜 믿어야 하는가?
왜 믿음을 그렇게 강조하는가?
영생은 오직 믿음으로만 회복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잃어버린 나라이다.
그 나라의 회복은 오직 믿음으로만 회복되어지는 나라이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모든 것은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이 회복되고,
믿음이 필요한 이유,
성경이 모든 부분에 있어서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믿음의 분실,
믿음 상실,
믿음 없음,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이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나
사람과 동등됨을 취하면서 사람으로서 잃어버린 그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본,
믿음의 길을 가신 것이다.
사람으로서 회복해야 할 그 믿음의 길을 예수님이 먼저,
첫 아담이 실패한 그 믿음의 길을
둘째 아담으로 온전하게 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어떠한 상황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가는 수준, 분량을 말한다.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십자가 일지라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을 회복하신 것이다.
사람으로!!!
우리는 이미 믿음을 잃어 보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느끼지도 볼 수도 없다 했다.
그래서 그 길을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셔서
그 믿음의 길을 따라 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믿음의 길을 내신 첫 사람이다.
산상수훈에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아니 좀더 명확하게 말하면
세상의 논리, 세상의 원리로 보면 절대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원리를 말씀하셨다.
이길을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을 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 믿음의 길 > 이다.
그래서 산상수훈 5-7장을 끝내고
8장부터 믿음의 이야기가 수 없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보고 만지고 경험하라는 것이다.
실체를 보고
이제 믿고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믿음으로 통한다.
믿음이 회복될 때 영생이 회복된다.
믿음이 회복될 때 하나님이 보인다.
믿음으로만 오직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아담과 하와가 믿음을 잃어버리니
반드시 그 믿음을 회복하는 역사를 만드신다.
오직 사람을 통하여,
사람이 그 길을 갈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뭐든지 다 하신다.
뭘 위해서?
믿음이 생기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신다.
우리의 부와 ,
우리의 형통은 오직 믿음으로 세우기 위한 방편이다.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고통도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를
우리 인생의 목적인양 살아간다.
우리 인생의 행복의 전부인양 살아간다.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믿음을 위해 서야 한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간단하다.
인간은 세상의 논리에 잡혀있다.
세포 속에 이미 힘을 가지려 하고 권력을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왕이 되려는 병에 결려있다.
그런데 그 병은 오직
아픔, 고통으로만 치유된다.
세상나라에 형통은 병이다.
세상 나라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고질병으로 취급 받는다.
하나님이 세상 나라에 내 놓은 하나님 나라의 대안은
세상 나라의 가장 취약한 것,
바로
낮아짐,
겸손,
섬김이다.
그런데 이 대안, 처방은 인간 스스로 절대 가기 힘든 좁은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의 모습은 바로 이
낮아짐,
섬김,
겸손의 삶인데
세상의 사람은 절대 이 길을 가지 못한다.
세상과 반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병은 고질적으로 높아지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으려는 병이다.
그 병의 치유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만이 해결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믿음의 길을 여셔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섬김과
낮아짐과
겸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사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그런 삶을 산 사람의 마지막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십일 광야 금식과 시험을 지났음을 기억해라.
사람,
세상 병을 물든 인간은 절대 고통, 아픔이 아니면
낮은 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다른 말로 세상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아픔이고 고통이고 광야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지혜이다.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인가?
참 놀랍다.
세상의 논리, 세상의 원리가 절대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십자가 이다.
세상은 절대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지 못한다.
세상은 절대 남을 위해 섬기지 못한다.
세상은 절대 낮아지지 못한다.
그 모든 하나님 나라의 집약체가 바로
< 십자가 > 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온전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기인한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신 것이다.
그 길을 우리가 따라 가는 것이 믿음의 길, 신앙함이다.
왜 구약에는 그렇게 기적이 많은가?
사람들이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니 하나님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해야한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만들지 못하는 여러 일들을 일어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때로 아픔의 긴 시간을 지나게도 하신다.
기적의 필요는 믿음의 회복을 위함이다.
왜 새 신자들에게 기적이 많이 일어나는가?
믿음이다.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상상하기 어려운 기적을 보여주신다.
기도도 잘 응답 받게 하신다.
구약의 기적은 하나님의 기적?
그래서 구약 어디도 사람이 잘해서 기적이 일어나거나
사람의 공로를 나타내는 어떤 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왜?
사람은 자신의 공로가 드러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게 하셔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역사를 기대해야 한다.
그래서 힘을 빼야 하나님이 일하신다.
세상의 논리는 힘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원리는 힘을 빼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다 믿음을 위한 방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전 400년 동안 그런 영적인 암흑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체험이나 경험이나 기적을 보지 못했다.
왜 그렇게 암흑기를 보내게 하셨나?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 생각해보라.
전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기적이 눈만뜨면 어디를 가면 늘 있다고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례요한은 단지 마음의 준비,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응급이나 이야기가 없다가
사람들로부터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회개하라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나시면서 수 많은 기적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감각을 새롭게 하시고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찾아가실 때,
일어날 수 없는 기적,
물고기를 수없이 잡는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하신것이다.
기적은 오직 하나님을 믿게하는 방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적을 보여줘도 믿지 않는 백성은 어떻게 해야하나?
다시 광야다.
다시 어둠 가운데 사는 것이다.
영적으로 목마름이 있고,
가난한 심령의 사람들은 조그만 하나님의 기적, 작은 말씀 앞에
영적인 더듬이를 세운다.
그래서 그것이 무언가하여 하나님을 뜻을 찾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자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사 백년을 노예로 지내다
열 가지 기적을 통해 출애굽 하였다.
하나님의 의도, 왜 열 가지 재앙인지 백성들이 알았어야 하는데
무식하게 나오자마자 물이 없자 하나님을 의심했다.
그래서 그들은 망했다.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 애굽에서 산 시간이 사백년인것처럼
구약과 신약의 공백이 사백년이다.
예수님을 통해 기적들이 일어났다.
애굽 이스라엘 백성처럼 어디 열 가지 뿐이겠는가?
수 없는 기적을 예수님은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결과는 믿지 않았다.
보고도 믿지 않고,
만져도 믿지 않았다.
결과는 사망이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라는 것이다.
좋을 때 말씀 앞에 믿음으로 서야 한다.
믿어지지 않으면 울며 금식해야 한다.
나의 손해다.
내 가족이 망한다.
내 자손이 망한다.
믿음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일하신다.
믿음의 상실을 믿음의 회복으로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막6: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세상은 힘이다.
힘으로 할 수 없는 수,
힘으로 생각 할 수 없는 묘수를 내 놓은 것이 바로 믿음이다.
십자가이다.
세상은 절대 이해 못한다.
더더욱 힘을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
높은 자리에 있는 자.,
부자는 절대 이해 못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내 놓으신 것이다.
이것이
< 하나님의 지혜 > 이다.
믿음 있는 자의 특징
이 믿음이 있는 자의 특징이 무언지 아는가?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뭔지 아는가?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에 잡힌 자 들이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세상에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믿고 따르는 자라는 말이다.
말로 믿는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고백했다고 예수님의 가실 길,
영생의 길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는 것, 그것이 뭔가?
그것은 바로
첫째, 하나님의 새로운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나라를 심판하시고 부끄럽게 하시려고 내 놓으신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논리란
첫째는 죽는 것이다.
믿음의 최 절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한번도 죽어보지 않았지만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부활시키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믿음을 따라 십자에게 우리도 함께 죽는 것이다.
나의 정과 욕을 못박아 함께 죽는 것이다.
내가 죽는 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다음에 또 할 기회가 있겠지만,
하나님께 반응 하고 내 육체에 세상의 논리에 반응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붙들고 속고 살았던 세상의 논리에 일체 반응하지 않고 오직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죽는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다.
이렇게 죽고 난 사람은 세상의 법칙, 세상의 논리에 반응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반응 하는 사람이 되는데 그 원리가 무엇인가?
둘째, 예수님이 걸어가신 원리를 내가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산상수훈에서 말한
빛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없는 상태, 삶을 말한다.
그 원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이 완전은 이미 온전의 법칙에서 설명하였다.
참고하기 바란다.
간단히 설명하면
세상의 영으로 할 수 없는 영적인 삶을 말하는데
그것인 하나님의 원리로 사는 것이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다른 의를 말한다.
그것이 뭔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낮아지고, 겸손하고, 섬기는 것이다.
축복이 어디 있는가?
낮아지는 곳에 있다.
축복이 어디 있는가?
겸손한 곳에 있다.
축복이 어디 있는가?
섬기는 곳에 있다.
섬김이 축복이고,
낮아짐이 축복이며,
겸손함이 축복이다.
세상의 영, 세상 사람, 세상 나라는 절대 할 수 없는 영적인 자리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잡고 사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이것을 한다.
믿음이 있으니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으로 염려하지 않는다.
외식하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않는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고,
일부러 금식하고 표시 내지 않는다.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않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목숨 걸지 않는다.
비판하지 않으며,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좁을 길을 찾아서 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특징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믿음이 아니면 절대 회복 할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 우리의 삶이다.
산상수훈의 결론을 무엇으로 내는가?
나무는 열매로 안다 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선지자를 삼가라 했고, 속이는 자라 했다.
무엇을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보고!
믿음이 무엇이라했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 했다.
그대로 사는 것이라 했다.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함이다.
거짓은 뭔가?
나쁜 나무는 뭔가?
오직 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힘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그곳에는 믿음이 없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없다 .
[마7:20-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세상의 사람들, 즉 세상에 여전히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주의 이름으로 일을 하지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힘이다.
선지자 노릇이나,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나, 많은 권능은 힘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힘은 주의 이름으로 할 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그것은 겸손이다.
낮아짐이다.
섬김이다.
왜 예수님은 굳이
< 불법 >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나?
이것은 법을 어김을 말한다.
그들의 삶이 예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원리, 예수님의 삶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법이 전혀 없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 법을 세우셨다.
그 법은 세상의 힘의 논리가 아닌
죽음과 섬김과 겸손과 낮아짐을 말한다.
그것이 산상수훈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다.
죽으시고, 나귀를 타시고, 말구유에 나시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천한 곳에 거하시며 거할 곳이 없으신 삶, 그 원리를 말한다.
그런데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새로 만드신 하나님 나라의 법을 모르고
귀신을 쫓아내도,
선지자 노릇 즉, 목사 선교사로 살아도,
많은 기적과 권능을 행해도
예수님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떠나가라고 하신다.
주여 주여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 많이 하지 않아도,
예배를 많이 드리지 못해도,
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고
말없이 묵묵하게
겸손의 나귀를 타고, 낮은 자들과 함께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
좋은 나무로 좋은 열매는 맺는 사람이고,
빛과 소금의 행함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말한다.
믿음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아는 자이다.
이 원리를 모를 진대 어찌 믿음의 길을 가신 믿음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알며
믿음으로 산다 말하는가?
믿음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영적 원리, 하나님 나라의 원리의 이름이 믿음이다.
믿음이 상실되자 어떤 증세가 나타났는가?
아담과 하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하다고 해놓고는
자기가 잘났고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말한다.
자기 중심적 자기애가 나타난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기도 하지만,
자기 사랑이다.
자기애이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의 행복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애를 죽이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애를 최고로 여긴다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다.
오직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막8: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 대한 믿음에서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이 성숙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가 가진 것이 뭔가?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이 있었다.
그것도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1편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위해 민족과 자손과 땅과 복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것을 명확하게 알았다.
그가 120세때 믿음으로 이삭을 바칠 때는 이미 이 모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
[창22: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싸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함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믿음의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 일에 하나님 자신이 번제할 양을 준비하신다는
이중 복선을 깔고 말하고 있다.
이삭을 위한 번제 할 양과,
인류를 위한 번제 할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완전히 버렸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류가 갈,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죄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죄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계신가?
[요16:9]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믿지 않음이 죄다.
처음부터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 죄다.
그래서 예수님도 변함없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지 않음이 죄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믿음의 길을 여시고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몸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고,
믿음의 길,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는 말은
단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믿음을 말하기도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원리는
예수님이 사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의 길을 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겸손이며,
낮아짐이며
섬김이며
사랑이다.
세상의 영이 무엇을 가졌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 아담과 하와의 믿음을 빼앗았는가?
힘을 가지기 위해
뺏은 것이
< 믿음 > 이다.
믿음을 빼앗고 세상의 영이 가진 것은 힘이다.
힘의 논리이다.
높아짐이다.
스스로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다.
사랑이나
섬김이나
낮아짐이나
겸손은 찾아보기 힘든 곳이 세상의 영이 다스리는 세상나라이다.
그래서 세상의 나라는 믿음이 없어도 산다.
믿음이 아니어도 자기애만 있으면 되는 곳이다.
말세의 특징의 첫번째가 자기사랑이다.
[딤후3:1-2]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만 중요하다.
섬기고 베풀고 사랑하고 위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세상 역사는 왕들의 역사라 했다.
누가 힘이 세어 왕이 될 것인가가 그들의 역사라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도 그들은 세상의 왕으로 세우려 했다.
세상의 왕국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소리에 무엇이라 했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이땅을 해방할 왕을 여기고 좌우의 자리에 아들들을 앉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
[마20: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 주관자들과 높은 사람들은 마음대로 힘을 쓰는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높은 자는 섬기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세상의 힘에 논리가 아니라
세상의 힘에 논리를 부끄럽게 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시고 사신 것이다.
그것이 < 섬기고 자신을 주심 >이다.
세상은 힘에 의해서 서열이 정해진다.
목회자도 목회자를 서로 만나면 일년 헌금이 얼마고 교인수가 얼만지부터 묻는다고 한다.
왜?
그래야 서열이 정해지고 나의 위치가 정해져서 그렇다.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얼마나 섬기십니까?
얼마나 낮아지십니까?
얼마나 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십니까?
세상 나라는 힘있는 자가 주도하고 리더하고 힘을 쓰는 나라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데
그 원리의 핵심이 믿음이다.
믿음은 말로만 믿는다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신 삶의 원리,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세상 사람이 흉내내지 못하는 모습,
바로 섬김이고,
낮아짐이고,
자신을 주심이다.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신다.
< 오직 믿음 > 으로.
이것은 오직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죽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원리이다.
세상에 죽지 않으면
우리 세포세포속에 숨어 있는
높아짐에 대한 욕망과
자랑과
자기애가 너무 강하여 스스로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죽어야 사는 이 믿음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롬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영적 삶의 원리가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믿고
그 믿는바 대로 사는 삶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