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잡으려는 자와 자리를 내어주는 자!
(자리의 법칙)
[마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사람의 본성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스리는 자의 영적 본성이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역사이다.
세상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왕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 세상의 역사이다.
인류 역사는 세상의 왕들의 역사이다.
세상의 관심은 누가 왕이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가 더 나은 자리를 차지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세상은 자리가 중요하다.
세상의 영은 그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했고,
예수님을 유혹했다.
하나님의 자리,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본성이 세상의 본성이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얻으려고 했던것이 무엇인가?
자리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람에게 주셨다.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자리에 있다.
사단은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려하는데 오직 사람의 자리를 빼앗아야 가능함을 알기에
사람을 유혹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빼앗았다.
사단은 자리가 탐이 났다.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리에 지금도 앉아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자리를 차지하려 애쓴다.
자리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는다.
오직 자리, 높은자리, 권세의 자리, 힘을 쓰는 자리에 오르려 모든 것을 걸고 목숨도 건다.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이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한다.
세상속에는 오직 두 종류의 나라가 있다.
세상나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
세상나라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심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세상나라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도 이 자리를 놓고 흥정을 했다.
자리를 줄테니 내 밑으로 들어로라 했다.
[마4: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세상나라에 속해서 싸우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이 자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이 유일하게 서로 분내며 다툰 한가지는 이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함이다.
[10: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아무리 예수님의 수하에서 3년을 훈련 받아도 이 자리 때문에
가장 아끼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와서 청탁을 하고,
그로 인해 제자들이 화를 내고 분을 내게 된다.
시편 1편은 의인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했다.
자리는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준다.
의인은 의인의 자리에 있고,
악인은 악인의 자리에 있다.
[막12: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자리에 앉는다.
하나님의 자리에 예수님이 앉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어준 자리에 앉으신다.
[히10: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러나 세상의 영은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한 자리에 앉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좇겨나게 되고
허락지 아니한 세상에서 왕노릇 하려다 결국 망하게 된다.
[롬5: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사단의 최고의 힘은 사망이다.
사망이 우리의 왕자리에서 우리를 누르고 위협하고 협박하고 두렵게 한다.
그 자리에서 사망을 내리고 그리스도를 앉히는 것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 인생은 자리의 싸움이다.
신앙은 자리의 회복이다.
내가 앉은 자리,
내가 추구하는 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허락한 자리,
하나님이 예비한 자리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는 것이 우리 인생의 답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예수님은 세상의 자리를 내어주라 한다.
예수님은 원래 자리를 포기하고 세상에 내려왔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원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히셔서
모든 권세를 주시고 오고 오는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히셨다.
이것이 영적 원리이다.
자리는 내어주는 것이다.
자리는 내가 잡는다고 앉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다 버리고 자리를 던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마19:27-28]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도 자리를 버릴 때 새로운 영광의 보좌에 앉았다.
제자들도 모든 것을 버릴 때 그들은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게 된다.
세상은 자리를 차지하라한다.
그래야 높아진다고 여긴다.
그래야 힘이 있다고 믿게한다.
이 세상이 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자리를 내어주라한다.
자리를 버리고,
자리를 내어주고
자리에서 내려 앉으라 한다.
[눅14: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지금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리에 연연해 하는 사람은 마지막 영광보다
지금의 영광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영적인 원리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다.
자리를 내어주는 자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지금은 좀 고난을 당하고 지금은 좀 불편해도
나중의 영광을 위해 지금의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중의 영광을 믿기 때문이다.
[마20: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차이는 지금을 소중히 여기느냐 나중을 소중히 여기느냐다.
우리는 믿음을 현재로 여긴다.
믿음은 나중이다.
믿음은 나중에 하나님이 하실 것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의 것으로 나중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 것으로 지금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되어질 일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이다.
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고 소망 할 수 없는 중에 소망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현재형에서 미래형으로
< 시선의 옮김 > 이다.
그리 < 아니하실 지라도 > 의 믿음은
현재형을 포함한 미래형으로서 기대이며 소망이며 나중의 믿음이다.
천국은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서는 곳이다.
천국은 마치 포도원 품꾼을 들여보내려는 주인과 같다 했다.
이 비유가 무엇과 연결이 되는가?
바로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좌우의 자리를 내어줄 것을
요구하는 말씀 바로 앞에 있다.
이 두 아들의 어머니는 천국을 자리로 여겼다.
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아들들의 영광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자리가 아니라 이것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가 원하는
< 자리의 논리 > 에 잡힌
가장 쉽게 만나는 세상의 어머니 상이다.
이 요구에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첫째, 너희가 뭘 구하는지 알지 못하다 하셨다.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자리의 법칙을 알지 못하니 바로 앞에 예수님이 자리를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실것을
말하여도 알아 듣지 못한다는 말이다.
[마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이 세상의 자리의 논리에 잡히면 아무리 자리의 법칙을 말해도
그들은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둘째, 왜 너희가 자리를 결정하느냐는 것이다.
[마20: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자리는 하나님이 주신다.
우리가 자리를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해서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법칙,
원리를 따를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세상의 자리에 앉은 자는 권력으로 지배하고,
세력으로 백성을 누르는데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마20:25]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왕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을 내리누른다.
20:26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
그래서 예수님은 자리를 구하여도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고,
자리를 원해도 하나님이 자리를 주시는데 그 자리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자리의 법칙,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자리의 원리를 따를 때 만이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원리를 말씀하신다.
셋째, 섬기는 자리, 종의 자리에 있으라 말씀하신다.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자리를 원할 때 같이 자리를 차지 하려한다.
맞다.
우리는 그들과 동일하게 자리에 목이 마른 세상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자리를 내어줄 때,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종으로 세상을 섬길 때 진정한 자리가 하늘에서 온다고 말씀하신다.
먼저 온 자들은 자리를 요구한다.
먼저 온 자들은 먼저 온 권리를 요구한다.
이것은 세상의 영이 만든 논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자리의 논리는
먼저 온 자가 아니라 먼저 온 자로서의 자리와 권리와 자리를 버리는 자가
높은 자리에 앉고
으뜸이 되며
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큰 자인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
말구유,
나귀,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 앉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 자리의 법칙 > 이다.
세상은 자리를 잡으려고 시작된 것이다.
세상의 영은 자리를 잡으려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고 성공했다.
세상은 이 자리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다.
자리는 곧 힘이다.
세상의 법칙, 세상의 논리에 정 반대되는 논리인
자리의 법칙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천국은 나에게 없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 포도원 품꾼을 포도원에 보내는 주인이라 했다.
주인은 세상의 자리의 논리에 의해 부르지 않는다.
오직 자리를 버리고 자신의 요구를 내려 놓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서는 곳이 천국이다.
그래서 주인이 원하는 자리의 법칙을 아는 자가 천국에 기쁨으로 서는 것이다.
[마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자리의 논리가 아니라 나중 온 자나 먼저 온 자나 자신의 요구,
권리의 시각이 아니라
먼저나 나중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법칙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 본문 20장은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자리를 요구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먼저 온 자들에게
천국은 먼저 온 권리나 자리를 따지는 자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먼저 왔으니 나중 온 자들을 더 섬기고 베풀고 나누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면 천국은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연이어 나오는 이야기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이다.
자리의 논리이다.
예수님과 가까운 두 제자의 어머니는 가까우니 가까운 자리에 앉기를 청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세력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백성을 누르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자리의 법칙은
먼저된 자가 먼저 온 자리를 내어주고,
큰 사람일 수록 더 많이 낮은 자리에 내려갈 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래서 예수님이 이 자리의 법칙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고
그래서 자신이 가장 큰 자이기 때문에 가장 큰 고통,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많이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마태복음 20장은 오늘 28절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어진 이야기들이다.
아울러 이 이야기 후에 바로 여리고 소경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가 놀랍다.
섬김은 무엇인가?
하찮은 자들, 섬기지 않아도 되는 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포도원의 품꾼들에게,
한시간 남은 시간에 볼품없고 힘없는 그들에게
천국의 자리를 내어주는 마음이다.
여리고를 떠나가는 소경 둘이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자 예수님은
하잖은 그들을 향하여 물으신다.
수 많은 군중들이 따를 때 볼 수도 없고 왜면해도 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큰자로서 작은자, 볼품없고 포도원에 5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못한
자격없는 그들을 향하여 얼굴을 향하여 자리를 내어주시는 물음을 물으시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에게 따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마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이 마음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다.
자리를 내어주고
큰 자로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를 섬기는 마음.
천국의 자리를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자리를 내어주라.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먼저 된 자로 권리와 자리를 요구하지 않고
도리어 권리를 포기하고,
자리를 보잘것 없는 소경에게,
소자에게 내어주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삶으로 보여주신
천국의 자리의 법칙이다.
오늘 본문 후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나?
이 자리의 법칙을 더욱 명확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나귀새끼를 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자리의 법칙의 최절정 이야기이다.
[마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이 자리를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세상의 자리에 앉지 않으셨다.
오직 사람도 눕지 않는 말구유에 누으셨고,
아무도 타지 않는 나귀 새끼의 등에 앉으셨다.
우리는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자리,
사람들이 앉고 싶어하는 자리,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고 환호 받는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경은 이 자리의 법칙을 수없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자리의 논리에 눈이 먼 우리는 성경의 이 이야기들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20장 21장에 걸쳐 이어지는 이 자리의 법칙은 19장에서도 이미 설명하고 있다.
천국은 어린아이같은 사람이 들어 간다고 하시고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결론은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결론을 내고 20장으로 넘어간다.
무슨 말인가?
어린아이같은 사람이 천국의 사람이다?
어린 아이는 자리가 없다.
자기 자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내어줘야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아이들이다.
자기의 권리를 자기의 먼저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따를 뿐이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뭔가?
하나님도 알고 천국도 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권리- 부자됨-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먼저 된 부자가 나중 된 가난한 자들에게 이 섬김의 법칙,
자리의 법칙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먼저 되었지만 이 자리의 법칙을 모르고 포도원에 들어오고,
부자가 되고,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에 있다 해도
나중된 자가 되고,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 보다 어려운가?
이 자리의 법칙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섬김의 자리에 있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신,
모범의 삶,
천국백성의 삶,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자리를 내어주고,
더 많이 가졌기에 더 많이 섬기고
더 높기에 더 낮아지는 이 자리의 법칙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다면
누구든지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마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내가 부자냐 어른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 자리의 법칙을 알고 지키느냐가 문제이다.
우리의 본성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이것은 세상의 영의 본성이다.
세상의 영은 이 자리를 차지하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다.
이 일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우리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리를 향하여 분내며 다투는 세상을 향하여
자리의 법칙,
높을 수록 더욱 낮아지며 많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인도하시고 요구하신다.
세상의 영의 유혹은 우리 인생을 걸로 수 많은 자리로 유혹한다.
그러나 그 곳에는 나중 된 자리만 남는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라.
나의 자리를 내려 놓으라.
내가 가고 싶은 자리,
내가 갖고 싶은 권력을 이용하여
철저히 섬기는 자리,
보잘 것 없는 소경에게,
한 시간 전에도 포도원에 들어오지 못할 자격 없는 자들에게
나의 마음을 주며
천국의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