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역설
(마태복음16:23)
[마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하셨다.
빛을 만드셨고,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바다와 궁창을 만드시며
온갖 우주만물과 자연의 순환과
숨쉬며 호흡하는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셨다.
그 만드신 것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법칙이 존재한다.
우주와 자연의 순환을 위해 원칙을 만드셨다.
힘 있는 자가 세상을 다스리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거느리도록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힘을 부여했으며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능력이고 힘이시고 우주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고 만드신 세상을 사람에게 위임하셔서
사람으로 온 세상을 주관하고 통치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순리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람에게 위임되었으며 사람이 가장 상위 권위가 되도록 하셨다.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은 자연스런 질서가 생기고
이 질서가 정해진 법칙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도록 창조되어졌다.
그런데 그때에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단이 들어 왔다.
왜 사단은 사람에게 왔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세상을 만드시고 그것을 모두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사람에게 힘을 주고,
사람에게 권력을 주고,
사람에게 자리를 주고
사람에게 위치를 주고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셨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사람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빼앗는 방법,
모든 하나님의 원리의 집약체인 사람만 뺏으면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단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사람을 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원리와 핵심과 상징은 바로 사람이었다.
그 사람만 사단이 자기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전부를
나아가 하나님의 원리와 하나님자신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마침내 사람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 여자인가?
사단은 왜 여자부터 유혹을 하기 시작했는가?
사단은 알았다.
아담은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아담이 가장 약한 것으로 접근 한 것이다.
아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잡으면 아담이 넘어 올 것을 알았다.
아담에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유혹하기 쉽고,
아담을 넘어지게 하기 좋은 것이 뭔가?
바로 아담 자신의 분신이요 가장 사랑하는 것 바로 아내이다.
사단은 언제나 그 사람의 강한 것으로 찾아 오지 않고 약한 것으로 찾아온다.
약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약한 것을 넘어지게 한다.
아담에게 약함은 힘이 아니다.
힘은 하나님이 주실 만큼 주셨다.
약함은 바로 아내인 하와이다.
그래서 사단은 아담이 없는 사이 하와를 유혹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은 사단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라
아내 즉 하와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벌로 아담이 사단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사단과 원수가 되게 한다고 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로 사단과 원수가 되게 하셨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도 이 여자의 후손으로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역설은 시작이 된다.
우주만물, 자연역사 속에 가장 마지막에 만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여자이다.
가장 필요에 의해서 가장 소중한 아담의 뼈로 만든 여자!
그 여자는 남자의 돕는 자로 주셨다.
여자의 존재는 남자의 부족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의 세가지 조건을 이루기 위해
돕는 자로 주셨다.
그래서 아담은 그 하나님이 하와를 주신 존재 목적을 믿었다.
그래서 사단은 그 믿음을 알았기에
여자를 먼저 유혹했고
여자는 자신을 믿는 남자에게 선악과를 주어 먹게 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사단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라
아담은 하와, 여자에게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사단은 사람의 가장 약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
그래서 약한 쪽으로 끊임없이 파고든다.
사람의 약함은 여자였다.
여자의 약한 쪽으로 유혹을 했고 그래서 넘어갔다.
여자가 무엇이 약한가?
여자의 본능이 무엇인가?
여자의 가장 약한 본능은
첫째 희생하려는 욕구가 있다.
여자의 존재 목적 자체가 돕는 것이다.
희생이다.
남자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다. 돕는 것이다.
둘째는 사랑 받으려는 욕구가 있다.
여자는 돕기 위해 존재하지만 도움의 힘은 사랑이다.
남자의 사랑을 먹을 때 여자는 희생하고 돕는 자로 살게 된다.
여자의 이뻐지고 싶은 것은 다 사랑 받으려는 욕구, 본능에 충실 한 것이다.
여자가 거울을 보고, 옷을 사고, 외모를 꾸미는 것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사랑 받으려는 본능이다.
여자는 삶 자체가 희생이다.
그러나 그 희생을 떠받치는 기둥은 남자의 사랑이다.
여자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여자가 가장 불행한 때는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이다.
그때 절망하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여자가 이뻐지려는 욕구가 사라진다는 말은
삶의 목적을 상실 했다는 말과 같다.
여자의 삶의 목적은 이뻐지고 싶은 본능과 함께 움직인다.
셋째는 함께 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여자는 절대 혼자 있지 못한다.
함께 하도록 만들어졌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여자는 병든 여자이다.
창조질서 속에 여자는 함께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것이 남자가 아니어도 본능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 한다.
늘 혼자이고 방에 혼자 있는 여자는 어딘가 마음에 병이 있다.
여자는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충만함을 느낀다.
그래서 여자는 자기가 먹은 선악과를
남자에게 주고 함께 하고 싶은 본능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말로 채움을 받으려는 욕구가 있다.
창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주었더니 가장 먼저
말로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한다.
여자는 평생 이 말을 잊을 수 없다.
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싶고 인정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여자는 말에 약하다.
환경이 아니라 말에 모든 것을 거는 존재가 여자이다.
스스로의 존재는 말에 의해 좌지 우지 될 수 있는 존재가 여자라는 것이다.
그자는 말로 채움을 받고 말로 존재가치를 느끼는 존재가 여자이다.
그래서 여자는 말에 약하다.
사단은 그 약함을 정확하게 안다.
그래서 여자에게 말로 유혹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류 창조의 가장 약함을 사단은 정확하게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했다.
사단은 결국 여자를 통해서 아담을 유혹했고
아담과 하와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세상의 영에 빼앗긴 것이다.
세상의 창조 질서가 파괴되었다.
힘을 가지기 위해, 세상을 가지기 위해
사단의 전략은 성공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다.
힘있는 자가 되었고,
세상의 권력을 가졌고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을 정복함으로 세상이 그의 밑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이제 세상은 힘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가진 것,
높은 곳,
힘있는 것에 그 방향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생각 할 것은 사단이 인간에게 유혹한 말에서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갈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세상이 어떤 논리로
세상이 어떤 원리와 원칙으로 흘러갈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잘 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것이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열심히 하는 것으로 세상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사단이 어떤 말로 유혹했고
앞으로 세상이 어떤 논리와 원리로 역사가 진행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사단이 한 네 가지 말이 곧 세상 역사를 예견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사람을 유혹했나?
첫째는 죽지 않는다 했다.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인류의 역사는 죽지 않으려는 인간의 역사를 보여준다.
인간은 영생불사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수 많은 종교가 나오고 죽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심으로 살게 된다.
모든 불교가 그렇다.
성불해서 부처가 되어 영생의 삶을 추구한다.
인류는 수없이 죽지 않으려고 연구하고 노력하고 수고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순간부터 이미 죽은 자들이고
죽어가는 상태이다.
둘째는 눈이 밝아진다 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원어로 보면 눈이 뜨인다 했다. 눈이 열린다 했다.
눈이 열리는 일이 인류역사에 있게 된다.
바로 이성주의,
합리주의 ,
개몽주의 등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넘어진 것이 뭔가?
열 정탐꾼과 이스라엘의 실수가 무엇인가?
바로 이성과 합리이다.
어느 길로 가면 좋을지, 어느 성으로 가면 좋을지 찾아 보자는 것이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모르던 어떤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모르던 길을 한번 가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는 길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글을 모르던 아이가 글을 익히면 안보이던 글자들이 눈에 들어와 눈이 뜨이는 것이다.
인류는 이성과 합리로 인해 믿음의 길이 막혀버리게 된다.
어설푼 과학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 눈이 열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악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선은 오직 하나님을 택함이 선이다.
하나님 자체가 선이시다.
하나님을 선택함이 선이다.
악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택하지 않는 모든 것이 악이다.
죄는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빗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죄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모든 죄와 악의 시작이다.
인간은 하나님만 택하던 존재에서 이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택하므로 악이 존재하게 된다.
선악을 아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 눈이 열려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택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때문에 하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아니라 다른 어떤 이유,
즉 나의 어떤 것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하는 모든 것이 악이다.
우주만물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 하나님을 선택함이 선이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택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했다.
[막10:18]~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인간이 눈이 밝아져 이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인간의 기준이 되어 선이 아닌 악을 택하는 존재가 될 것을 사단은 말했다.
셋째는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앞으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한다는 것을 말한다.
범신론적 합일주의를 말한다.
모든 불교의 뿌리이다.
어떤 궁극의 에너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이다.
모든 신비주의와 모든 종교의 바탕에는 해탈을 하며
도를 깨침을 통해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처럼 됨을 설득한다.
비단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힘을 가졌다 생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려한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계획하고 생각하고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속성인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아 보려하는 것이다.
인간은 배가 좀 부르면 왕이 된 것처럼 교만하고
인간은 돈이 좀 생기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여기고
인간은 권력이 주어지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착각한다.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려한다.
넷째, 선악을 알게 된다 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좋고 나쁨을 안다.
곧 율법주의, 인본주의, 도덕주의 등이 나온다는 말이다.
선악을 안다는 말은 좋고 나쁨을 안다는 것인데
선악의 본질은 하나님을 택하고 택하지 않음인데
인간은 하나님을 빼고 스스로 좋고 나쁨을 기준 삼는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나오고
도덕주의가 나오고
인본주의가 나오게 된다.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느냐로 선하다 악하다로 구분하는 오류를 범한다.
기독교는 얼마나 율법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느냐로 구원받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도덕종교가 아니다.
율법의 정도에 따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택하느냐 오직 믿음을 택하느냐로 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창세기에 인간을 찾아온 사단은 앞으로 자신의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자신의 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자신의 나라를
구해도 얻지 못하는 영생불사의 종교로
믿음이 아닌 합리와 이성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흉내 내며 하나님처럼 군림하고 살 것을 보여주고
힘이면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치 할 수 있을 것처럼 살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유일한 선악은 하나님을 택하느냐 택하지 않느냐인데
그것을 오해하여 율법주의와 도덕주의로 인간을 끊임없이 율법의 짐을 지워서
인간으로 고통하고 갈등하고 번뇌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사단이 인간에게 말한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4장에서
인류의 역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가인과 아벨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라멕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인간의 일생 참조)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역설이 나온다.
창조와 인류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에 의해서 지어졌다.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며 통치하는 것이다.
그 힘에 순복하며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고 통치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사단이 그 힘을 오로지 자시의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하고
모든 것을 빼앗았다.
무엇이 하나님의 역설인가?
앞으로 인류의 구원, 하나님의 원리는
권력이나 힘이 아닌 겸손과 낮음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류를 용서로 세상을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그 상징이 가죽 옷이다.
힘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 세상의 원리를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높음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권력이 아니라 소자를 소중이 여기는 나라로
사단이 가졌던 세상의 왕관이 아니라
저주받은 십자가의 면류관으로
세상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과 법칙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사단이 잡은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빼앗긴 세상은 힘의 법칙, 높음의 법칙, 강함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나,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는 나라는
힘이 아니라 겸손으로
높음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강함이 아니라 한없이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 의해서 다시 세우실 것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본성은 에덴동산 이후부터 이 법칙에 의해 유전자 배열이 되어있다.
세상은 자꾸만 높아지려는 것이 자연스럽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새롭게 세우신 나라에서는 그 법칙이 절대 통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의 법칙들은 모두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단이 절대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심어 놓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결코 이해되지도
설명되지도,
용납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세상의 영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에 데려다 성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데려가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었다.
[마4: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4: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왜 그게 가능한가?
이 세상의 꼭대기와 세상의 높은 곳은 마귀가 가진 것
마귀가 자기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곳에 데려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결국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세상은 이 욕심,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고 더 군림하려는 욕심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사단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시험하였으나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와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법칙을 너무나 잘 알고
그 원리와 법칙을 몸소 보이시고 세상에 심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에
그 마음을 지키시고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세상은 살기 위해 더 열심히 살지만
하나님 나라는 죽어야 산다.
[마10: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래서 이 원리의 첫 열매, 원리의 모범이 예수님이다.
[마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마귀는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말을 믿고
죽지 않기 위해서 사는 인생들을 향하여
죽어야 산다고 하나님의 역설을 말씀하신다.
[눅17: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사단의 첫 말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다.
죽음을 위해 목숨을 건 인류가 이제는 죽어야 영생을 얻도록 원리를 바꾸신 것이다.
이것이 사단의 첫 번째 말에 대한 하나님의 역설이다.
나를 죽여야,
나의 욕심, 나의 힘을 향한 노력, 율법을 지키려는 짐을 내려 놓을 때
거기에 생명이 있도록 하나님은 사단의 논리에 역설의 법칙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사단은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사람을 이용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죽이기로 하셨다.
[요10: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가짐이 아니라 버려야 이제는 얻어지도록 하셨다.
세상의 법칙을 완전히 뒤바꾸는 일대 혁명, 일대 대 역전,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요10: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왜 하나님이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셨는가?
이 위대한
< 새 창조의 역사 > ,
< 하나님의 역설 > 을 만드는
하나님의 새 원리를
몸소 첫 열매로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한없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셨다.
사단은 목숨을 걸고 힘을 가지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잡으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원리는 살기 위해 이제는 죽어야 되는 법칙을 만드셨다.
왜 이 법칙을 만드셨는가?
세상의 영은 결코 이 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은 잡으려는 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버리는 영이다.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
[눅14: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 예수님을 따른 자들의 새로운 법칙이 된 것이다.
가지려는 세상과 버리는 제자들!
이 싸움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니 버리지 못하고 잡으려는 사람들과 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싸움인 것이다.
하나님은 가능하면 버리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런데 세상에 속해버린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DNA구조 때문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싸우시고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날마다 그분의 보좌 앞에 울려 퍼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통해 그분의 역설의 원리를 그러내실 때는
먼저 그분의 원리를 심기 전에
세상의 원리를 버려야하는데
그 버림의 시간이 바로
광야이다.
하나님도 아파하시는 자녀들의 아픔을 허락하시고
그 아픔의 눈물의 대가를 통해
세상의 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체득하는 것이다.
세상은 죽지 않기 위해 산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산다.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뜻을 죽여야 우리는 살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이다.
두번째 세상의 논리는 눈이 밝아지는 것 눈이 뜨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역설의 원리를 말씀하시는가?
그렇다.
눈이 뜨이는 것은 이성과 합리에 눈을 뜨는 세상이다.
그 이성과 합리를 이기는 유일한 하나님의 역설은 바로
<오직 믿음 > 이다.
세상은 인류를 향하여 생각지도 못한 어떤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하여
사람의 눈이 뜨이게 만든다.
이성주의 계몽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 등등
수없이 새로운 눈 뜨임을 통하여 인간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도록 한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대안은
바로 믿음, 오직 믿음이다.
[롬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3: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주려는 것이 오직 믿음이다.
열심이 아니다.
어떤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새로운 창조의 원리는 믿음이다.
세상은 이 믿음을 보지 못하도록
모든 눈이 밝아지는 역사를 이룬다.
인류문명은 믿음을 저버리기 위한 세상 악한 영의 수고의 대가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하려한다
내가 일지 못하던 크고 놀라운 것을 맛보고 믿음이 아니라
세상에 눈뜨고 세상에 눈이 열려 그것에 전부를 거는
아담과 하와처럼 사는 인생이 된 것이다.
이 두 번째 사단의 논리에 대한 두 번째 하나님의 역설은
첫 번째 죽지 아니 하리라고 말한 세상 영의 미혹의 결과
영원히 죽게 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대안이다.
두 번째 대안을 따르면 첫 번째 문제인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된다.
믿음이 모든 것을 이긴다.
[막9:19]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예수님은 다른 것을 다 용서해도 믿음 없음은 용서하지 않으신다.
이유는?
사단이 준 세상의 원리를 이기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과 대안과 역설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에 믿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 할 수 없다.
[막6: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자신이 왕권이 아니라 말 구유에 나셨고,
그것을 본 고향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설의 복음을 전해도
그들이 믿지 않자
급기야 예수님은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이다.
그 은혜가 믿음이다.
세상방법으로 아무리 가도 이를 수 없는 목표보다
쉽고 간단하고 가벼운 방법을 줘도 믿지 못하는 세상을 주님은
이상히 여기시는 것이다.
맞다.
세상의 원리에 물든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눈을 뜬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이상한 사람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인 것이다.
세상은 열심히 땀 흘리고, 죽어라 노력해야 얻는 것을
믿음은 정말 말도 안되는 논리이고
비 이성적이고
비 합리적인데 그것을 믿으려니 세상 사람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라 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요
십자가가 부끄러움이다.
하나님의 보화는 밭에 있다.
이해 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낮은 곳에 있고
비천한 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있다.
논리적으로 내 머리로 이해 할 수 없는 길을 가라.
그곳에 하나님의 역설의 보화가 숨어 있다.
눈이 뜨이는 곳에 가지 말고
가기 싫은 곳,
다들 꺼려하는 일,
다들 멀리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라.
주어도 보상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라.
세상은 잡으라한다.
하나님은 버리라 한다.
세상은 왕이 되려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구유에 나셨다.
세상을 기적을 보이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택하셨다.
세상은 부하라 하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라며 네 가진 것을 나누라 한다.
세상은 받은 대로 앙갚음하라 하고
주님은 용서하라 하신다.
세상은 힘과 권력으로 강하라 하지만
예수님은 한 없이 약한 곳에 약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설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임한다.
고전1:27-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미련한 것을 통하여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고
천한 것, 멸시 받는 것을 통해 있는 것을 폐하시는 역설의 하나님!
고후6:8-10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되다.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무명한 자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없이 유명하며
세상은 우리가 죽는것처럼 보이나 우리가 영원히 살고
근심하는 자 같이 보이지만 늘 기뻐함이 있고
가난한 자 같은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하늘의 비밀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이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자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의 전부를 가진,
하나님의 역설의 원리를 가진 새로운 창조의 나라에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니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설로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니 내 영혼이 기뻐한다.
믿음이 사단이 주는 세상에 눈뜬 장님, 죽은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역설의 원리이다.
이 믿음이 세상으로는 미련하나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셋째는 하나님처럼 되다는 사단의 말이다.
이 사단의 논리를 하나님은 어떤 역설의 논리로 우리를 이끄시는가?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셨다.
사단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흉내 내고
가지려 하고 죽어라 살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설의 원리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우리 안에 있는 이 놀라운 신비에 있게 하셨다.
[요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고전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세상의 영이 하나님과 단절시키며 하나님처럼 살게 했던 말도 안 되는 오류를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있고 그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됨의 신비를 허락하셨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처럼 되려는 사단의 속임으로
인류는 단 한번도 하나님처럼 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단의 논리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연합하게 하셨고
하나되게 하셨고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놀라운 새 역사를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하나님의 하나됨을
우리가 동참하며 하나되는 축복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런 신비가 어디 있는가?
사단이 주는 유혹 하나님처럼 된다고 각기 제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으나
하나님과 하나는 고사하고라도 고통만 더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삼위일체의 연합의 신비가 주를 믿는 우리에게도 찾아와 창조의 하나님과
하나되는 축복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엡4: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창조로부터 깨어진 하나님과 연합 하나님과 하나됨을 회복하였으니
이것을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단의 전략은 선악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역설로 우리에게 찾아 오셨는가?
그렇다.
바로 성령이시다.
선악을 알게 된다는 사단은 인류가 선인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 즉 악을 알게 하였다.
그 사단의 전략에 하나님은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주셨고
매 순간 어느 곳에서도 악이 아닌 선을 택할 수 있는 분별과 참 지혜를 주셨다.
성령이 아니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성령이 아니고는 참 선을 알 수 없다.
성령으로 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참 선을 알게 되어
선의 사람으로 살게 되다.
사단은 끊임없이 세상의 악함을 맛보게 하고
하나님이 아닌 합리와 율법주의와 모든 도덕과 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보지 못하도록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알고 말하며 증거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만을 구하고 찾고 선택하도록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단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아닌 악, 세상의 모든 것을 구하도록하였으나
성령이 내 안에 성전에 거하심으로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선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셨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선을 이루게 된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선의 열매를 맺게 하고 이런 것을 금지할 어떤 법도 세상에는 없다.
하나님은 새로운 법, 새로운 원리, 새로운 하나님의 역설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셨는가?
그렇다.
성령이 하나님의 이 역설들을 온전히 이루시는 영이시다.
우리와 함께하며
성령으로만이 믿음의 고백을 하며
성령으로만이 영생을 얻으며
성령으로만이 예수를 만나게 되며
성령으로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며
성령으로만이 선악 중에 선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고 말씀하셨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며
힘의 논리 가짐의 논리로 세상을 다스리며 이성과 합리로
영생불사로 미혹하며 인간의 역사를 이끌것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이 힘의 논리를 이기기 위해
힘이 아닌 섬김과 낮아짐 목숨을 얻음이 아닌 목숨을 버림으로
높아짐이 아닌 말구유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분의 새로운
< 하나님의 역설 > 을 말씀하셨고
< 새 영적 창조의 원리 > 를 세상에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 반대이다.
역설이다.
새로운 창조원리를 주셨다.
이것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영생을 맛보지 못하며
참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은 다 내게 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저 예수님께 오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새로운 < 하나님의 역설 > 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길이 아니면 다른 길이 없기에
예수님은 오직 좁은 길,
세상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고 길이 좁고 협착해서 찾기 힘든
이 좁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신다.
가본 사람만이 이 길의 참 기쁨을 안다.
그리고 이 가볍고 쉬운 길로 오지 못하는 자들을 초청하며 부르고 있다.
빼앗긴 세상,
빼앗긴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은 새 창조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사랑하는 친구여,
일어나 함께 가자.
세상의 힘과 권력과 잡을 수 없는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곳에서 내려와
강포와 악함과 위협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과 평안과 기쁨의 나라로 이제 일어나 함께 가자!
올라가던 그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가진 높은 성과 천하만국의 나라에서
이제 영원한 그분의 나라로 어서 오라
사랑하는 친구여~
[아4:8]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