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일생 - 모순의 법칙
[시144:3]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성경을 보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앞뒤 문맥 속에서 봐야 하고
둘째는 각 성경의 눈에서 봐야 하고
셋째는 전체 성경의 눈으로 본문을 봐야 한다.
성경의 한 구절은 한 구절자체로 볼 때 수 많은 오류와
각기 소견에 옮은 대로 해석하므로 오는 여러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한 사람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한가지 행동은 그 사람의 현재를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언어 습관이나 행동 양식은
그 사람의 전체 인생에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둘째는 가족관계나 공동체성의 이해 안에서 봐야 하고
셋째는 문화적 관점이나 국가적 의미에서 봐야 하고
넷째는 전 인류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지금 한 점을 떼어 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한 사람의 일생을 이해하는 것은 큰 것, 즉 인류적 문제로부터
개인의 성격에까지 이해되지 않으면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늘은 사람의 일생,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한다.
오늘 생각할 것은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인생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이 행복은
첫째 함께함이 행복이다.
먼저는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에덴동산이 뭔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할 수 있는 곳이 에덴동산이다.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이다.
사람은 창조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의 DNA자체가 하나님으로 행복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을 행복의 핵심인 하나님보다 다른 것으로 평생을 허비한다.
오늘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채우려한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만 행복하도록 창조 되었다.
행복의 두번째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이다.
사람의 행복은 딴 것이 아니다. 사람과 함께 할 때 행복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 세상을 만드시고 최초의 악이 뭔가?
최초로 가장 보기 싫은 것이 뭔가?
안좋은 것이 뭔가?
가장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 홀로 >이다.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게 보였다.
그래서 하와를 만드셔서 함께 하도록 하였고,
아담은 정말 좋아하고 행복해 했다.
하나님은 본질상 홀로, 외로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 문제가 생기는가? 혼자 있을 때이다.
혼자 있다는 외로움, 혼자 살기 위해 발버둥칠 때,
혼자 살려고 스스로 성을 쌓는 것이 그것이다.
혼자 있을 때 문제는 찾아온다.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좇겨났다.
그리고 그는 그 벌이 무서워 세상에서 사람과 사는 것이 무서워 혼자 성을 쌓았다.
이것이 문제를 더욱 야기시킨다.
혼자 있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진다
가나안 정복에서 문제가 무엇인가?
아간이다.
아간이 혼자 잘먹고 잘 살려고 혼자 물건을 훔쳤다.
하나님의 큰 영적일 물줄기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때 문제가 심각해지고 나 혼자가 아니라 다 죽이는 문제가 생긴다.
다윗이 언제 문제가 생겼나?
혼자 거닐다 여인을 보았다.
죄를 범할 기회는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더 많이 찾아 온다.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갖는 것이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혼자는 반드시 죄가 함께 한다.
에덴의 뜻이 무엇인가?
Eden은 "pleasure" 라는 뜻이다.
기쁨이라는 것이다. 즐거움 뭐 그런 뜻이다.
왜 기쁨인가?
인생의 기쁨이 뭔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사람과 함께 할 때 기쁨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함께를 회복할 때 찾아 온다.
하나님과 함께, 사람과 함께하는 회복이 진정한 기쁨이다.
아무리 돈을 벌고, 학벌이나 사업이 잘나가도
함께하는 < 더불어 > 의 삶이 회복되지 않으면 인생은 불행하게 된다.
현대의 수 많은 인기정상을 누리는 연애인들을 보라.
돈과 명예와 인기와 세상의 영광을 누려도
홀로 고립될 때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고립이 곧 죽음이다.
사람이 죽을 때 후회되는 것이 뭔지 아는가?
평생 살면서 누군가와 관계가 좋지 않은것,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만 생각이 난다.
좀더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다.
무슨 말인가?
다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함께하지 못한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사람의 함께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할 때 진정한 행복이 오도록 창조된 것이 인생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할 때 이다. 사명을 따라 살 때 이다.
다스리고, 지키고 할 때 행복이 있다.
왜 불행한가?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라 내 일을 하려니 불행하다.
만족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일은 일도 주시지만 장소, 울타리를 정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때 행복이 있다. (창1:28)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주시고 그 안에서 다스리고 지키라 했다. (창2:15)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주실 때 울타리를 정해 주신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함께 지역을 정해주신다.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이다.
일을 열심해 해도 행복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일을 따라 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 일을 찾고, 회복 할 때 우리는 행복해 지는 것이다.
사람이 은혜를 받을 시기는 말씀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는 시기, 말씀이 내 안에 충만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은 열망이 충만해진다.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내가 뭔가를 해서 창조적인 결과를 내지 않으면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집은 자고 일어나면 가구가 바뀌어있다.
여자가 뭔가 결과, 일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서 혼자서
이 가구 저기로 옮기고 저 가구 여기로 자꾸 옮기는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의 본능은 내가 어떤 것을 해서 반응이 오고
사람들이 일의 결과를 주목하고 반응할 때 생존의 기쁨을 느낀다.
하다못해 여자에게 어떤 것을 해서 작은 반응이 오면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을 가진다.
그래서 여자에게 이런 반응을 얻어내기 위해서 목숨걸고 일하는데
여자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삶의 의미를 못느끼고 불행하다 느끼고
내가 왜 살았나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진정한 일을 할 때,
진정한 사명을 만날 때 목숨을 걸고라도 일을 마치려 한다.
사도 바울을 보라.
[행20: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진정한 사명을 만나고 일을 만나면 사람은 목숨을 건다.
단지 그것을 못 만나서 행복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을 맛 본 자는 그 일에 목숨을 거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셋째는 말씀 안에 있는 것이 행복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은 말씀 안에 있는 것이라 정의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라 했다.
창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고 지킨다.
그런데 말씀이 내안에 머물지 않고 말씀이 나를 통해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행복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왜 말씀이라고 정의를 했나?
왜 하나님의 말씀이 행복인가?
어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 믿음을 전제한다.
어떤 남자가 한 꼬마에게 너 나랑 같이 가자라고 할 때
꼬마가 우리 아빠가 모르는 사람이랑 가지 말라고 했다라고 한다.
이 말은 어떤 남자보다 아빠의 말을 신뢰하고 아빠를 믿는 믿음이 있음을 전제한다.
행복을 주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전제할 때 말씀을 지킬 수 있다.
그 믿음이 사라지면 말씀은 단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다.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변함없이 사랑함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두렵지 않고,
무서워 하지 않는다.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과 무서움은 믿음이 사리질 때 찾아온다.
다른 말로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찾아오는 세상의 감정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 그들은
벗은 몸을 부끄러웠고,
하나님 얼굴 보는 것을 무서워했고,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불안해 했다.
이 모든 감정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감정들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감정들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이런 감정 속에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바로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오는 세상 악한 영의 감정이다.
우리는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
그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과 함께 할 때 찾아온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일, 사명을 감당 할 때 행복하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지킬 때 행복이 찾아오다.
말씀을 지킬 때 믿음이 다시 생기고 하나님의 감정인
평안과 위로가 찾아오는 것이다.
인간의 일생은 행복을 위해 창조 되었다 했다.
그런데 뱀의 유혹으로 인류는 죄가 들어왔다.
죄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 그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죄가 들어온다.
믿음이 잃어버린 결과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다.
선악과가 원인이 아니라 믿음을 잃음이 원인이고 죄가 들어 온 것이 결과다.
그래서 결국 행복도 사라진 것이다.
그럼 이 행복이 사라지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먼저는 인생은 고통이다.
인류의 시초는 행복이었다.
영생이었다.
풍요로움과 행복의 극치였다.
그러나 믿음을 잃고 나서 찾아온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그로 인한 결과는 고통이다.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다. 아이를 가지고 낳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
먼저 이것은 육체적 고통으로 이해해야 하지만
여자를 이해하면 그것은 단지 육체적 고통이 아니다.
그 고통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함이다.
여자가 평생에 가장 힘든 때는 아이를 낳을 때이다.
여자의 육체,
단지 육체로 볼 때 해산이다.
그러나 그 해산의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이 있다.
여자가 아이를 가지고 낳고 돌보는 이 시기는
평생 하나님과 가장 깊은 단절을 맛보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하나님이 여자에게 주신 믿음을 저버림에 대한 대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했다.
곧 고통이다.
여자의 최고의 고통은 해산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속에
하나님과 단절되는 진정한 고통이다.
남자는 어떠한가?
남자의 고통은 수고의 대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
일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고통이 왔다.
왜 그럴까?
모든 것을 다 주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는 고통을 받은 것이다.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수고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고통이 따른다.
땅은 엉겅퀴를 내고 일해도 일의 대가와 수고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고통에 고통이 가해진 것이다.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남자는 수고해야 먹을수 있으나 수고해도 수고의 대가를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한마디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인생은 고통으로 시작되었음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인생은 고통이다.
인간의 일생을 볼 때 이 전체적인 죄의 대가를 기억하고
인간의 일생을 생각해야 한다.
잉태와 자녀를 키우며 하나님과 단절된 고통을 당하는 여자와
하나님을 향한 집중보다 땅에서 죽어라 일해야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는,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
먹고 마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통이 남자에게 있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진 고통은
모두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교통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행복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즐거워해야 할 인간이
그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고통의 인생이 된 것이다.
첫번째 인간의 이해는 함께하지 못함으로 오는 고통이다.
행복의 첫번째 조건이 함께함이라 했다.
그런데 그 함께함이 사라지면 인간의 고통이 온 것이다.
인간은 고통하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함으로 오는 모든 창조의 원리가 엉켜서
수고를 해야 먹고 수고해도 그 수고만큼 대가를 얻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야 할 잉태와 자녀의 축복이
하나님과 영적인 단절을 통해 불행의 시간이 되는 고통이 주어진 것이다.
그럼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언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는가?
처음 잃어 버린 것을 찾는 것이 행복이다.
바로 하나님과의 재 결합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과 함께함, 즉 임마누엘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찾는 순간 인생은 행복하게 된다.
그 길이 믿음으로 얻는,
잃어 버렸던 믿음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때 인생은 다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일생 동안 이 행복을 찾는 싸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일생의 유일한 행복의 시작은 잃어버린 이 함께함을 회복하는 것임을 아셨다 .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대안과 방법이 임마누엘이다.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행복찾기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 함께함 > 이다.
우리는 행복의 원천인 하나님과 함께함을 죄로 말미암아 깨졌으나
그 깨어짐의 하나님의 대안은 바로 임마누엘, 예수그리스도이다.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재 연합을 통한 사귐을 통해 주어지는 이 행복을
찾느냐 못찾느냐의 시간이 바로 인간의 일생인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함을 위한 여행,
하나님과 함께하는 연습이 인간의 일생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하며 그들과 더불어 사는 천국의 삶을 회복함이
바로 인간의 일생,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 찾으면 인간의 삶은 행복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성경의 읽는 법이 세 단계인 것처럼
인간은 그저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몇 가지 원인으로 나오는 것처럼
인생도 그냥 한 인생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실타래 중에 한 가닥이다.
먼저, 인류적으로 봐야 하고
다음은 국가적으로 봐야 하고
다음은 가족, 친척 또는 조상의 배경을 봐야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을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두 번째 시각은 무엇인가?
행복의 둘째 조건이 사명이라 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 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일,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에덴을 지키고 다스리는 일을 주어질 때 참 행복한 삶이 유지 된다.
그것을 잃어버림으로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왔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때 인간의 일생은 행복으로 초대된다.
예배를 드릴 때 왜 행복한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나와 함께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 기도할 때 참 행복함을 느끼는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나와 함께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손목에 매고, 마음에 묵상하며, 암송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말씀되신 하나님을 내 안에 있게 해야 한다.
성령의 법칙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만이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만 거룩하여 진다.
성령의 일하시는 길을 내어야 한다.
이 땅에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오직 성령으로만 임마누엘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일생은 이 두 번째 행복의 조건을 찾는 것이다.
인간의 일생 두 번째는
참 일,
참 사명을 찾아 가는 삶이다.
행복의 두 번째 조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 사명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명,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해야 우리는 행복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명을 좇아야할 우리가
세상에 살게 되면서 세상의 원리를 좇아 가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사람들은 죄가 들어 오면서 세상의 따름을 좇아가도록 되었다.
사명을 따르고 하나님이 주신 일을 좇아 갈 때 사람은 행복하도록 지음 받았지만,
사람이 에덴을 떠나 세상에 살면서 사람은 세상의 법칙을 따르도록 유혹 받고
세상의 법칙 안에 갇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중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갑자기 제자들에게 질문을 한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사람들은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요한, 혹은 어떤 선지자라고 대답을 했다.
이때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자
베드로가 그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
왜 이 고백이 중요한가?
그거은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이 물으셨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가이샤랴 빌리보 지방은 헤롯대왕이 BC 20년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로 부터 선물로 받은 도시이다.
그후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을 자기의 수도로 만들어 최고의 도시로 만든 곳이
바로 가이샤랴 빌립보이다.
이곳은 세상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다.
바로 황제의 법칙, 힘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다.
힘 있는 자가 세상을 다스리고,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쥐게 되는 원리로 살아야 하는 곳,
바로 그 황제의 도시에서 베드로는 진정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므로 우리의 신앙과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장소인 것이다.
바로 세상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정한 원리를 역설하는 진정한 고백인 것이다.
그것을 기뻐하신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천국의 열쇠를 주며
하늘이 열리고 닫히는 축복을 주신 것이다.
이 고백의 원리는 다시 구약으로 올라간다.
바로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죽고 난 후 나은 아들들이다.
이것은 두 사람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을 대표하는 대표적 사람이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힘이다.
세상의 힘의 상징이 가인이다.
가인은 힘의 상징으로 세상을 살았고, 하나님의 주신 일이 아닌 스스로의 힘의 원리로
세상을 다스리고 살아가는 사람의 대표인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방식과 맞지 않아 하나님이 거부하자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아벨을
바로 자신이 가진 < 힘의 논리 > 로 죽인 것이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사건의 핵심이다.
단지 제사 한번으로 제사를 받고 안받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사람의 열매로 그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다.
그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의 열매를 결정한다.
가인의 삶의 모든 원리가 녹아 있는 제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므로 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이다.
그 악의 핵심 원리가 바로 < 힘 > 이었다.
그것에 대한 증명으로 가인은 힘으로 아벨을 죽였다.
그리고 세상은 더욱 악하여진다.
어떻게 아는가?
바로 라멕이다.
라멕이 뭐라고 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이나 나는 벌이 칠십칠배다라고 한다.
창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나님은 가인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가인을 보호하셨다.
그래서 가인을 하나님의 어떤 표로 보호하시고 그를 상하는 자를 벌을 칠배로 갚겠다고 하셨다.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의 원리보다 자신은 더욱 가혹하고 혹독하게 세상의 원리를 적용하고 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와 지키심의 원리보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다르시고 통치하겠다는 말이다.
라멕이 나은 아다와 씰라는 문명의 역사를 볼 때 가장 최고의 문명을 이루며
창대한 문화를 이루게 된다.
세상의 법칙으로 세상은 더욱 흥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힘의 원리는 사람을 보호를 위하여 존재한다.
힘은 권력이 아니라 보호이며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세상은 오직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위해 사람들을 통치하고
다스리는데 사용하게 된 것이다.
창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자신에게 조그만 상처와 상함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나타난다.
내 감정, 내 삶의 원리에 아픔을 주는 모든 것은 가인처럼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세상의 황제의 법칙, 힘의 법칙으로 세상은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그렇게 가치있게 보시는가?
인류의 역사는 아담 이후에 가인과 아벨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가인의 후손 즉 세상의 사람들은
오직 < 힘의 법칙 > ,
오직 < 황제의 법칙 > 으로 통치되고 다스리며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 힘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세상은 바로 그 힘으로 정복되고 다스리고 움직이는
< 힘의 세상 > 이
된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세상의 원리에 정 반대되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원리를 고백하는 참 고백이 된 것이다.
이 고백이 있는 마태복음 16장의 시작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원한 것이 있다.
바로
< 하늘로부터의 표적 > 을 구하였다.
마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세상은 하나님을 향하여 오직 힘의 논리를 구한다.
힘의 원리를 보여주기 원하고
힘으로 되는 세상을 끊임없이 찾고 찾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움직이는 힘의 원리가 아니라
바로 < 죽음의 원리 > 를 보여주셨다.
마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기억해야한다.
힘의 원리에 사로 잡힌 자들은 힘을 보여줘도 더 큰 힘에 목마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가셨다.
힘에 맛을 본 자는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힘이 없어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증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힘의 원리에 잡힌 자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원리로 그 목마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죽음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다.
가인 앞에 힘 없는 아벨의 죽음은
어그러진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힘의 법칙의 유일한 대안은
오직 < 그리스도의 죽음 > 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여기서 < 하나님의 모순 > 이 나오는 것이다.
힘은 힘이 아니라
오직 죽음으로 힘을 이기고
왕의 보좌는 왕관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면류관이 이기는 것이다.
높은 자리는 낮은 자리에 있어야 높아지고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 여기는 자는
오직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강함이 가장 약한 것으로 이기고
세상의 저주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우리의 약함을 통해 세상의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다.
율법의 완벽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이 모순이
바로
< 하나님의 지혜 > 인 것이다.
가인과 라멕으로 흘러오는 인류의 목적은 오직
힘을 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세상을 만드신 원칙인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분의 인류를 향한 역사는 진행이 되는 것이다.
창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세상이 하나님의 대안인 아벨을 죽여도 그분은 아벨 대신 다른 씨(예수)를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이며 그 아들 에노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완성을 진행하신다.
무슨 말인가?
인류의 원리는 힘이다.
힘으로 지배되고 힘을 가지기 위해 삶의 목적을 두는 곳이 세상이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힘을 가지기 위한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와 말씀의 법칙을 따르는 자들을 통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바로 이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나셨고
거처할 곳도 없으셨고
주리시고 목이 마른 자들과 함께하시며
세상에서 죄인들이라 손가락질 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셨다.
그럼 여기서 사람은 왜 그렇게 힘을 추구하는가?
사람은 힘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만드셨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이것을 다스릴 수 있는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 하나님의 형상대로 > 이다.
사람은 그 어떤 모양대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있는 어떤 리더쉽과 권위와 능력 즉 힘을 부여 받았다.
사람은 힘이 있다.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 힘이 하나님의 원리대로 사용되어져야 하는데
오직 자신을 위하여 사용 되어질 때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이 믿음에 실패한 인류의 역사이다.
사람은 존재하는 한 힘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힘을 가지려고 하고
힘을 소유하고 누리려고 하게된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어떤 대안을 내 놓으셨나?
힘으로만 살게되는 세상에 하나님의 원리를 어떻게 심어야
에덴에서 있던 그 하나님의 원리와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게 할 수 있나를 고민 하셨다.
그것이 바로
< 하나님의 모순의 법칙 > 이다.
힘은 힘이 아니라
오직 죽음으로 힘을 이기고
왕의 보좌는 왕관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면류관이 이기는 것이다.
높은 자리는 낮은 자리에 있어야 높아지고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 여기는 자는
오직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강함이 가장 약한 것으로 이기고
세상의 저주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우리의 약함을 통해 세상의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다.
이미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사는 힘의 나라가 되었다.
그 힘의 논리, 황제의 논리, 힘의 법칙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순을 통하여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시 모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면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
그 하나님의 모순의 최고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이다.
세상은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힘의 논리로 볼 때 십자가는 힘이 없다.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을 힘이 있다.
[요19: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그 힘을 역 이용 하신 것이다.
힘은 힘으로 이기지 못하고 오직 십자가로 이긴다는 하나님의 원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마27:26]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세상은 힘을 쓰지 않는 예수님을 버리고
힘있는 바라바를 놓아 주었다.
세상의 논리로 볼 때 바라바가 그들에게 더욱 매력적이고 멋지고 힘있어 보인 것이다.
세상의 정의는 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십자가이다.
오직 십자가 만이 하나님의 정의고 힘이고 능력으로 정하신 것이다.
[골2:15]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것은 십자가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했다.
[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 만을 알기고 작정하였다.
[고전2: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세상의 왕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왕은 십자가에 있다.
[요19:15]~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오직 세상은 힘을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왕을 십자가의 예수로 세우셨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낮은 곳에 있다.
겸손에 있다.
[빌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는가?
그것이 세상의 힘을 이기는 하나님의 유일한 지혜이다.
세상의 힘에 대항하고 세상의 힘의 논리를 이기는 하나님의 영적원리는
오직 낮아짐, 겸손, 복종 곧 십자가이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세상을 이기셨다 말씀하신다.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는 힘으로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로 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세상을 이기는 힘은 각자의 십자가이다.
[눅9: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만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버려야 얻고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십자가를 져야 영광의 면류관이 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나님은 나를 낫게 여기고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어야 하늘의 높은 영광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은 힘의 원리로 사는 이 세상에 주신 유일한 대안은
< 모순의 법칙 > 이다.
우리가 언제 행복해지며 언제 마음의 풍요함을 누리게 되는가?
언제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행복의 극치를 누리게 되는가?
하나님이 주신 일, 사명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고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지금껏 살아온 평생을 돌아보라.
잡으려고 쥐려고
힘을 한번 써보려고 죽으라고 달려왔지만
정말 그곳에 하늘의 평강이 있다고 믿는가?
세상은 그렇다고 끊임없이 유혹 할 것이다.
예수님에게 마귀가 시험 했듯이
한번 세상에서 멋지게 힘을 보여보라는 것이다.
힘을 한번 잡아 보라는 것이다.
너를 위해 기적을 한번 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세상의 논리이다.
세상의 힘의 법칙이다.
우리의 일과 사명은 그 힘을 잡는 것, 돈을 잡는 것, 권력을 잡는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일을 찾아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진정으로 찾아야 하늘의 평화와 평강이 내려온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낮은 곳에 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주신 사명,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주신 행복의 두번째 대안이 뭔가?
첫번째가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세상에 충만한 것이다.
그것이 깨지자 예수님은 다른 사명을 주셨다.
무엇인가?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로운 사명 복음전파이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세상을 주셨다.
그런데 그 세상을 다스리는 자격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두번째 행복을 위한 조건 사명, 일의 시작은 그 세상을 다시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세상을 예수님께 주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다시 찾았다.
예수님이 아니면 세상을 다시 정복하고 다스릴 수 없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 라는 말은
잃어 버린 그 세상을 예수님이 찾은 것을 말씀한다.
그리고 그 세상속에 우리를 향하여 행복찾기의 두번째인
하나님이 주신 일,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향한 사명을 다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다시 행복을 찾는 하나님의 대안 두번째이다.
이 두번째는 놀랍게 두번째를 하면 첫번째인 하나님과 함께함이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게 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 아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시 회복해야 행복하게 된다.
개인으로 뭐무는 사명,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의 전부를 이 사명을 감당할 때 다시 찾아오시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이 이 두번째 사명을 회복하므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누리기 바란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셋째로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의 축복은 말씀 안에 있음이다.
말씀의 울타리가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말씀과 상관없는 삶,
말씀이 허락하지 않는 삶이 곧 불행이다.
말씀으로 그은 선을 넘어가면 곧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고통이 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행복의 울타리가 된다.
그것을 잃어 버릴 때 인간은 세상을 방황하는 존재가 된다.
말씀 안에 있도록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그 어떤 성경의 인물도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행복과 평안함이 없었다.
말씀이 올 때 말씀을 받아 들이고 따른 다는 것은 믿음을 전제한다.
왜 말씀이 와도 말씀을 따르지 못하나?
참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말씀이 믿어지게 하라.
그것이 숙제이다.
말씀이 믿어지면 우리가 말씀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내 삶의 성결과 행위가 이렇게 될 수는 없다.
삶의 다른 무엇보다
말씀이 나를 보게 하고
말씀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말씀이 일하게 하라.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인지 묻는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힘들어 한다.
자 예를 들어
일단 결심하라.
아침마다 내가 말씀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암송하지 않으면
결코 밥도 먹지 않고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라.
그 결심을 지키라.
그리고 말씀이 하나라도 마음에 다가오고 깨달아지도록 집중해서 보라.
그리고 그 말씀을 하루 종에 입에서 중얼거리고 외우고 생각하라.
이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결코 말씀 안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처음 성경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말씀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한 말씀이라도 말씀에 근거해서 지키고 나면 말씀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살아난다.
그렇게 하나씩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다 보면
말씀이 내 생각과 마음에서 작용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작용이 올 때 말씀이 원하는 대로 가면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다.
오래된 신자들?
이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동일하게 죄의 자리에 있게 되면
말씀은 내 안에서 죽어버리게 된다.
말씀의 선을 넘어버리게 된다.
그럼 내 안에 평안은 없다.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떠나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없게 된다 - 하면
늘 동일하게 부담을 주시는 것이 있다.
그것을 다시 회복해야한다.
그것이 아니면 결코 주 앞에 서기 힘들다.
할 수 있다면
말씀이 강력한(^^)사람 옆에 붙어 있으라.
말씀으로 강력하게 내 인생을 조명하고
말씀으로 강력하게 나를 훈련 시키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어 가는 곳에 있으라.
그래서 교회는 중요하고
지도자는 너무나 중요하다.
스스로 혼자는 너무 나약한데 강력한 말씀의 장소에서는 그 약한 사람이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씀은 얼마나 강력한지 죽었던 영혼도 소생시킬 뿐 아니라
에스겔의 마른 뼈들도 소생시킨다.
은혜가 있는 곳에 주기적으로 가고
말씀이 강력하게 나를 붙드는 예배는 목숨 걸고 지키라.
이것이 내 인생에서 사라지면
내 영혼도 행복을 누리기 힘들다.
자 세번째 행복은 말씀이라 했다.
그런데 말씀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주신 대안이 무엇인가?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신다.
인간이 말씀을 붙들 힘이 없으심을!
그래서 세번째 대안으로 하나님은 < 성령 > 을 주셨다.
구약의 율법이 아닌 신약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
그 성령의 말씀이 우리안에 있을 때 우리는 행복찾기가 가능해 진다.
인류를 향한 가장 축복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성령이다.
성령을 따르다.
그것이 인간의 일생을 가장 행복하게 이끄는 핵심이다.
정리해보자.
인간의 일생은 원래 말씀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명, 일을 할 때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 했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라 했다.
그런데 이것을 향하는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세상은 고통이다. 아픔이다.
내가 원해도 세상은 우리를 고통가운데 머무르게 한다.
육체 자체가 고통이고
세상의 원리가 힘으로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 고통의 세상에서 인간의 일생은 행복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와 같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각 사람의 케이스마다 어떻게 봐야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에 있는지를 보려고 시작했는데
마무리하는 시점에
인간의 보편적 행복과 고통 그리고 그 대안만을 살펴보았다.
나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 행복은 인간의 일생을 볼 때 누구나 추구하지만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나 간단히 쉽게
우리에게 그 행복의 길을 제시한다.
첫번째 행복의 조건이 함께함인데 그 대안으로 임마누엘을 주셨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행복을 찾으라.
두번째 행복의 조건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명이라 했다.
그것을 놓치자 온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에 회복될 때 인간의 일생은 행복이 찾아온다.
두번째를 회복하면 첫째도 회복하게 된다.
세번째가 말씀이 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다.
그런데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남으로 행복은 깨어지고 세상에서 세상의 감정속에 불안하게 살아야한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성령을 주셨다.
말씀의 울타리, 말씀으로 인도하는 주체자이며, 우리를 도우시는 자로 성령을 주셨다.
성령을 따를 때 우리는 첫번째도 회복하게되고 두번째인 사명도 이룰 수 있고
세번째인 성령안에서 살게 된다.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가 더 깊은 행복으로 나아가도록 알지 못하는 비밀들을 성령안에 숨겨두셨다.
성령을 따르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일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고통가운데 살고 싶은가?
하나님의 모순의 법칙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원리가 네 안에 온전히 있게 하라.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복은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