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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법칙 6 - 이끄심의 법칙

성령의 법칙 6 - 이끄심의 법칙

 

 

 

 

 

 

 

성령의 법칙 6 - 이끄심의 법칙

(누가복음4 1)

 

 

 

[눅4: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성령하나님은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견인하신다.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

 

성령의 법안에 들어왔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인데

 

성령으로 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스스로 살지 않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삶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과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영이시다.

 

 

 

 

 

 

성령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이끄심이다.

 

성령의 여섯번째 법칙은

 

바로 < 이끄심의 법칙 > 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고 마음을 아신다 했다.

 

 

 

 

[고전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래서 성령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하시는데

 

중요한 특징 하나는 우리를 이끄심이다.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땅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성령께서 이끌어

 

광야로 가게 하셨고 사십일 동안 시험 받게 하셨다.

 

 

 

시간을 지나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본격적으로 이루실 있기 때문에

 

성령은 일을 위하여 성령으로 이끌어 가셨다.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고

 

그리고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받으셔야하는가?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뜻을 수행하는 성령께서

 

시험의 대상자인 예수님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럼 성령을 예수님을 이끌어 가셔야만 했는가?

 

광야의 시험을 지나야 하고,

 

세가지 시험을 받으셔야 했는가?

 

 

 

 

 

첫째는 광야인가?

 

 

 

그것은 깊은 의미들이 많이 있지만 가볍게 생각 것은 환경의 조건이다.

 

 

 

예수님은 인류의 첫사람이 실패한 실패를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께서 완벽하게 성공해야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있고

 

따를 있는 분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넘지 못한 문제를 예수님이 넘지 못하고 시험에 이기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사역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 광야의 시험은 내신 성적이다.

 

내신이 좋지 못하면 대학입학 원서도 내기 힘들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자격을 얻으시기 위해서

 

광야 사십일 시험과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자, 먼저 시험 받은 환경이다.

 

 

 

 

 

아담이 시험 받은 곳이 어디인가?

 

에덴동산이다.

 

 

 

그럼 예수님이 시험 받은 곳이 어디인가?

 

광야이다.

 

 

 

 

그럼 아담이 시험 받을 몸과 상태가 어떠 했나?

 

최상이다.

 

가장 좋은 가장 좋은 상태 마음 상태이다.

 

 

 

 

 

그럼 예수님이 시험 받을 상태는 어떠 했나?

 

최악이다.

 

가장 좋은 장소,

 

가장 좋은 상태이다.

 

 

 

 

 

인간이 가장 좋을 때와 가장 좋을 조건에서

 

아담과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고

 

결과를 보라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가장 좋은 환경에서 아담은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좋은 환경과 상태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셨다.

 

인간이 당할 있는 모든 시험을 이기신 것이다.

 

 

 

 

 

성령님은 시험의 환경을 최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이끄심이다.

 

 

 

 

 

때로 시험이 우리에게 아픔이나 어떤 목적,

 

십자가를 지기 위한 환경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성령은 사람을 사명을 이루기 위해 부르신다.

 

그리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광야를 지나게 하시는 것이다.

 

광야와 시험을 지나지 않으면

 

십자가를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사역을 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 가운데

 

때로 시험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그때 우리는 광야의 시간이나 성령의 시험을 이겨야 한다.

 

 

 

 

광야와 시험은 우리를 아프게 하거나 떨어뜨리려 함이 아니라

 

마귀에게 세상에게 우리의 자격을 보여주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를 부르시지 않는다.

 

설령 자격 없는 자를 부르셨다면 그에 맞는 자격의 조건을 만들어 가신다.

 

아브라함은 45년의 훈련과 시험과 광야를 통해 시험을 통과 하였다.

 

 

 

 

요셉은 13년의 시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자격을

 

시험과 아픔과 고난을 통하여 얻은 것이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들의 이름을 높이신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시험 받으셨나?

 

성령에게 이끌리어 무엇을 시험 받으셨나?

 

 

 

 

시험의 내용이다.

 

 

 

아담이 받은 시험이 무엇인가?

 

아담이 받은 시험은 예수님이 받은 시험을 보면 내용이 더욱 명확해진다.

 

예수님은 아담이 실패한 시험을 다시 구체적으로 받으셔서 이기셨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첫째, 말씀에 대한 믿음을 시험했다.

 

 

 

마귀의 첫번째 시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나온다.

 

'네가 만약' 자신이 하나님이 아들임을 믿으면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닌가 싶어 시험을 해본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시험에 넘어지는 것이다.

 

 

 

 

아담도 말로 예수님도 말로 시험을 한다.

 

말로 하는가?

 

말은 사람의 믿음의 얼굴이라 이미 앞선 글에서 말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안다.

 

 

 

 

아담은 그의 존재 가치를 자신을 위해 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둔다.

 

우리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마귀는 말씀을 의심하게 했다.

 

아담에게 하나님이 먹으면 죽는다 마귀는 안죽는다로 시험했다.

 

그래서 말씀을 의심하여 말씀대로 살지 않고 스스로 판단으로 살게 했다.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으면 말씀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는 가치가 없어진다.

 

 

 

 

 

 

우리의 존재는 먹고 마심으로 결정되지 않고 말씀으로 결정된다.

 

말씀을 따름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한다.

 

 

 

말씀을 믿음이 우리의 존재를 영원으로 지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말씀이 아닌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이루어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존재는 이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말씀을 믿는 믿음의 현장성에서 결정된다.

 

아담은 가장 좋은 조건에서 믿음을 증명할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악의 상황가운데

 

그리고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존재적 문제를 말씀을 믿음으로,

 

말씀을 택하므로 믿음의 영원성을 유지하신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말씀을 믿을 영원성으로 유지된다.

 

 

 

 

 

 

 

 

둘째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했다.

 

 

 

 

하나님이 계신지 계신지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되서 하나님이 있음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서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는지 지키시는지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맛사에서 물을 달라고 하면서 시험한 것과 같다.

 

하나님이 계시면 물을 것이고,

 

계시면 물을 주실 것이라는 논리로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기록한다.

 

 

 

 

 

동일한 시험이다.

 

네가 어려운 길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계시는지 계시는지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해 봐야 아나 나는 해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한번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내가 잘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달라고

 

기도하고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잘되고 되고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측도가 아니다.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증명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잘되는 것이, 세상에 증명할 만한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되기도 못되기도 한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한다.

 

 

 

 

 

셋째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흔들어 놓는다.

 

아담이 믿고 따른 것은 마귀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따랐다.

 

최악의 조건에서 예수님은 잠깐 누릴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경배하고 섬기기로 작정하고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는 것임을 붙들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주기도하고 빼앗기도 한다.

 

줄까요?

 

오직 하나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고 섬기지 못하게 한다.

 

누가 섬기고 누가 경배할까?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 이끄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의 시험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시험인가?

 

그렇다.

 

바로  < 믿음 > 시험이다.

 

 

 

 

 

시험을 한마디로 믿음의 시험이라고 말할 있다.

 

모든 것이 믿음에 관한 것이다.

 

말씀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삶의 목적에 대한 믿음이다.

 

 

 

 

 

마귀는 성령이 허락하는 가운데 믿음에 대한 시험을 치루신 것이다.

 

그럼 성령께서 이렇게 예수님을 이끄셔서 마귀에게 믿음의 시험을 받게 것인가?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믿음의 시험을 받으신 것인가?

 

 

간단하다.

 

아담이 바로 믿음에 대한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아담이 실패한 시험을 보자.

 

그가 실패한 것은 오직 하나다.

 

 

믿음이다.

 

 

 

 

죄가 어떻게 들어왔나?

 

선악과를 먹어서 그렇다고 사람들은 한다.

 

그럼 선악과를 먹어서 죄가 들어왔나?

 

아니다.

 

 

 

 

선악과는 믿음을 잃어버린 결과로 먹은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은(첫번째 시험) 네가 먹으면 정녕 죽는다 했다.

 

그런데 마귀는 먹어도 죽지 않는다 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마귀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어 버려서 결국 선악과를 먹었다.

 

 

 

 

 

원인은 믿음을 잃어버림이고 결과는 선악과를 먹음이다.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말씀이 사라지니 존재 자체도 가치가 없어졌다.

 

에덴에 있어야 존재가 에덴을 떠나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말씀 안에 믿음으로 존재할 우리의 존재는 가치가 있다.

 

 

 

 

 

그래서 믿음은 어떻게 오는가?

 

말씀을 들음으로 온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말씀에 대해 믿지 못하면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시험하게 된다.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니 하나님이 존재에 대해서도 시험하게 된다.

 

진짜 그런가하여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존재하시고 말씀대로 하시는 분인데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의 존재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진짜 그런지 시험해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시험이다.

 

 

 

 

이것이 둘째 시험의 내용이다.

 

 

 

 

그리고 셋째 시험은 인간의 삶의 목적, 존재의 목적이다.

 

아담은 스스로 위해서 사는 것에 삶의 목적을 정했다.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에 자신의 믿음을 걸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던 말씀을 버리고 정말 그런가 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경배하고 섬기기로 정해진 인간의 삶의 목적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섬김을 받는 자로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섬김을 받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 정한 것이다.

 

 

인간 삶의 목적이 변해버린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 것이다.

 

 

모든 시험을 예수님이 다시 받으시고 승리하셨는데

 

이것이 십자가를 위해 가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자격을 갖추어야 기본적인 시험이셨다.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 회복되어야 있는 길이 십자가의 , 하나님 나라의 ,

 

영생의 길인 것이다.

 

 

 

 

이제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신다.

 

무엇을 지나야 하고 어디를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지게 되는지도 오직 성령이 아신다.

 

아니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뜻을 이루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주체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마귀를 통해 시험의 주체자이신

 

성령에게 자격을 허락 받기 위해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인류를 한마디로 성령께서 믿음이 길로 인도하기 위한

 

이끄심의 역사라고 말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이끄심을 통해 우리 모두를 거룩과 영광의 자리로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것이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이스라엘의 광야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 하라면

 

< 이끄시는 대로 사는 훈련 > 이라고 말할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경륜과 계획을 아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이끄시는 주체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힘이 들어가고,

 

우리가 보기 좋은 대로 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할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 것도 성령께서 믿음을 주셨다면

 

우리가 믿음 안에 사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는 방법 말고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율법아래 다시 사는 것이다.

 

그곳에는 자유함과 영원한 생명이 없다.

 

 

 

 

생명을 얻은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야 하는데

 

법이 이끄심의 법칙이다.

 

 

 

 

 

광야는 힘을 빼고 성령의 힘을 의지해서 사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성령은 거룩한 성전인 우리 안에서 내주하시고

 

마음과 생각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그래서 신앙이 깊다는 것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방법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생각대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말씀,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말고는 없다.

 

 

 

 

 

 

우리는 죽었다는 말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광야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생각, 마음을 성령의 이끄심 앞에 죽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이 성령에 이끌려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다른 곳으로 갔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성령 안에 사는 모범이다.

 

 

 

 

 

 

이야기는 최고의 극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천사가 나타나고 성령이 이끌어 다른 곳으로 가고…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평범한 삶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생각과 마음을 주셔서

 

우리로 그곳으로 가게하고 움직이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원리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가셨다.

 

빌립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성령에 이끌려 삼층천을 갔다 했다.

 

모든 극단적 체험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추측해 보건대 매일의 삶이 이렇게 성령이 이끄시는 것을 알고

 

따라가는 삶이 성령의 법칙으로 사는 삶이다.

 

 

 

이끌림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한다.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가?

 

 

 

성령의 이끄심의 목적이 무엇인가?

 

 

 

 

 

 

성령의 이끄심의 목적은 복음,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깨달아 선명하게 보이게 하며

 

예수그리스도를 알게하여

 

개인에게 영생을 주며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신다.

 

 

 

 

 

사람들은 성령의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 어떻게 분별하느냐고 한다.

 

 

 

간단하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 성령의 영이며

 

미혹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이 높아지면 미혹의 영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몸과 형체라도 있는데 성령은 얼굴이 없나?

 

성령은 얼굴 없는 인격이다.

 

그분의 인격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드러남으로 자신은 감추시는 것이다.

 

그래서 패커(J. I. Packer)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를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이라고 했다.

 

 

 

 

 

 

수줍음은 병든자나 인격적 장애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성령은 자신의 얼굴은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만을 드러내는

 

거룩한 수줍음을 가지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추시고 오직

 

하나님 만을 높이며 나타내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세분의 거룩한 수줍음을 통하여 그들은 엽합 되고 하나이시다.

(성령의 하나됨의 법칙을 보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특성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고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보충하고 서로를 통하여 영광을 받는다.

 

 

 

 

 

그러나 마귀, 미혹은 영은 오직 자신만을 경배하게 하며

 

스스로 높아지려는 속성을 가진다.

 

 

 

 

 

성령이 이끄실 그것을 분별하는 척도는

 

하나님이 높아지고,

 

예수님이 증거되며,

 

일을 통하여 영혼이 세워지는 것이라면 성령의 역사로 봐도 좋다.

 

 

 

 

 

그러나 일을 통하여 다른 어떤 것이 높아지거나

 

나의 영광이나 나의 어떤 목적을 이루는 것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미혹의 영이 틈을 가능성이 높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도 육체로 망할 있다.

 

모든 시간과 상황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행동 원칙들이 있다.

 

 

첫째는 일이 성경의 원리에 맞는가?

 

둘째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셋째는 일을 통하여 사람이 세워질 것인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가?

 

 

 

 

 

그래서 모든 행동을 한마디로 말하면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이 좋다 여기면 하면 된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일을 하면 좋다고 여기면 하면 된다

 

 

그래서 성경은

 

 

 

 

[마7: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하던 것은

 

너희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말이다.

 

 

 

 

 

사람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좋은 그것을 하라.

 

내가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주라 그것이다.

 

 

 

 

 

 

그래서 7:12 말씀 앞에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악한자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듯이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너희도 너희가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하라라는 말씀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입장에서 행하시고 일하시고 구하는 것을 주시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고 섬기고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말이다.

 

 

 

 

 

 

어려운가?

 

 

 

예를 들면

 

이번에 한국에 갔다가 정말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카메라를 한대를 받게 되었다. 

 

그분도 성령께서 이끄셔서 자기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카메라는 구입했다는 것이다.

 

물론 거절을 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을 주셨고 번의 기도 중에

 

묻지도 않고 구입을 했다는 편지를 읽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받았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남아공으로 왔는데,

 

천목사님이 너무 카메라를 좋아 하시는거다.

 

이유는 천목사님 카메라가 오래되고 문제가 있어서

 

사진이 나오지 않자 천목사님이 관심을 보이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천목사님 입장에서 생각해

 

나도 저런 카메라 한대 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사람과 의논해서 카메라를 한대 드리기로 했다.

 

가격이 거의 사례의 반이다.

 

그래서 12 사례를 받으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천목사님께 이미 말씀을 드렸고 오늘 진행을 했다.

 

 

 

 

나도 받으니 좋은데 천목사님이 받으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

 

간단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고?

 

말씀대로 살면

 

먹는 , 입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

 

그렇게 살았고 한번도 그것 때문에 힘든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믿음은 있다.

 

 

 

 

 

일을 진행하면서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내가 카메라를 받을 부담이 날라간다.

 

 

이것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의 원리이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온다.

 

 

 

 

 

성령의 이끄심의 결과가 어떤 것이 있나?

 

 

 

첫째는 천사들의 수종이 있다.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일을 마치고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다.

 

마찬 가지다.

 

하나님의 예비된 위로가 있다. 사람들의 위로, 환경적으로 위로가 있다.

 

이것은 해본 사람만 안다.

 

 

 

 

 

 

 

둘째는 평강이 온다. 하늘의 평강이다.

 

 

 

환경이 어려울 지라도,

 

환경이 광야이고,

 

시험이지만 하나님의 평강이 안에 있음을 안다.

 

 

 

 

마음이 불안해야 하는데 성령이 인도하시는 가운데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가운데 평강이 있다.

 

예수님은 평강 주시기를 원하셨다.

 

사도 바울의 모든 인사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평강을 기원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면 변함 없이 평강이 선물로 온다.

 

우리 안에 평강이 없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 가지 않아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무슨 놀라운 일을 기대한다.

 

놀라운 일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주시기 원하시는

 

하늘의 평강이요,

 

하늘의 위로요,

 

하늘의 마음이다.

 

 

죄로 가득차며 믿음 없는 우리 심령에

 

믿음으로 가능한 성령의 따를때 주시는 하늘의 평강과 사랑과 위로보다

 

기적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평강을 주셨다.

 

 

 

 

세례요한이 탄생을 예언하며 말은 그가 예비한 자가 평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평강을 기원했다.

 

평강은 예수님과 성령이 그렇게 주시기 원하시는 하늘의 선물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부르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우리를 통해 그분의 명확한 뜻을 이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 나라를 위해

 

개개인을 성령의 인도로 이끄신다.

 

그래서 결국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나아가고

 

그렇게 자란 사람을 통해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안에는

 

영혼을 세움이 있다.

 

이것은 나를 포함한 지체들의 세움이 포함된다.

 

그리고 나와 지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고

 

그분의 영광의 나라가 세워짐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임한 베드로를 보라.

 

사람 앞에 선다는 것이 두려운 베드로였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배신한 베드로였다.

 

그러나 성령은 그를 강권적으로 사람들 앞에 서게 하고

 

말씀을 외치는 마음을 주셨다.

 

 

 

 

 

[행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그는 그냥 순종하여 뜻을 이루게 된다.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빌립이 순종하므로 이디오피아에 복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의 법칙은

 

성령께서 마음을 주실 그냥 이끌려 가라는 것이다.

 

책임은 하나님이 지신다.

 

마음의 평강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떤 이끌림을 따라 갔는데 하나됨이 깨어졌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성령의 이끌림이 아니라 미혹의 영으로 나를 높이려고 했던지

 

다른 어떤 목적이 있어서이다.

 

 

 

 

 

순수하게 그냥 따라가라.

 

마음이 오면 그냥 가라.

 

그러면 성령께서 일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신다.

 

 

 

 

 

성경도 성령의 감동으로 지어졌다.

 

 

 

예수님도 성령의 감동으로 탄생되고

 

성령으로 이끌리어 시험받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역하셨다.

 

 

 

 

 

우리의 구원도 성령으로 되어졌다.

 

 

[빌1: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롬8: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위대한 성령의 전으로 살아간다.

 

 

[고전6: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런데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지 않는가?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망하고 싶은가?

 

 

 

[갈3: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는 이제 성령으로 사는 말고는 소망이 없다.

 

이것이 성령의 법이다.

 

 

 

 

 

[갈5: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우리의 삶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며 성령에 소유된 자들이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위대하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느끼라.

 

그리고 음성에 순종하라.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확장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되는 것이다.

 

 

 

 

 

 

 

정말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런 삶을 살며

 

 

 

능력있는 삶을 원하는가?

 

 

 

그럼 성령의 이끄심을 느끼라.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다 쓰레기 통에 버리라.

 

 

 

내가 아는 지식과 습관과 경험을 버리라.

 

 

 

그리고 성령이 이끄시는 바를 알고 그것에 목숨을 걸어라.

 

 

 

그때, 하늘이 열리고 사명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것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