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법칙 3 - 부인의 법칙
마태복음16:24
성령의 법칙 세번째는
< 자기부인의 법칙 > 이다.
성령시대를 살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유일한 한가지는
온유이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11:30]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의 원리는 성령의 법칙 1인 < 온유의 법칙 > 이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아니 하나님의 사명을 내가 받아서 따르는 것이다.
따르는 자가,
부름 받은 자가 해야 할 것은 단지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음성과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성령의 음성과 성령의 마음과 성령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 성령의 법 > 이다.
성령의 법은 구약의 율법을 따르던 자들의 구속에서 자유케되는 자유의 법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면 그것이 곧 사명이고 자유이고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되는 시작점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명하신 것은 < 소자의 법칙 > 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우리를 향하여 하신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면
큰 일을 하지 마라.
큰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단지 우리의 작은 것을 통해서,
소자를 향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적은 누룩,
작은 생선,
어린아이,
작은 자,
작은 겨자씨,
작은 믿음,
작은 것에 충성 등,
예수님은 단 한번도 큰 것을 요구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우리가 신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어떤 큰 감동,
큰 역사,
큰 일을 기대하면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작은 일을 통해서 일하신다.
작은 소자에게 원하시는 행동 하나를 보고 믿음으로 가기를 원하신다.
엘리야가 한참을 기도하고 저 멀리 작은 구름 한 조각을 보고 믿음으로 기도해서
역사를 보았다.
작은 것이 큰 역사의 열쇠이다.
작은 것을 보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작은 것에 큰 역사가 있음을 믿음으로 인정해야 한다.
작은 것에 믿음이 있다.
작은 것에 능력이 나온다.
작은 것이라도 그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삶에 순종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거룩의 연장에 서게 되고
거룩은 믿음의 확실성으로 내 안에 임재 하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내 안에 충만케 하신다.
작은 것을 해 본 사람만이 아는
하늘의 평화와 평강을 맛보게 된다.
어떤 큰 것이 아니어도 작은 성령의 음성에 그냥 순종해보라.
하늘의 평화가 물밀듯 밀려옴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은 내 상태를 정확히 아시고
기도와 성경 설교의 내용이 달라도
동일하게 자꾸 요구하시는 어떤 문제가 내 안에서 부담으로 찾아온다.
그 작은 것을 행할 때 우리는 거룩의 충만을 느끼게 되고
그 충만은 다음 발걸음을 위한 힘이 되어 나아가게 한다.
내 마음에 성령이 주시는 음성, 그 음성을 순종하라.
부담되는 그것, 작은 것이라도 그냥 이루어 드릴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찾아오는 것이다.
성령의 법칙인 < 온유의 법칙 >, < 소자의 법칙 > 을 인식하고
성령의 법을 이룰 때
성령의 열매는 내 안에서 금지할 수 없는 능력으로
그분께서 맺게 하실 것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단지 말씀, 성령의 음성을 심을 때 성령께서 나로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해 놓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세번째 법칙이 무엇인가?
그것은 < 부인의 법칙 > 이다.
성령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삶이다.
예수님이 되는 삶이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
[마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람들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다.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요단강이 먼저이다.
그리고 사역이고 십자가이다.
요단강의 의미가 무엇인가?
자기의 부인이다.
그 부인이 얼마나 놀라운지 하늘의 영광의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했다.
내 기뻐하는 자라 했다.
자기 부인의 열매는 하늘의 소리며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먹게 된다.
요단강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결백을 두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을 좇은
자기부인의 현장성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다.
요단강은 자기가 완전히 죽은 곳이요
요단강은 자기부인의 첫발이자 자기부인의 증거의 현장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자기의 이성과 합리를 내려 놓을 때
건넌 곳이 요단강이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의 모든 생각과 자기를 부인하고 들어가서 나은 곳이
요단강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것,
자신의 결백, 거룩, 뜻과 생각과 마음을
모두 하나님의 것에 굴복하고 부인한 곳이 바로 요단강이다.
우리는 요단강을 지나야 한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고백하는 곳이 세례의 장소인 요단강이며
그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이는 곳이 요단강이다.
육이 거듭나는 곳, 그곳이 요단강이다.
바로 < 자기 부인 > 의 현장을 지나야 우리는 십자가를 본다.
자기부인을 지나지 않은 자는 결코 제 십자가를 보지 못한다.
인류는 자기애,
자기사랑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존재이다.
그 자기 사랑, 자기애를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지나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영생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부인으로 죽어야 영원한 부활로 살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곧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자기 부인 후에 바로 나오는 말씀이 뭔지 아는가?
바로 생명,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다.
[눅9:23-2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 부인은 목숨이다.
목숨을 건 부인이다.
영생을 얻을 것인가 영생을 잃어버릴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자기부인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요단강 사건은 생명을 연결하는 부인이다.
생명을 살리는 부인이다.
그래서 자기부인은 성령의 중요한 법칙 중에 하나이다.
자기를 부인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는 하늘의 영광이 찾아온다.
둘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셋째는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그리고 그 확증으로 십자가라도 기쁨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자기부인이 없는 자는 생명, 구원이 없다.
부인이 없이는 십자가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먼저 지려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인을 먼저 하라하신다.
부인 없는 십자가는 결코 없다.
성령의 음성을 따르는 것은 자기 안의 자기 소리를 먼저 부인해야 한다.
자기 소리는 자기에게 힘이 있을 때
붙잡을 것이 있을 때는 결코 부인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픔도 주시고 고난도 주신다.
그렇게 그 광야의 시간을 지나야 부인이 된다.
광야의 이유는 자기 부인이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자기의 뜻대로 살 때 이다.
모세와 아브라함이 실패한 때는 자기 의지대로 살 때 모두 실패했다.
요셉도 어떤 사람도 실패한 때는 자기의지가 살았을 때 이다.
그 의지를 죽이는 시간이 광야이다.
광야는 자기부인의 집중 훈련장소이다.
결국 훈련을 지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 할 때 갈등을 했을까?
아니다.
그는 결코 갈등하지 않았다.
창 12장 1절부터 이삭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11장 마지막 절에 아브라함이 고백한 하나님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삭을 바치게 된다.
영광을 본 사람 만이 십자가를 진다.
광야가 아니면 우리는 자기부인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하지 못한다.
아프지만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게 하셔야만 한다.
그것이 죄를 지닌 우리의 본성 때문이다.
자기 부인 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이다.
영생이다. 능력이다.
모세가 40년을 기다리고 훈련한 후에 그가 가진 것은 자기부인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 만을 따라간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훈련한 것은 자기부인이다.
구름과 불기둥의 움직임은 곧 자기부인의 현장이다.
나는 온데간데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는 곳이 바로
자기부인을 지난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천국이다.
사십의 법칙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지남을 기억하라.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지나고
시내산에서 40주야를 지나서 십계명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지남을 기억하라.
엘리야가 40주야를 지나 산으로 간 것을 기억하라.
요나가 니느웨에서 외친 것이 40일 후에 망한다 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동안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고
제자들을 훈련함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들은 40일을 지나서 기도에 집중할 때 성령이 임했다.
40은 인간이 자기 부인을 거치는 시간이다.
40은 영적인 터널을 지나
자기부인,
자기의 소리를 죽이고
자신이 죽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 40이라는 자기부인의 시간을 지나야
진정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고 십자가를 지게 된다.
사람마다 숫자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40이 내가 죽는,
나의 자아와 의지가 죽는 시간으로 표현했다.
노아 홍수 때 사십일 동안 비가 왔다.
온 땅의 체질을 바꾸시는 시간이다.
사십은 하나님이 영적 상태를 바꾸는 시간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40을 동일하게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정탐꾼 들이다.
함께 40을 지났지만 두 명 만이 하나님을 보았고
나머지 열은 체질이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40은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의 체질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신8: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예수님도 이스라엘도 성경의 그 어떤 인물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40이라는 자기부인의 시간을 지났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 시간을 허락함을 기억해야 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사랑하시는 자가 반드시 자기부인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 시간을 지나지 않는 사람은 쓰시지 못한다는 것을 아신다.
아니 안 쓰신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사람을 쓰시지
양다리 걸친 사람을 쓰지 않으신다.
그래서 완전한 순종의 사람을 원하시기에
우리에게 가혹하리 만큼 광야의 시간을 허락하신다.
성경의 모든 위대한 사람은 자기부인의 시간 40을 지났음을 기억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자기부인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가?
첫째는 말씀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고난이나 아픔이 아니어도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부인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다.
둘째는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이다.
가장 힘든 방법이나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고 우리를 낮아지게 하며 순종하게 한다.
예수님도 40일을 통해 겸손을 배웠음을 기억하라.
육체를 입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별이 없이 겸손하기만 하면 축복이요 영광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으로 하게 하신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소리 밖에 없다.
육체의 소리, 성령의 소리!
그것을 성경은 육체의 소욕,
성령의 소욕이라 표현했다.
자기부인의 최 전방이 어디인가?
바로 내 마음이다.
내 생각이다.
육체의 욕망, 성령의 욕망 이 두 가지를 싸우는 현장이 최 전방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이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고전2:14]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현대인)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성령의 욕구을 무시해서 그렇다.
성령의 바람을 무시해서 그렇다.
육체의 욕구는 자연스럽다.
그냥 하던 대로 살던 대로 하는 것이 육체의 욕구, 소욕이다.
그러나 성령의 욕구, 성령의 바램, 소욕은 집중하지 않으면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따로 시간을 내야하고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따라야 하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자기부인이다.
우리는 반드시 육체와 성령이 싸우는 현장에 서게 된다.
이때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성령의 욕구, 성령의 소욕을 선택하면 되는데
훈련되지 않은 우리는 그것이 쉽지 않다.
훈련이 되면 그것이 쉽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는데
그 과정에 자기부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전에 수없이 글에도 썼던 것이 나온다.
바로 이성과 합리,
자기 보기에 좋은 것,
소견에 옳은 대로,
욕심을 좇아 등 등 등.
모든 것이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이 모든 것을 부인 하는 것이다.
믿음은 자기부인의 힘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사랑, 자기애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신뢰하여 자기부인을 쉽게 하게 된다.
자기부인이 아니면 우리는 영생을 잃고
하나님의 영광도 잃고
천국도 잃게 된다.
자기 부인의 법칙은 모든 신앙의 시작이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좁은길?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니다.
성령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작은 것을 따르는 길이 좁은 길이다.
내 안에 싸우는 육체의 소리와
성령의 소리 중 육체의 소리에 자기부인을 하고
그리고 성령의 소리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시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일체의 비결이다.
히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성령의 음성이 들릴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 아는가?
40년이다.
40년 동안 광야를 죽을 고생하며 돌았다.
아니 다 죽었다.
마음을 강퍅한 사람들을 죽여 버린다.
구약의 하나님의 음성은 신약의 성령의 음성이다.
이 음성을 따르면 생명이요
이 음성 앞에 마음을 강퍅케 하면 죽음이다.
결국 성령시대의 싸움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다.
무엇을 따를 것인가?
그 싸움이다.
어떤 것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이 우선이다.
부인하지 않고는 성령의 길, 좁은 길을 갈 수 없다.
[롬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의 법은 생명이다.
성령의 소리를 듣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이 생명에 거할 수 있다.
수 많은 세상의 잡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라.
세상의 소리를 부인하고
오직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나를 생명가운데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할 실 것이다.
< 부인의 법칙 > 은
온 생명의 시작이요 영광의 충만으로 인도한다.
자기 부인으로 하늘의 영광과 하늘의 소리를 듣고
이 땅에서의 삶이 능력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