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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세상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세상이 가진 가장 무기

열왕기상 19:1-14

 

 

 

 

 

 

 

무엇이든지 약점이 있다.

 

물은 불에 약하고 불은 물에 약하다.

 

 

남자는 여자에 약하고

 

여자는 남자에 약하다.

 

 

권력은 명예에 약하고

 

명예는 유혹에 약하다.

 

 

 

사람마다 강점이 있는가 하면 약점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보이는 것에 약하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래서 모든 행동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다.

 

 

 

 

 

 

이런 사람을 무너 뜨리기는 쉽다.

 

사람들의 좋은 평판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사람은 아무 힘들어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권력을 가지려 했다.

 

그래서 그들의 약점은 그들 스스로의 명예,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가치에 약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권력이 날라가자

 

그들에게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

 

그래서 그들은 힘없이 고향에서 물고기나 잡고 있었다.

 

 

 

 

 

 

 

세상에서 우리가 살려면

 

우리의 약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수준은 우리의 강정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약점이 우리의 수준이다.

 

 

 

 

삼일교회 전병욱목사님이 사임을 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이며

 

한국의 젊은 엘리트들을 이끄는 탁월한 사역자이다.

 

그런데 그가 불미스런 일로 사임을 선포했다.

 

 

 

엄청나게 많은 강점으로 일했다.

 

이분은 강점을 강조했다.

 

 

 

책도 그렇게 냈다

 

'강점으로 일하라'

 

'영적 강자의 조건'

 

'파워 전도서'

 

'파워 로마서'

 

'파워 크리스찬' 등등

 

 

그분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세움을 받았다.

 

 

 

 

 

놀라운 강점과 파워를 통해 수많은 역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분은 그분의 약점 한가지에 넘어졌다.

 

약점을 커버하지 못했다.

 

약점이 사람의 수준임을 알지 못했다.

 

약점 하나가,

 

누룩 하나가 반죽을 망칠 있다는 것을 놓쳤다.

 

아니 그렇게 강점으로 일하시던 귀한 종도

 

약점 한가지에 모든 사역을 내려 놓은 상태이다.

 

 

 

 

 

약점을 보완하지 않으면,

 

무너진 망대를 고치지 않으면,

 

나의 가장 약한 것을 파악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목사님의 일이 나의 일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약점은 목사님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세는 성질이 약했고,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했다.

 

다윗은 여인에게 약했고

 

요셉은 자기 자기에 취해 살았었다.

 

 

 

 

모든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약점을 보완해서 강정이 사람도 있고

 

약점 때문에 비참한 말로를 사람도 있다.

 

 

 

 

 

약점이 고쳐지지 않으면 사람은 한계를 넘어 없다.

 

 

강점도 세워야 하지만

 

약점을 보완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

 

 

 

 

 

 

 

사람은 그렇다 치고

 

세상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가?

 

세상의 영이 우리에 대하여 내미는 가장 치명적이며

 

가장 무서운 무기는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무엇인가?

 

 

 

 

 

 

 

 

가지 이다.

 

 

 

 

 

에덴동산에서 악한 영은 무엇을 뺏으려고 왔는가 생각해야 한다.

 

 

뱀은 아담에게서 무엇을 뺏었는가?

 

 

 

 

영원한 생명이다.

 

뱀은 영원한 생명을 뺏기 위해서 접근했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죽음이다.

 

 

 

 

세상이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죽음이다.

 

 

죽음의 아픔이다.

 

죽음의 공포이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 헤어짐이다.

 

죽음의 슬픔이다.

 

 

 

 

 

 

땅에는 영생이 없기에 세상이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죽음이다.

 

사망이다.

 

 

 

세상의 영이 가진 가장 무기는 죽음이요

 

우리가 가장 약한 것이 바로 죽음이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악한 영은 죽음을 인류를 공포와 슬픔으로 몰고 있다.

 

영생 없는 영원한 죽음을 주는 것은 그들의 나라를 확장하는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오셨나?

 

 

사망을 멸하러 오셨다.

 

그리고 영원한 길을 내러 오셨다.

 

 

 

 

[롬5:17]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5: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망을 멸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사망이 죽어야 영생이 온다.

 

 

 

세상은 사망, 죽음으로 왕이 되어 인류를 좌지우지 했다.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공포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심으로 이상 사망이 힘을 쓰지 못한다.

 

에덴동산에서 잃었던 생명이 다시 그리스도로 찾아온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롬6: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오직, 홀로

 

세상이 가진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왕이었던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기신 !

 

그래서 죽음이 다시는 우리에게 힘쓰지 못하게 하셨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 복음인 것이다.

 

 

 

 

 

[고전15:55-58]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가 주께 감사하나?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겼기 때문이다.

 

사망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일하게 약점,

 

세상이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사망이

 

그리스도로 이기게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인 것이다.

 

 

그것이 복음 안에 기쁨이며 능력이며 소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 것은 어떻게 사망,

 

어떻게 죽음이 찾아 왔는가 이다.

 

 

 

언제 찾아 왔는가?

 

 

뱀이 갑자기 아담에게 선악과를 억지로 먹인 것이 아니다.

 

뱀이 갑자기 입을 벌리고

 

입에 넣은 것이 아니다.

 

오직 아담 스스로 먹은 것이다.

 

 

 

 

?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불신앙이다.

 

의심이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심 하게 했다.

 

 

 

하나님은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했다.

 

그런데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3:4)

 

 

 

 

하와가 보니 먹음직도 보암직도해서 먹었다.

 

 

우리는 믿음을 따라야지

 

보기 좋다고

 

느낌이 좋다고 따라서는 믿음을 잃게 된다.

 

 

믿음이 사라지면

 

눈에 좋은 것들이 들어 온다.

 

이전에는 기준이 믿음인데

 

믿음이 사라지면

 

눈에 세상이 들어온다.

 

돈이 들어오고

 

높은 자리가 들어오고

 

좋은 집이 보인다.

 

좋은 차가 부럽고

 

그대로 우리의 군침을 당기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들이

 

수도 없이 찾아 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신앙이 찾아오면

 

어김 없이 찾아 오는 것이 사망이다.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찾아 오는 것이 있다.

 

 

 

불안이다.

 

두려움이다.

 

부끄러움이다.

 

슬픔이다.

 

아픔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망이 온다.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제일 마지막에 오는 것이 사망이다.

 

그래서 사단은 이것저것 유혹하다

 

안되면 사망,

 

죽음으로 협박하고 두렵게한다.

 

그래서 사망을 통해

 

믿음이 오는 것을 막게 한다.

 

 

 

 

 

 

 

 

오기 전에 찾아오는 세상의 무기들이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슬픔과

 

아픔이다.

 

 

 

 

 

 

사단이 노리는 한가지는

 

오직 믿음을 잃게 하는 것이다.

 

사단은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부자가 되든지

 

높은 자리에 앉든지

 

가질 것을 가지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을 잃게 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한다.

 

믿음을 잃으면 자연스럽게 모든 아픔이 찾아온다.

 

그리고 사망은 자연스럽게 온다.

 

 

 

 

 

 

 

 

 

 

믿음이 없으면 무너진다.

 

예수 없는 인생은 불행하다.

 

 

누려도 사망을 이기지 못하면 완전 죽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사망이 온다.

 

 

사망이 자에게는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은 사망과 함께하는 동역자이다.

 

두려움은 영원한 생명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은 믿음을 사라지게 한다.

 

 

 

 

예수를 보고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언제 빠졌는가?

 

 

믿음이 사라질 때이다.

 

 

언제 믿음이 사라지나?

 

세상을 , 풍랑을 이다.

 

 

 

 

 

[마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세상은 오직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뿐이다.

 

 

믿음이 사라지면 사망이 온다.

 

그와 함께 사망의 모든 친구들이 찾아온다.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좌절과,

 

슬픔과,

 

소망 없음과 모든 아픔이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잡히시기 바로 전에 베드로를 위하여 하신 말씀이 있다.

 

사단이 너를 까부르듯,

 

밀을 발로 밟아 부수듯 하겠다고 너를 요구할

 

나는 네가 믿음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한다.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믿음이다.

 

 

 

베드로를 향하여 물위를 걸을 때도

 

예수님이 죽으러 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의 처절한 외침과 뜨거운 기도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무엇에 성공해야 하는가?

 

믿음에 성공해야 한다.

 

예수님 만이 사망을 이기셨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다시 몸으로 부활하고 영생을 얻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 없음이 죽음이다.

 

믿음 없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다.

 

두려워 하는 자는 영원한 죽음에 이른다.

 

 

 

[계21: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완전한 사망,

 

둘째 사망은 완전히 죽는 사망이다.

 

 

 

그때 사망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믿지 아니 하는 사람들 ,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에 들어간다 했다.

 

 

 

 

 

믿음이다.

 

믿음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여는 열쇠이다.

 

 

 

 

 

 

 

세상이 주는 무기는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

죽음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다.

 

 

 

몸을 멸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세상에서 이기게 하신다.

 

 

 

 

 

 

 

 

 

 

신약은 죽음과 부활과 영생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엘리야의 이야기들이다.

 

 

 

 

성경의 주인공들 중에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한 사람이 엘리야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본성적으로 가장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다.

 

 

[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현대어성경)

 

 

 

 

아니 조금도 다름이 없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 보자.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먹이시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밀가루와 병의 기름을 채우셔서 먹이신다.

 

 

 

 

이게 과연 무슨 훈련인가?

 

위한 목적인가?

 

 

까마귀를 보내서 먹이실 때와

 

과부의 집으로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 뭔가?

 

 

 

 

왕상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모두 동일하게 너를, 네게 이다.

 

엘리야를 먹이고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다.

 

 

엘리야가 약한 것이 뭔가?

 

먹고 사는 문제이다.

 

생존에 대해서 누구보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먹고 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

 

하나님앞에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하게 된다.

 

먹고 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그가 다시 훈련 받은 것이 뭔가?

 

그렇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 살아나는 기적이다.

 

이것은 위한 훈련인가?

 

맞다.

 

생명이 주께 있다는 믿음이다.

 

죽음도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위함이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자 과부가 뭐라고 고백하는가?

 

 

왕상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기적보자

 

여인은 < 이제야 > 라고 말한다.

 

이제야 당신이 하나님이 사람인 것을 믿겠고 당신의 입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생각하겠는가?

 

 

까마귀야 어째 왔다치고

 

밀가루와 기름도 어째 됐다 치자.

 

그런데 생명이 죽음가운데 다시 회복됨을 경험하면서

 

자기가 고백하기 전에

 

여인이 이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보니 당신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이 있음을 믿겠다라고 한다.

 

말을 듣는 엘리야는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그렇구나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께 있고

 

생명을 살리는 능력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라고 믿게 것이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갈멜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850 1 싸움에서 당연히 이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모든 싸움을 이겼는데 믿음이 끝까지 가는가?

 

아니다.

 

우리가 그렇듯이 엘리야도 그렇지 않다.

 

 

한번의 은혜로 평생을 살지 못한다.

 

 

우리와 똑같은 것이 엘리야다라고 야고보서에서 기록한다.

 

 

어떻게 되었나?

 

아합의 부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한다는 소리를 듣고

 

죽어라고 도망간다.

 

이세벨이 뭐라고 말했는가?

 

 

 

생명을 죽은 선지자들처럼 하겠다고 말한 뿐이다.

 

 

 

왕상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엄청난 기적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능력을 보인 엘리야에게 말이 별로 대수롭지

 

않을 있다.

 

그런데 그는 < 생명 > 이라는 말에 그만 그의 약한 본성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 뭐라고 하는가?

 

 

 

 

왕상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엘리야는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갔다.

 

그는 죽음이 두려웠다.

 

아무리 능력있는 엘리야,

 

850 1 싸운 능력의 종이어도

 

까마귀로 먹고사는 문제,

 

과부의 집에서 밀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아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 생존이 달려있고

 

하나님께 죽음도 이기는 능력이 있다고 체험해도 그는 아직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생명을 위해서 도망하였다.

 

 

 

 

 

그래서 하룻길을 열심히 달려가서 로뎀나무 아래서 뭐라고 기도하는가?

 

 

 

 

왕상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

 

 

 

 

차라리 지금 죽여 달라는 것이다.

 

이제 다했으니 죽여 달라는 것이다.

 

 

갈멜산에서 죽여야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죽이면 우리의 사명이 끝이 나는가?

 

우리의 인생 목표를 이루면 죽어도 되는가?

 

 

그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다했으니 이제 죽여달라.

 

이세벨이 생명을 거두러 오는데 나는 죽는 것이 너무 무서우니까 하나님이 그냥 나를

 

죽여 달라 말이다.

 

 

 

그의 생명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말씀 하시며 나타나실 계속 된다.

 

 

그가 사십주야를 달려 굴에 이르렀을 하나님이 나타나자 그가 말한다.

 

 

왕상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후에 강한 바람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지진 후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자 그가 대답한다.

 

 

 

왕상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가 하룻길을 달려 로뎀나무 아래 왔고

 

사십주야를 달려 여기에 섰는가?

 

오직 자신의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까마귀부터 과부의 , 아들의 죽음, 그리고 갈멜산의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려고 하시 것인가?

 

 

 

 

생명이다.

 

 

 

엘리야에게 생명이 주께 있고

 

생명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까지 엘리야를 끌고 것이다.

 

 

 

생명이 지금 죽을 지경인데 하나님 가만히 계십니까?라는 항변을 늘어 놓는 그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네가 지금 죽을 것처럼 하는데 지금 말고 천명이나 살아 있다.

 

생존, 생명을 그렇게 걱정하는 믿음 없는 자야

 

내가 같은 사람 칠천을 남겼다. 믿지 못하겠니?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하면 너는 생명이 걱정 없다.

 

그렇게 답하시는 것이다.

 

 

 

바알에게 무릎 끓지 아니한 천명!

 

그는 숫자에 놀랐을 것이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하나님이 새로운 사명을 받고 엘리사를 세우러 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알의 세력을 그냥 두시려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같지만

 

엘리야의 심정은 지금 내가 죽겠다는 것이다.

 

생명이 불안해서 죽겠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나?

 

 

 

'네가 어찌하여  여기있느냐?'(19:9)

 

 

 

말씀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있느냐?'(19:13)

 

 

 

 

생명을 붙드는 분이 하나님임을 알지 못하고

 

여기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생명 책임져 달라고 떼쓰고

 

하나님은 네가 여기 있느냐고 말하고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롭게 사명을 주셔서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라고 하신다.

 

 

그후에 그는 생명을 주관하시고 생명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기적들을 보면서 그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을 믿게 된다.

 

 

 

 

 

 

 

엘리야가 훈련의 내용이 무엇인가?

 

 

생존의 문제,

 

생명의 문제는 하나님께 있다는 그것을 훈련 받았다.

 

 

아무 것도 없던 그의 믿음이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하나님!

 

생명이 죽어도 다시 부활시키는 하나님을 정말 믿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남은 칠천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믿음이다.

 

그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후에도 그가 보인 기적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으로 일관 된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의 통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시키는 하나님을 믿음 것을 통해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

 

 

 

 

 

 

 

엘리야는 죽음에 대한 고민에 깊이 빠졌지만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면서

 

죽음을 넘어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

 

죽음을 고민하며 아파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보게 것이다.

 

 

 

 

우리는 엘리야의 고민이 단지 사역의 지침이나

 

외부적 압박으로 쉬어야 하는 정도로

 

그래서 천사가 먹을 것을 주는 정도로 알고 있다.

 

 

 

아니다.

 

엘리야가 정도로 고민하고

 

겨우 쉬지 못해서

 

이세벨의 협박의 문제로 힘들어 것이 아니다.

 

 

 

 

그는 안에 죽음에 대한 불안함,

 

죽음을 넘지 못한 믿음 때문에 고민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문제를 끝까지 훈련하시고

 

기적을 보여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이긴 것이다.

 

그에게 죽음의 문제가 해결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 부활이 보인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찾아온 외적인 죽음보다

 

내면의 죽음에 대한 고비를 넘기자

 

하나님은 죽음에 대해 부활,

 

죽지 않고 영원한 하늘 나라로 옮기셨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변화산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누구를 보았는가?

 

그렇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함께 대화를 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인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니고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아닌가?

 

 

 

 

먼저 모세인가?

 

그는 출애굽의 장본인이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탈출 시킨 장본인이다.

 

우리는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나오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시발점을 끊은

 

당사자가 모세이다.

 

 

그리고 엘리야인가?

 

부활이다.

 

영생이다.

 

 

 

 

사람으로,

 

아니 정말 평범한 사람으로 죽음의 고민에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간 장본인이 엘리야이다.

 

부활의 상징적 인물이 엘리야로 구약에서 유일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함께 이야기하고 상징적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초막 짓고 살자고 하니

 

 

성경은 뭐라 말하는가?

 

 

 

9:33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은 세상에 믿음을 주고

 

세상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부활로 이기기 위한 엄청난 사역인데

 

여기서 그냥 살자고 아니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의 사역에 힘을 실어주는 음성이 들린다.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들렸던 음성이

 

이제 십자가 죽음을 받으러 가는 순간 다시 들렸다.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은 십자가이다.

 

일을 감당하는 예수님이 사랑이요 기쁨이다.

 

세상을 쥐고 흔드는 악한 영의 무기인 사명을 깨기 위한 길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죽었다 살아나기 전까지 지금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선 말을 들으라 하셨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인류를 통해 진행해온 비밀을 일이 이루기까지 노출 시키기 원치 않으신 것이다.

 

 

 

 

 

주님은 세상의 사망을 깨기 위해서 오셔서 여기까지 오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변화산에서 내려 후에 무슨 기적이 있었나?

 

 

 

 

바로 간질들린 아들을 고치는 사건이다.

 

제자들이 아무리 해도 아들을 고치지 못했는데

 

우리는 안되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놀랍다.

 

 

 

 

마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부활을, 사망을 이기는 상징인 변화산 후에

 

바로 믿음을 이야기 하신다.

 

 

 

이야기인가?

 

 

 

죽음은 사망은 부활은 영생은

 

오직 믿음이다.

 

그것을 말씀 하시고 싶으신 것이다.

 

 

많은 기적중에 하필 간질하는 아들인가?

 

다른 이야기를 만드실 있는데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졌는가?

 

 

 

믿음이다.

 

 

 

 

 

 

세상의 영은 우리에게 오직 가지를 뺏었다.

 

 

 

죽음과 믿음이다.

 

 

 

 

죽음은 우리가 이길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이미 이루신 길을 우리가 가면

 

죽음이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길을 어떻게 가는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 이기고

 

믿음이 능력이고

 

믿음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지를 모두 회복하기 위해 땅에 오신 것이다.

 

 

 

 

 

우리는 오직 가지를 기도해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믿음은 사망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

 

 

 

사단은 오직 한가지

 

믿음이 오지 않게 한다.

 

 

 

 

믿음은 언제 오는가?

 

오직 하나다.

 

 

말씀을 들을 이다.

 

 

 

 

그래서 산상수훈 끝나고 무슨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나?

 

 

믿음이다.

 

5-7장이 산산수훈

 

그리고 8 9장은 온통 믿음으로 도배되어 있다.

 

 

 

산상수훈대로 사는 사람이 누군가?

 

누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 자녀가 되는가?

 

어떤 사람이 능력있는 삶을 사는가?

 

어떤 사람이 세상의 강력한 무기를 이기는가?

 

 

 

오직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을 위해 달려야 한다.

 

 

 

 

평생을 죽도록 고생하고 수고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무엇인가?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 믿음을 지키자.

 

우리 믿음을 지키자.

 

오직 믿음이 우리를 주앞에 서게 것이다.

 

 

할렐루야!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