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창2:17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는가?
이전에 교사들과 공부를 하거나,
청년들과 공부를 할 때는 어김없이 물었는데!^^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빈이도 가정예배나, 주일 예배 때
질문을 자주하는 나에게
이제 뭘 물어서 답하면 그게 답이 아니니까 말하기가 무섭다고 한다.
다 아는 답은 절대 안 물어 본다고^^
자 다시 물어 보자.
예수를 왜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를 다니 십니까?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이다.
가족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병이 낫고
종교가 하나는 있어야 교양이 있어 보여서?
이 물음에 정확한 답을 말하지 못한다면 정말 심각하게 오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성경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구원 역사이다.
신구약의 모든 이야기가 한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구약의 오실 그리스도와 신약의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그 내용의 핵심이다.
다시 묻자.
예수님이 왜 그렇게 와야 하고 오셔서 하신 일이 뭔가?
처음부터 명확하게 생각을 해보자.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잃어 버렸나?
에덴 동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났기에 온 인류가 이 난리를 치고,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토록 엄청난 일을 겪으셔야 하는가?
잃어버린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찾는 것이 뭔지 모르고 찾는 경우가 있다.
도대체 뭘 잃어 버렸는가?
아담과 하와가 뱀을 통하여 선악과를 손대어 먹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
그렇다 그들은 죽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3:19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결국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 영생 > 이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영생을 잃어 버렸다.
죽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 악한 영에 의해서 죽는 자가 되었다.
영생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잃어버린 영생을 위해서
그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를 이끌어 오신 것이다.
왜 예수를 믿는가?
영생이다.
하나님은 오직 영생을 위해서 온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것이다.
영생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고
영생의 길을 위해서 부활의 역사를 주신 것이다.
단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단지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서
단지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병도 고치고,
죄도 사하셨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굳이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 영생에 대한 믿음,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아직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이다.
질문을 하나 하자.
세상에서 가장 빨리 잃어 버리고 가장 오래 걸려 회복된 것이 뭔가?
그렇다.
제목을 보고 왔으면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알 것이다.
영생이다.
아담과 하와는 단지 21구절 동안 영생을 잃어 버렸다.
그런데 21절 동안 잃어 버린 영생을
수 천 년을 거쳐 회복된 것이다.
그만큼 영생은 어려운 문제이다.
아무나 볼 수도 가질 수도 없었던 문제다.
그 어려운 문제를 가장 쉽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 놓으신 것이다.
무엇이든지 그렇다.
잃어버리기는 쉽고
회복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몸도 망가지기는 쉽고 회복하기는 어렵다.
몸은 망가지면 얼마만의 시간 동안 치료하면 된다.
그러나 영혼은 한번 잃어버리면
영혼이 한번 상처를 받고 아픔을 가지면
그 회복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영혼의 문제는 결코 쉽게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한번 방황하면 그 회복은 수 백배의 시간과 수고와 땀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혜는 잃어 버리기 전에 지키는 것이다.
온 인류와 성경의 역사는 오직 이 잃어버린
< 영생 > 을 다시 쟁취하고 회복하는데 하나님의 온 힘을 다 부으셨다.
아니 하나님만 아닌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도 죽이시고
그분의 다른 영 보혜사 성령도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
이 일이 얼마나 큰 일이며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이 삼위 하나님께서 이토록 목숨 걸고 일하시는가?
우리가 이 일에 예수를 믿는 것을 다른 목적,
다른 이유를 들어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 영생에 관한 성경의 숨어 있는 의미들을 한번 찾아보고
내가 왜 예수를 믿는지
예수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한번 고민해 보자.
구약에서의 영생
아담 이후에 모든 구약의 율법과 제사와 사건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에 대한 예표라 했다.
그런데 이 구약에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가 바로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다.
아브라함 하면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다.
이삭을 바치라 할 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다.
번제는 통채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그 곳으로 간다.
놀라운 것은 그가 불과 칼을 들고 간다.
이미 결정한 상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환에게 하는 말이다.
내가 가서 경배하고 아이와 함께 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번,
아들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는데 어린 양은 어디 있냐고 묻는다.
그때 아브라함이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고
이삭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번제단에 아들을 묶고 죽이려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멈추시고
준비된 수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씀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는 사건 속에서 확실한 한가지를 보여준다.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이다.
아들의 부활을 믿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지 아브라함의 믿음,
즉 죽은 아들을 살리는 믿음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부활 신앙, 즉 영생을 믿은 것이다.
그 영생을 위한 부활을 믿는 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기록한다.
[요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현대어 성경은 이 말을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너희도 행할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은 단지 믿음으로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이 살아 나며 부활 할 것을 믿었다.
죽었다 살아 날 것을 믿었다.
이것을 믿었기에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고 기록한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히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는 내가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릴 것이라 믿고 갔다.
부활, 영생을 믿은 것이다.
로마서 4장 아브라함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믿은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
바치라고 바친 믿음이 아니다.
그는 죽은 가운데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단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영생을 믿었다.
부활을 믿었고, 영원히 살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많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 믿음의 조상은 바로 부활을 믿으며,
영생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의 조상이라는 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단지
죄를 사하는 정도,
단지 영적 가나안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믿었던 것이다.
이 믿음에 관하여 다시 성경을 살펴보라 다 다시 살리는 것,
죽음 가운데 일으키시는 것,
그래서 그는 그 영생, 부활이 이루어지는
하늘의 성, 영원한 나라를 바라고 소망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유명한 믿음장인 11장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아브라함이 이 땅 가나안을 바라고 소망한 것이 아니요 영원한 나라,
영원한 성을 소망하고 기다리고 기쁨으로 바랐다고 기록한다.
[히11: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 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1: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11: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현대어성경)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어떻게 아브라함이 하늘의 도성, 참 고향을 바라고
아들이 죽음 가운데 부활하고,
영원히 살 것을 믿음으로 받았을까?
아무튼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성경은 부활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자손을 연결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늘을 바라고 부활을 믿었고 영생을 믿었기에
우리 모든 믿음의 자손의 조상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다.
성경은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을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 놓은 이야기이다.
영원히 사는 길을 제시해 놓은 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그 뜻을 분별하고 무엇을 열어 놓으셨는지 찾아야 한다.
그런데 생각할 것은
어떻게 그가 이런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냐는 것이다.
이삭을 바치는 믿음의 사건 바로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첫째는
이미 죽은 자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경험함으로 믿어진 믿음이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게 된다.
둘째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맺는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누이로 속여 보낸 그 왕이 아비멜렉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완전하지 않아 누이라 속이고 보내지만
하나님께서 완전한 간섭으로 도리어 재물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지막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사라 때문에 하나님이 아배멜렉의 온 집안 여자들의 태를 막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집에 자녀를 낳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이 태를 다시 열아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다시 믿게 된다.
그 후에 이삭을 낳고 다시 두 사람은 언약을 맺게 되는데
아비멜렉의 군 장군이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이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할 것인데
우리를 힘들게 하지 말고 잘 지내자는 것이다.
그곳에서 언약을 맺은 것이 언약의 우물 또는 일곱 우물이라는 브엘세바라 이름한다.
이상한 것은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다른 이름을 부른다.
바로 < 영생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 라고 부른다.
[창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개혁한글)
(영원한)
이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름으로 불렀다.
왜 그가 그렇게 불렀을까?
아브라함은 창17장에 구십 구세때 아들을 다음해 즉 백세에 낳을 것을 들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웃었고, 18장에 다시 아들을 약속하자 이제는 사라가 웃었다.
이때의 웃음은 믿음이 없는 웃음이다.
그런데 21장에 정말 이삭이 태어나자 그 이름을 '웃음' 즉 '이삭'이라 지었다.
이때의 웃음은 믿음의 웃음이다.
그런데 진짜 백세에 아들을 낳으면서
죽은 것 같은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아비멜렉과 두번의 사건을 통해 생명과 죽음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러 가는 아브라함은 한치의 불순종, 불신앙이 없다.
곧장 가고 바로 죽이려 했다.
이미 그 안에는 참 믿음, 영생의 믿음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같이
영생을 주시는,
부활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란 것이다.
신약에서의 영생
신약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내용은 바로 이
약속을 통하여 하늘의 도성을 주시는 하나님,
부활을 주시며,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
요한복은 3장 16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나?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영생이다.
영생을 얻는 자가 누리는 곳이 천국이다.
에덴동산은 영생이 있는 자가 있는 곳이다.
천국을 가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은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을 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3:3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영생이 없는 자는 이미 진노가 그 위에 있다.
우리가 잘 이야기 하는 천국 가기 위해서라기 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지만 영생을 얻은 자가 가는 곳이 천국이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 하셨다.
그 물도 무엇을 위해 주는 물인가?
[요4: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물은 목마르지 않는데 이유는 영생하도록 있는 샘물이기 때문이다.
영생이 없으면 영원히 목이 마르다.
그런데 우리가 영생을 받았기에 목마르지 않는 것이다.
천국이 있기에 배가 부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영적으로 그나마 깨인 사람들,
그나마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나?
바로 영생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나눈 대화가 무엇인가?
영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요3:15]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부자 청년과 나눈 대화가 무엇인가?
[마19: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 가이다.
내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이 뭔가?
가진 것을 나누라는 것이다.
왜 이것을 말씀하셨을까?
그 사람이 부자여서 그렇다.
다른 말로
영생을 믿는 자는 세상의 있고 없고에 매이지 않는다.
아니 영생이 있는 자는 세상에 미련이 없다.
영생을 위해서 세상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늘 갈등하고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래서 다 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현세와 내세에 복을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했다.
창세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요6: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영생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사, 선물은 영생이다.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은 영생을 위하여 예수님께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요5: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생 때문에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왔는데
사람들은 나를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요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무엇을 구하러 예수님께 오는가 ?
무엇을 믿으려고 예수께 오는가?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믿음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영생이다.
부활 신앙이다.
예수님은 손도 발도 찍어 버리는 것이 영생을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9: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세상을 다스리며 통치할 권세를 주셨는가?
바로 영생이다.
[요17: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고 설교하는데
성경이 뭐라고 기록하는가?
[행13: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
복음의 핵심은 영생이다.
왜 예수를 믿는가?
창세로부터 잃어버린 그 영생
하나님의 뜻대로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가 받는 그 영생,
그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는다.
영생을 위하여 소망하고
영생을 위해 인내하고
영생의 부르신 부름을 좇아 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뭐라고 권고하는가?
[딤전6:12]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싸움의 본질은 영생이다.
영생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사람들 앞에 선한 증거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도 바울은 어떤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왜 자신을 부르셨는지 말한다.
[딛1:1-2]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의 소망으로 후사,
즉, 영원한 하늘의 도성,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바라고 소망하는
영원한 나라에 서게 하심이다.
[딛3:7]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이 영생이다.
[요일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성령은 영생을 위하여 있다.
[갈6:8]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이 영생을 지켜야 한다.
영생을 지킨 다는 것은 그의 사랑 안에 있으며
그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영생이 있고
믿음이 있는 자는 영생의 믿음 때문에
세상에 미련을 가져 외식하거나
스스로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우리가 이 생명,
영생을 얻었으니
겸손함으로 이 영생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유1:21]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예수를 믿는 것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기 원하시는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 영생의 믿음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며
천국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