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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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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3:13-17)      

 

여러분! 사랑의 시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의 시작은 설렘입니다.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데 설레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사랑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은혜의 시작이 무엇일까요?

은혜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믿어지기 시작하면 은혜가 시작됩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지만 특별히 믿어지기 시작하면 은혜는 시작됩니다.  

 

인생은 사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되는 것인줄 믿습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인생은 믿어지는 인생입니다.

은혜 밖에 있을 때는 사람이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줄 알게 됩니다.

 

인생은 사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열심히 살았느냐고 묻지 않고 믿음이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믿음의 시작으로 은혜가 시작되는 축복된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창조의 시작은 무엇입니까?

빛일까요? 아닙니다.

수면 위의 하나님의 영입니다.

1:2입니다.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리고 말씀입니다. 1:3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리고 말씀 , 소리가 임합니다.

오늘 말씀을 봅니다.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역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이 위에 임하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소리가 임합니다. 말씀이 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은혜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습니다. 사도행전2:4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임하는 곳에 말씀, 소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도 마찬가지 입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평안을 외치셨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장을 보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심으로 사역의 시작이 됩니다.

그때에 우리가 잘 알듯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지만 사실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시게 되는데, 모든 시험들을 어떻게 이기셨는가?

 

말씀으로 이기셨다.

그럼 그 말씀들은 어떻게 나왔는가?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으셨기 때문에 말씀으로 이길 수 있었는가? 그럴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기셨는가? 맞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와 같은 마음, 나와 같은 성품의 사람이셨다.

 

어떻게 이기셨는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이기신 근거는 바로 4장 바로 앞에 있는 세례장면에서 나온다.

그 세례사건 후에 바로 나온 것이 바로 하늘로부터의 소리이다.

예수님의 사십일 광야를 이긴 것은 바로 하늘로부터 들은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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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응답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사십일 광야를 이긴힘은 무엇입니까?

시험을 이기게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소리입니다.

말씀입니다.

그저 글로 읽었던 말씀이 아니라 소리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자라'

 

마귀를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교회됨,

하나님의 사람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소리,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읽고 들었지만

그가 변한 것은 주의 소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시고도 육체적 한계를 넘는 근거가 되고

평생 사역이 근원이 되며 마귀를 말씀으로 이기신 넉넉한 이유가 됩니다.

인격적으로 들었던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능력만 받으면, 성령만 받으면, 권능만 받으면 인생을 살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면서 주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다는 확신,

확신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근원이자 인생과 사역의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은 축복이고 사랑으로 시작된 인생은 축복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사역은 능력을 나타내고 사랑으로 시작된 일은 생명을 낳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생을 포기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인생 전부를 걸고 사명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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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님의 모든 충만의 근거

 

성경을 우리가 다시 그런 근거로 읽어보면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는곳마다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평안의 근원은 어디에서 왔나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없는 사랑으로,  안에 없는 평안으로 자꾸만 사랑하려 하고, 평안을 외칩니다.

가짜 사랑이고 가짜 평안입니다.

 

누가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누가 평안을 줄 수 있습니까?

 

사랑을 받은 사람만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평안을 누려본 사람만이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셨다.

모든 시작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원리이고 사역의 원리이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먼저, 삶의 시작으로 자신에게 세례를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그분을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과 사역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세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고백이다.

세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헌신의 시작점이 바로 세례이다.

 

우리는 날마다 세례를 받아야한다.

무슨 말인가?

나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희망임을 고백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한다.

그것이 유일한 자랑이 되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성질, 고집, 마음은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아끼는 박넝쿨을 사랑하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세례를 받으라. 날마다 세례를 받으라.

세례를 받아야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날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붙잡으니 성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위치 내가 가진 자격 내가 가진 직분의 <권리> 포기 성령의 음성,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듣는다.

 

듣지 않고 하는 모든 열심은 가짜다.

허무하다.

허전하다.

아픔이고 눈물이다.

 

날마다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 그것이 바로 세례이다.

광야는 기득권을 가질 없는 곳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모세야 모세야!라는 음성은 광야 가운데서 들린 하나님의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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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받은 것 만큼 줄 있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지 않고 주려 합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충분히 받지 않았는데 자꾸 주려는 것입니다.

받지 않은 사람이 자꾸 주려니 문제입니다.

 

문제는 받은 경험이 없으니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려는 것입니다.

받지 않고 주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받아 본경험이 없으니 마음의 허전함을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려는 마음이 문제가 됩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예수님을 보기는 했습니다.

따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자격이 되고 힘이 있고 젊어서 강건하게 주를 따를수 있다고 생각했지,

정작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사랑의 용서를 경험한 후에 진정한 제자가 됩니다.

 

제자라고 제자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교인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은 경험, 용서할 없는 죄를 사함받은 사랑의 경험이 있을 우리는 나의 것을 줍니다.

나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게 됩니다.

전까지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리더가 되게 하시고,

바울을 이방의 최고의 사역자로 세우셨습니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초라한 인생,

하나님이 아니면 설명할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아서입니다.

사랑을 알아서입니다.

같은 사람이 은혜를 받은 감사해서 드려도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봄날에 햇볕을 많이 받은 나무가 여름에 꽃을 피웁니다.

여름에 꽃을 피운 사람이 가을에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봄날의 햇볕을 얼마나 받았느냐가 결정합니다. 

 

우리가 드리지 못합니까?

내가 사랑을 받았음을 알지 못하고

내가 얼마나 자격 없는 사람인지 알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직 나의 나된 것은 주의 은혜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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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처절하게 자격 없음을 아십시오. 그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자격 없음을 아는 것이 하늘의 소리를 듣는 시작점입니다. 

자격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을 쓰신 이유, 베드로를 쓰신 이유는 자격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없어야 쓰십니다.

자격이 없음을 고백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들어야 시작입니다.

들려야 시작입니다.

들리게 하기 위해 광야를 지나게 하십니다.

광야는 들리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와 말씀은 같은 어원입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만난 광야(미드바르)에서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지성소(드비르)를 소유한 사람만

살아있는 말씀(다바르)를 듣게 됩니다.  

그때야 말씀이 일하며 말씀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다바르인 말씀은

지성소인 드비르에서 왔으며

지성소는 광야인 다바르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광야는 나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살수 없는 곳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살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고백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신을 벗는 처절한 자기 부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됩니다.

 

한해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열심히 살아야지 결심하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허무함만 있습니다.

열심이 아니라 자격없음을 처절히 고백하는 눈물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는 자기 부인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소리를 듣게 하시고

말씀이 들려지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필요한 것은 소리입니다.

만나를 언제 먹어야 할지,

언제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야할지 아는 하늘의 소리입니다.

소리가 들려야 우리 인생의 하늘의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2018년은 소리가 들리는 복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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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부터 영혼을 품고 영혼을 세우기 위해 기도했더니 하늘의 문을 여시고 광야에서 소리를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던 광야에서 소리의 축복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8 동안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니라

광야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왔습니다.

2012 안식년을 나갔을때 한숲교회에서 1000페이지 짜리 3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첫번째 제목은 <소명>

두번째 제목은 <비전>

세번째 제목은 <하나님 나라> 입니다.

 

제목도 김동인목사님께서 붙이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때 작은 시골교회 은퇴목사님의 책을 출판하는데 도움을 드렸더니 그런 선물을 주셨나 했습니다.

 

푹풍처럼 쏟아지는 글을 받아내기가 버거울만큼 글을 썼습니다.

하루에 한편 많은면 2-30페이지짜리 3편씩을 썼습니다.

찾아오는 영감을 받아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었고,

성령님을 알고 싶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들리는 소리들을 따라 왔더니 놀라운 비밀들을 알게 주셨습니다.

 

책을 계속 글을 써서 이제 글이 천편이 넘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늘의 소리들입니다.

영혼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치던 나에게 주셨던 하늘의 축복, 하늘의 언어들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을 하려 합니다.

광야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따라,

영혼을 세우기 위한 진액을 짜내는 몸부림을 말입니다.

 

소리가 있어야 길을 여십니다.

소리가 있어야 영혼이 살아납니다.

소리를 들어야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렇게 2018년은 다시 시작을 합니다.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다시 세워지기를 기도하며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새해 복 받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복입니다. 
가는 곳마다 복이 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새해 복 되십시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