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는 성령 가지 말라는 성령>(행21:1-6)
같은 성령입니다. 그런데 다른 길을 말씀합니다 .
바울은 성령에 매임바 되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모르지만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20:22)
그런데 제자들은 성령에 감동되어 가지 말라합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4)
어떤 성령이 정답입니까?
같은 성령인데 당사자는 결박 당하러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혼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야합니까 가지 말아야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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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성령 다른 길>
우리들은 반대로합니다.
나는 잘 사는 것을 택하고,
다른 사람은 희생의 자리, 더 깊은 헌신의 자리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나는 죽으러 가지 않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죽으러 가라고합니다.
나는 헌신하는데 인색하고 다른 사람은 헌신의 자리로 끌고 가려합니다.
지금 시대는 반대가 되었습니다.
같은 성령인데 바울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성령에 매임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느 길을 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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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본심>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가는 길이 쉽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든지 가지 않든지 하나님의 길입니다.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 입니다.
아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게도냐로 인도했습니다.
길의 방향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만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대한 나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앞길을 모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위한 자신의 삶이 더욱 가치 있게 쓰임 받기를 바라는 마음, 그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며 살겠다는 다짐과 고백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은 쉬운 길을 가라고 말하지만,
나는 나의 전부를 드리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일을 위해
자신의 희생은 감수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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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세>
복음이 힘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유는 복음을 내가 잘 사는 부적으로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쉽게 예수를 믿고 쉽게 교회를 다니고 쉽게 세상을 살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래를 미리 알고 싶은 이유는 내가 당할 어려운 길을 피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서입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언을 하고 점을 보고 용하다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이유는
내가 좀더 편하게, 내가 좀더 잘 사는 길을 택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도 바울의 심령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때,
아프고 눈물 날때는 전부를 다 바쳐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위해 전부를 드렸지만,
형편이 나아지니 쉽게 예수를 믿으려합니다.
쉽게 교회를 다니려합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우리의 사명을 이루기 보다 더 잘사는 길만 찾아서 그렇습니다.
거꾸로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죽음도 각오하고 살기를 다짐했습니다.
살기가 편해지니 나는 편한 길을 찾고 다른 사람은 더 깊은 헌신의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살기가 편해지니 기도하는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봉사를 하는 것도 불편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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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을 유지하려면>
지금 세대의 풍요는 이전 세대의 불편함으로 세워졌습니다.
이전 세대의 눈물의 기도로 세워졌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헌신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기도와 눈물과 헌신이 지나가고 물질적 풍요가 찾아오니
그런 것들이 불편하고 귀찮게 되었습니다.
지금 누리는 복이 계속 복이 되려면 내가 좀 불편함을 유지해야합니다.
지금 누리는 축복이 축복이 되려면 내가 기도와 헌신과 수고의 자리에 서야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거꾸로 갑니다.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지 말라고 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나는 불편한 자리를 도망가고
다른 사람은 더 헌신하는 자리로 밀어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들 나만 편하고 나면 잘 살면 된다는 생각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은 능력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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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본심>
성령은 늘 사람을 아낍니다.
삼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가장 나중에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의 생기를 흙으로 만든 사람과 하나되기 하셨습니다.
흙속에 들숨 날숨으로 영원으로 호흡하십니다.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그 속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피할 길을 주시고 어려운 길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울을 위해 기도할 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울은 같은 성령 안에서 자신을 향한 고난의 길을 알지만,
더 깊은 성령의 마음,
사람을 향한,
영혼을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원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마음입니다.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성령의 깊은 마음 말입니다.
성령의 본심입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지만 그러나 가야만하고 보내야만하는 길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깊은 생각을 아셨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기에 자신이 손해 되는 길을 가게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예언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압니다.
마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잘 압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성령의 방향성을 압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것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결박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지만 묵묵히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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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생명으로…>
그것이 성령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피와 땀과 헌신과 수고와 생명으로 다른 땅에 생명이 전해집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위해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난보다 사명이 먼저입니다.
자신보다 은혜의 복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한길 보다 불편하고 갇히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반대로 기도 합니다.
결박과 십자가를 피해가기를…
복음이 전파되는 것보다
나의 잘됨과 나의 번성과 나의 영광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프기를 원치 않으시고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해 가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의 헌신의 자세를 먼저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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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야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어느 길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세는 어떤 길이라도 나를 드리겠다는 각오,
결박이라도 당하겠다는 자세,
갇힐지라도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이삭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세를 확인하시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죽여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의 결단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그곳으로 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각오해도 로마에 보내지 않습니다.
다만 로마라도 가겠다는 각오를 받아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통해 주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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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역을 시작하고 주일학교를 맡았습니다.
한해 만에 4-5배의 부흥을 주셨습니다.
청년부서를 맡았습니다.
일년 만에 3-4배의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를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모두다 말렸습니다.
모두다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구보다 사역 잘하는데 왜 가려느냐고 말입니다.
어떤 고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다들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곳 아프리카에 있음을 알았기에
아무 생각없이 하루밤만에 결정하고 이곳 아프리카로 왔습니다.
수 많은 선교지의 정글의 숲속에서 헤치고 돌아보니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놀라운 축복,
놀라운 복음의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다시 모두 다 말리는 곳으로 다시 돌아 가야 한다는 사명을 주십니다.
눈물을 주십니다.
가슴 뜨거움을 주십니다.
왜 아프리카로 와야하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돌아보니 와야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 다른 사역지로 가야하는지 지금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아프리카로 올 때처럼 저에게 부담을 주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자입니다.
그러나 부담을 주시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수 없는 곳이지만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곳으로 가야합니다.
가라는 성령,
가지 말라는 성령입니다.
이곳에 있으면 편합니다.
이미 어느곳보다 사역적으로 생활적으로 편합니다.
그러나 불편함을 감수하고 복음이 증거되는 곳으로 저를 써주시기를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들 말립니다.
왜 가느냐고 말입니다.
저도 모릅니다.
모든 것 내려놓고 이제는 가야 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로마로 가야하는 마음처럼,
내 마음에 복음에 대한 부담,
영혼에 대한 눈물이 있기에 가야합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할 때 지금껏 놀라운 축복으로 영혼들과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앞으로 주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갑니다.
지난 27일에는 파송교회이며 모교회이기도한 남천교회 담임목사님이 은퇴식을 하셨습니다.
긴 세월 수고 많으셨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저는 지금껏처럼 아무것도 의지 않지 않고 주만 바라보고 갈길을 가려합니다.
오직 성령의 함께하심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기도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