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작은 배려입니다> (막8:1-10)
우리는 얼마나 모으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얼마나 잘 보내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모으기 위한 사람은 자기를 광고합니다. 그러나 잘 보내기 위한 사람은 자기를 숨기고 그들을 배려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함께 칠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기적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흘이나 있었습니다. 보총 사람 같으면 집회가 끝났으니 잘 가시라고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 자체입니다. 그들 자체를 돌보셨습니다.
그래서 모으기 위해서 마음을 쓰는것보다 잘 보내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에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3)
예수님은 오는 자들보다 돌아갈 자들을 배려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먹을 것을 쥐어주십니다. 그것이 칠병이어의 기적, 사천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를 남긴 기적입니다.
기적의 동기는 내 이름이 아닙니다.
기적의 시작은 돌아갈 자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마음입니다.
오는것보다 돌아갈 사람들에 대해 배려를 잘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와서 머무르는 것보다 돌아갈 길을 더 세심하게 배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작은 배려지만 그 작은 배려로 그분들에 대한 추억은 늘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잘 먹어서가 아닙니다.
돌아갈 길까지 배려하는 그 마음이 우리를 살맛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찮은 나같은 인간,
그저 스쳐지나가는 잠깐의 인연에도 돌아갈 길에 먹으라는 따뜻한 커피 한잔과 아이들과 함께 누리라는 한끼 식사를 위한 봉투가 눈물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릴적부터 늘 그런 배려를 받고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늘 그렇게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고모님들 이모님들의 그런 배려 속에서 자랐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이런 배려가 당연한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모든 한국 사람들의 정이 그런 배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은 시간안에 이렇게 큰 성장을 했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느끼는 마음은 그런 따뜻함인지 모릅니다.
교회의 어른들에게 느끼는 마음은 그런 따뜻함입니다.
오는 길과 함께 <돌아갈 길>을 배려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길을 가다 기진할까,
그래서 그들을 배불리 먹여 보내려는,
들었던 말씀보다
돌아갈 길을 배려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더 오랬동안 내 인생에 남는...
그런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들의 교회가 이런 배려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배려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는 오천명을 모으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돌아갈 길을 배려하는 마음을 담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기적의 시작은 배려입니다.
돌아갈 길에 혹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돌아가는 길에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해서 혹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까,
돌아가는 길이 혹 불편하지 않을까 작은 것 하나 세심한 마음이 기독교입니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바꾸고
내가 주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거대하고 위대한 내 꿈에
삼일을 말씀을 듣고 혹 마음이 상하고 몸이 상하지 않을까 배려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기독교는 그렇게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오는데...
모으기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꿈에는 예수님의 배려가 없습니다.
돌아갈 걸음까지 챙기는 그 사소한 예수님의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작은 떡 몇조각 작은 물고기 몇개로 수천명이 넘치는 배부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모으기 위해 내 인생을 거십니까
잘 보내기 위해 배려하십니까?
기적은 배려입니다.
배려가 마음을 낳고
마음이 섬김을 낳고
섬김이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전하기 위해 모으는 인생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것을 배려하는 인생이 예수를 믿는 인생입니다.
워낙 거대하고
워낙 위대한 꿈을 다들 꾸시니 예수님의 이 작은 배려는 성경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오천명을 모으고
다만 기적만 보입니다.
내 인생에도 이런 기적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기적은 배려에서 옵니다.
기적은 돌아갈 그들의 마음을 채우는 섬세한 배려에서 옵니다.
우리 너무 모으는 것이 꿈꾸며 살지는 않습니다?
내 꿈만 꾸며 스쳐지나가는 작은 만남에 내 꿈만 담으려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름도 없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준 것은 몇개의 떡과 물고기가 아니라
기독교의 배려의 마음을 채워준 것입니다.
그저 물고기 몇개 떡 몇개로 기적을 배푸신 예수님만이 아니라
돌아갈 길까지 배려하신 그 작은 마음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꿈은 있습니다.
그러나 섬세한 섬김은 없습니다.
다들 위대한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채운 거룩한 예수님의 배려의 마음은 없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기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길을 배려하는 섬김의 마음으로부터 찾아옵니다.
우리가 구할 것!
기적이 아니라
작은 배려가 먼저입니다.
* 토고자니목사님이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저는 통역을 하며 함께 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광고시간에 토고자니목사님이 요하네스버그를 돌아본다고 혹 식사라도 대접하실 분은 자원하시라 했습니다.
아침은 정목사님께서 대접을 하셨고 점심은 장로님께서 하셨고 여기저기 돌아보는 것은 최승렬목사님께서 하루종일 수고하셨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집사님께서 봉투를 주십니다. 토고자니목사님 하루 돌아보는데 사용하시라고 숙스러워 하시며 건네 주십니다.
마음이 찡했습니다. 현지 흑인 목사가 뭐라고 이렇게 배려를 하시는지 가슴이 찡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개인적인 친분도 없습니다. 그저 돌아갈 길을 배려하시는 아름다운 추억과 위로를 위해 베푸시는 마음이 가슴 깊이 전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이런 작은 배려를 통한 감동이 사람을 위로합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얻은 것은 천사의 배려입니다. 걸어 가야할 길을 위해 먹으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왕상19:7)
그가 천사의 배려를 먹고 인생을 포기한 발걸음에 힘을 내어 하나님을 만납니다.
누군가의 이 작은 배려가 절망의 나락으로 달려가는 인생에게 하나님을 향해달려 가도록 힘을 내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일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바꾸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적!
돌아갈 길을 배려하는 나의 작은 배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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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전 오늘의 말씀입니다.
새벽 이른 시간에 새롭게 오시는 김신권선교사님을 모시러 공항으로 갑니다.
작은 배려들을 통해 그분의 가시는 길에 갑절의 영감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갑절의 영감은 기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배려를 할 때 찾아옴을 믿습니다.
인생을 바꾸시고 삶을 사역을 바꾸시며 가정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헤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작은 배려입니다.
그 작은 배려가 기적을 만듭니다.
집도 준비했고, 핸드폰 번호도 미리 열었고, 아이들 학교도, 사용할 것들도 미리 생각을 했고…
작은 배려들… 인생을 바꾸는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