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보다 감정이 더 중요한가요?>(행15:1 - 41)
진리의 싸움은 은혜를 만들지만
감정의 싸움은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싸움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싸움이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내려온 유대사람들과 싸우고,
바울과 바나바가 싸웁니다.
앞에서 싸운 것은 진리의 문제로 싸워서 결국 예루살렘교회에서 진리의 결론을 냅니다.
믿음으로 들어온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구약의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도록 결정을 합니다.
진리의 싸움이 우리의 짐을 가볍게 했습니다.
아름다운 결론을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늘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문제로 싸움을 하고 명분을 가지고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진리의 문제가 아닌 감정의 문제는 결국 사람을 갈라 놓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 여행을 하기로 결정을 하면서
마가 요한도 데려가기를 바나바가 요청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마가가 어렵고 힘든 것을 이유로 그들을 떠난 것이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감정적으로 걸린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을 두고 가자고 하고 바나바는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감정이 상한 바울은 끝내 마가를 버리고 실라를 데리고 갑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갑니다.
<진리는 답을 얻는데 감정은 답을 얻지 못한다>
진리의 문제는 답을 얻으면서 감정의 문제는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정답을 알아도 감정이 상하면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감정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각자 떠난 전도여행에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가는 곳마다 각자의 사명을 다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첫째, 사람을 나뉘게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입니다.
진리에 대하여는 다 용납하면서도 진리가 아닌 문제인데도
감정이 걸리면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귀하게 사용하던 바울도 감정의 문제 앞에 무너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감정의 상함도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일하셔서
그분의 일을 이루어가시지만,
결국 그 감정의 문제로 후회만 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절대 손해보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늘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서신에 마가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마가는 바나바와 그리고 나중에는 베드로의 사역을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자로 귀하게 쓰임받습니다.
바울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늘 불편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그의 마지막 서신에서 마가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꼭 해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정적으로 불편한 사람을 만나 화해하고 싶은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후회하게 되는 것은 감정적으로 불편한 사람과의 화해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마가를 그런 이유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리 문제는 어떤 어려움도 용납합니다.
어디 까지 가서라도 그 일을 풀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문제는 아무리 바울이라도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일중심의 바울은 이것이 흠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늘 소중이 여기는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늘 목적 중심의 삶입니다.
목적이 정해지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사람 중심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다소에서 부르고,
예루살렘 교회 앞에 소개하고 제자들과 교제를 하게 하고
안디옥에 다시 불러 함께 사역을 한 은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그 사람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질을 사용하십니다.
바울같은 기질의 사람은 그런 기질에 맞는 일에 쓰십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정으로 세상 어디든 목숨걸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귄위자라는 별명답게 늘 사람을 챙깁니다.
그래서 바울을 챙겼듯이
마가를 챙깁니다.
마가가 밤빌리아에서 돌아간 것으로 그의 인생의 절망에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사람을 세우듯이 바나바는 그렇게
사람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되느냐
바울 같은 사람이 되느냐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어떤 기질이 되어도 하나님은 그에 맞게 사용하십니다.
강한 기질이면 강한 환경에 보내십니다.
사람을 챙기는 기질이면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정으로 후회되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보다 더 높은 계획과 감정을 넘어서는 일을 하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문제가 있다고 그것 때문에 복음을 손해 보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후회가 됩니다.
나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과 마지막에 화해하고 풀어야 되는 숙제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나의 감정 때문에 손해보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후회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바로 전에 우리가 꼭 해결하고 싶고 후회하는 것은
사랑하지 못한 한가지라고 합니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납하지 못하고
더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나의 감정 때문에 사람을 잃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늘 불편함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수년 전, 수십년 전의 실수를 기억하고
그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안에 매여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약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그릇은 품는 크기입니다.
내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느냐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느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에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내가 얼마나 사랑했느냐입니다.
그 평가가 바울이 마지막 순간에 마가를 부르는 이유입니다.
마가와 바울이 마지막에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했을까요?
하나님이 참 많은 일을 우리를 통해 나를 통해 하셨다 참 감사하다 그렇게 말할까요?
아닙니다.
"미안하다" 일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
참지 못한 것,
용납하지 못한 것 미안하다 일 것 같습니다.
꿈이 큰 사람일 수록,
사명에 붙들린 사람일 수록
옆 사람을 챙겨서 가야합니다.
스스로 큰 일을 한다고 여기는 사람일 수록
실수 하는 사람을 세우고 가야합니다.
우리는 목적에 붙들릴 수록,
꿈이 클수록,
사명이 클 수록 옆 사람을 목적을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비전이 클수록 자신의 비전에 다른 사람을 이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조심해야합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일이 잘 풀린 것으로
바울의 행동이 정당하다 여기면 큰 착각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바울의 그런 행동의 정당성을 보호받는 결과로 일이 잘 풀린 것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요셉을 기억해야합니다.
형들을 용서했던 요셉의 삶은
결국 가장 아름다운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요셉의 삶은 한마디로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기록하지는 못하지만
바울의 업적으로 그의 다툼과 마가를 버린 일이 정당화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잘 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분명히 일 중심의 사람,
목적 중심의 사람입니다.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합니다.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감정의 문제로 또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특별히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을 축복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열매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해결되지 못한 감정의 문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특히 야망이 크고 비전이 크고 교회를 위한다는 목적 안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 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사람을 챙겨야합니다.
늘 사람을 안아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근본적인 정신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빙자해서 너무 많은 사람에게 상처 주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고
나의 목적을 위해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지내다보니
그런 나를 조금씩 보게 됩니다.
내 속에 도사리는 목적 중심의 삶,
일 중심의 삶의 스스로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광야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여기 광야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여기 광야에서…
하나님은 나를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는 진리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다 여기며 살아갑니다.
말은 진리 진리 하지만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입니다.
감정을 돌보지 못하면 결국 사람을 잃습니다.
사람을 잃으면 결국 마지막에 미안하다라는 말을 해야합니다.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감정이 진리보다 앞서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날마다 훈련 해야하는 훈련의 과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에 후회합니다.
후회 없는 삶,
감정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 5년전 글입니다.
진리보다 내 감정에 갇혀 사는 우리를 주께서 불상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에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