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부른 이유>
(행11:19-30)
죄 마지막은 뭘까요? 욕심의 마지막은 뭘까요? 그것은 자기의 영광입니다.
자기의 이름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 자기의 영광을 위해 달려갑니다.
사람이 잘 되는 판을 보면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생깁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와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자기가 담임목사(?)로 파송이 된 것입니다.
다 차려진 상에 다 벌려진 좋은 환경에 목회를 하는 것이
자기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으러 갑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와서 교회에서 일년간 목회를 합니다.
큰 무리를 가르쳤고 그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나바는 잘 준비된 사역지에 혹 걸림이 될 수도 있는 사울을 다소까지 가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함께 사역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
일반적인 요즘 목회의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회에 자기 사역에 걸림이 되는 사람 한사람을 그것도 사람을 돌로 쳐죽인
스데반 사건의 주인공을 불러다 함께 사역한다는 것은 바나바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합니다. 혼자 가면 영광이 되는 길을 그는 부담을 안고 갑니다.
첫째, 그는 성장의 기회를 혼자 가지지 않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또한 <사람> 입니다.
그는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이 곳에서 사역을 하면 더 큰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을…
그래서 그는 사울을 부릅니다.
함께 그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통해 사울이 세워지고 사울의 약함,
과거의 허물,
사울이 다시 세워지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세워질 수 있는 기회를 함께 성장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것이 바나바의 자세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24)
이미 자신의 목회가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25절에 사울을 부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25)
혼자 영광을 받을 자리에 영광을 나누는 자리로 갑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영광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시킵니다.
둘째는 그가 혼자 영광을 차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 함께 일하는 성도끼리, 함께 사역하는 사역자끼리 문제가 심각한지 아십니까?
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 시키기 때문입니다.
자기 영광에 눈이 먼 사람들은 결코 그 영광에 다른 사람을 끼워주지 않습니다.
참여의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고
자기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것에 전부를 걸게 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 영광의 자리에 욕이 되고 부담이 되고 걸림이 될 수 있는 사울을 불러 함께 합니다.
그것이 참 신앙의 자세입니다.
셋째는 나의 모든 환경을 사람을 세우는 기회로 삼습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함께 하자고 하지 좋을 때 함께 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려우니 나를 도와 함께 잘 되는 것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하지
좋은 때 좋은 시간 좋은 여건에 부담이 되는 사람을 부르진 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자세는 하나 입니다.
안디옥의 성도와 교회도 세워야 할 대상이라면 사울도 세워야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가 함께 잘 세워지는 길과 방법을 고민한 그는
성령 안에서 사울을 불러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영광의 이름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 환난 중에 나온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의 영광이 아닌 함께하는 섬김의 마음속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자기만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했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나 혼자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함께 잘 먹고 함께 잘 살며 함께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참 영광의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바나바와 사울이 영적 부담과
사람들의 사울에 대한 선입견과 부담,
그리고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을 나누어야 한다는 부담속에 탄생한 영광의 이름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나누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이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그대로 열매 맺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우리의 사역속에 주의 손이 더하며 주께서 더 큰 무리로 함께 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능력도 있고 재주도 있고 실력도 있고 여건도 있지만
영광을 함께 나누려는 배려와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려는 거룩한 욕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역의 보고를 듣거나 어떤 열매의 결과를 들을 때
이 영광에 나를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함께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엄청난 열매를 주신 것이 결코 자기만의 열심과 수고가 아닐진대
열매 뒤에 가려진 함께한 영광의 사람을 소개하는 사람을 본적이 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실력이 없고 능력도 없으며 가진 것도 없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저의 일은 함께한 사람들의 덕인 것을 잘 압니다.
저의 가장 큰 일중에 하나는 함께한 사람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함께한 사람에게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행사 하나를 마쳐도, 특별한 이벤트를 마쳐도 꼭 함께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를 전합니다.
하다못해 페북 그룹에 잘 참여한 분들께 상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수고한 분들을 기억하고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하는 것!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는 숨은 이유입니다.
섬기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함께 먹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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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사역 소개는 늘 함께 했던 천준혁 선교사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합니다.
한국에서부터 함께 지낸 세월이 지금껏 남아공에 와서 부터입니다.
안식년을 가면 천목사님을 자랑하고
한인분들을 만나고 사역을 보고하면 꼭 천목사님을 더 귀하게 소개합니다.
선교를 오기전 천목사님과 함께하는 원칙 세가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첫째는 무조건 함께 나눈다 입니다.
혹 누군가 물건을 주시던 돈을 주시면 무조건 반을 나눕니다.
사람이 큰 것에 마음 상하지 않습니다.
과일 하나, 음식 하나에 마음이 상합니다.
그래서 한인 분들이 뭔가를 주시면 반을 나누어서 곧 천목사님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혹 한인분이 차비라도 하라고, 뭐라도 쓰시라고 주시면
무조건 천목사님과 함께합니다.
둘째는 천목사님이 없는 것은 나도 사지 않는다입니다.
천목사님이 있으면 사고 없으면 사지 않습니다.
한번은 카메라를 너무 좋아해서 사고 싶었습니다.
다 포기하고 한국에서 왔는데 선교팀이 찍는 것을 보니 너무 찍고 싶은데 천목사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꼬셨습니다.
천목사님 사게 해서 제가 그리고 샀습니다.
셋째는 천목사님이 나 때문에 힘들면 그날로 짐 사서 철수 한다입니다.
나로 인해 함께한 사람이 행복해야 하나님 복을 주십니다.
나로 인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세워져야 내가 세워집니다.
내가 세워지면 다 될 것 같지만 나만 세워지면 결국 다 망합니다.
좋은 분을 좋은 분으로 인정하고 대우 할 때 하나님은 나도 축복하십니다.
은혜로 지금껏 두 가정이 잘 지냈고
천목사님은 사역지를 옮겨 가셨지만 지금도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죄에 관하여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광까지도 그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합니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눌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것을 함께 나눌때 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에 나의 영광만 있는지 아십니다.
사역을 잘 하다 마지막에 힘든 분들을 봅니다.
다 자기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이 결국 바나바와 싸움을 합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갑니다.
바나바는 약한 마가를 끝까지 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약한 마가가 못마땅합니다.
일 중심의 사역자가 있습니다 .
사람 중심의 사역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길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지만
결국 바울은 오랜 시간이 지나 감옥에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사역의 결과로 우리의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나의 사람됨으로 평가가 이루어진다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아야 하는 한가지는 내가 품고 가는 것까지가 나의 수준입니다.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약한 자를 세우고 품고 기다리고 더불어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일상을 말합니다.
주께서 안디옥을 축복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의 이름을 주신 축복의 비결이고
바나바는 그것을 알았고 사울을 영광의 자리 안디옥에 불러들인 이유입니다.
그의 이런 생각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바울을 세우고
안디옥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성령의 토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벌써 5년 전 오늘 글입니다.
사역의, 삶의 원리를 다시 세깁니다.
변함없이 지끔껏 함께해주신 천준혁 선교사님 사모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