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싸움은 환경이 아니라 내 감정입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은 어린 학생부터 어르신들, 그리고 성도들, 목회자, 선교사들까지 다양하다.
나누는 글들은 성경을 근거로 묵상한 내용부터 일상중에 묵상한 일반적인 내용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늘 같은 모습인데 각자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나를 대하는 것이 다르다.
내가 관련되어 있는 교회는 수십교회가 되고 관련되어 있는 분들과 현장은 더더욱 많다.
일일이 그런 현장들을 알고 글을 적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주시는 마음과 말씀을 따라 글을 올리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따라 적용하며 나를 좋아했다 나를 불편해했다 한다.
내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불편한 것이다.
특히 목회자들은 많이 불편해 하기도 하고 또 감사하기도 한다.
늘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할지 원리들을 말씀과 함께 삶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평소에는 은혜를 받지만 교회에 어떤 사건이나 개인적인 관계에 문제가 생길때 나누는 말씀들이
자신의 마음에 거치는 말씀이 된다.
말씀의 원리가 그들의 상황으로보면 손해보고 낮아지는 길을 제시하는 것 같아서 힘들어 하신다.
그러나 나는 늘 글들을 묵상하며 내가 먼저 적용한다.
그리고 내가 소화가 되고 삶으로 그것이 풀리면 글을 올린다.
내가 하지 않으면서 올리는 글은 잘 없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부끄럼이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글의 대부분, 내 묵상의 대부분은 영혼을 말씀 앞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말씀의 원리를 먼저 설명하느라 글이 대체적으로 길다.
내공이 쌓이면 짧은 글로도 감화를 주어 변화가 되는 고수의 경지가 되겠지만,
아직은 말씀을 원리적으로 풀어내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럼없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손해보고 불편하고 낮아지는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말씀의 원리를 따르면 영혼에 유익이다.
때로 말씀이 불편하게 다가오면 그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 맞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늘 불편하면 피하려 한다.
그러나 늘 그렇지만 말씀은 나의 마음과 반대로 온다.
나의 경험을 봐도 시간이 지나보면 반대로 가는 것이 맞다.
그렇게 말씀을 따라 살아온 영혼들은 삶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있다.
눈팅으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말씀을 어떤 토양으로 받느냐에 따라 그 말씀이 길이 되기도하고 거치는 것이 되기도한다.
모두 순전한 마음으로 받는 옥토가 되기를 글을 나눌 때마다 기도한다.
예수님은 씨가 아니라 늘 좋은 밭이 되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내가 좋은 밭이 될 때이다.
십자가의 반대는 내 감정이다.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하면 십자가의 영광은 없다.
나도 그렇게 광야길을 걷고 있다.
그렇게 광야에서 보낸 14년의 세월이다.
외면당하고 배신당하고 상처받고 철저히 홀로된 시간을 보냈다.
이 많은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해본적이 없다.
광야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넘어야 십자가의 길이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우리를 세우신 이유는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핵심이다.
축복의 가나안을 들어가려면 내 감정의 광야를 지나야 한다.
누구나,
모두 광야를 지나지만,
가나안을 들어가는 이는 몇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고 가나안을 들어가야 한다.
다들 내 감정을 넘어야 한다.
그것이 광야를 지나는 이유다.
시대가 악하다.
그렇다고 내 마음까지 어두울 필요는 없다.
말씀의 원리가 내 삶에 습관이 될 때 우리는 환경을 넘어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이라 믿는다.
광야의 싸움은 환경이 아니라 내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