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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는 \'고쳐 주시니\'까지 가야 합니다 2/3>

<나귀는 \'고쳐 주시니\'까지 가야 합니다 2/3>

 

 

<나귀는 '고쳐 주시니'까지 가야 합니다 2/3>

 

<기도의 반대는>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서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의 반대>는 기도 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믿음 없음>입니다.

 

믿음 없음의 모습은 바로 합리와 이성, 타당과 비판, 계산과 논리로 찾아옵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사람이 키운 제물은 안되고 구별해서 키운 것만 드려야 한다고 그것을 비싸게 팔고 세상 돈은 안되고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돈으로 바꾸면서 세금을 많이 걷고 그런 모든 일에는 종교지도자들이 뒤에서 조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하나님께 잘 드려야 한다고 시작한 의식과 제도입니다. 

 

더 합리적이고 더 이성적이고 더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믿음이 사라진 이유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이성과 합리고 그 이성과 합리의 배경에는 늘 더 커지려고 하는 욕심과 더 가지려고 하는 높아짐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니 높은 사람들이 더 악하고 큰 사람들이 더 믿음이 없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무리들을 어린 아이들이라 칭하면서 어린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노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21:15)

 

<가진 자들이 불편해 하는 - 믿음>

 

이미 자리를 가지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귀에는 어린아이 같은 무리들의 노래가 불편합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불편합니다.

믿음으로 이성적 장사치와 믿음으로 합리적 욕심의 매매 하는 자들을 내 쫓는 것도 불편합니다.

왕이면 왕 답고 화려하고 놀랍게 나타나야 하는데 겨우 나귀를 타고 오는 모습도 불편합니다. 

이미 가진 자들의 마음입니다. 

 

잘하려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믿음으로 하려는 것을 보면 속이 뒤틀립니다.

믿음 없이 세운 모든 세상의 것은 믿음이 찾아오면 다 불편해 집니다. 

아니 세상과 믿음은 이미 충돌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높아짐을 택한 세상은 믿음이 우습습니다. 

겨우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만 찾으십니다. 믿음이 답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 기도의 회복>

 

믿음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상관 없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계산적인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시작한 그 방법들이 결국은 기도를 몰아내고 기도하지 못 하게하고 

성전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성전에서 주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함을 상을 엎으시면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증상은 합리와 이성이 득세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고 

그리고 기도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기도가 사라지면 내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변했다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기도>는 합리와 이성이냐 믿음이냐를 결정짓는 잣대입니다.

 

<세상의 방법- 계산적 판단>

 

주님은 상을 엎으시면 오직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 

강도의 소굴은 칼을 들고 총을 든 강도가 아닙니다. 

뱀처럼, 악한 영처럼 합리와 이성으로 말 한마디로 찾아오는 <계산적 판단>입니다.

 

<합당한 것>을 찾지 마십시오. 

믿음은 합당한 길이 아닙니다. 

너무 <이성적인 것>을 구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길은 절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합당한 것을 찾는다면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부르지 않고 더 똑똑한 사람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성적인 것을 찾은 다면 주님은 더 논리적인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나의 삶을 봐도 주님은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 다운 것은 이성과 합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좀 손해보고 

좀 낮아지고 

좀 구차해도 

믿음의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리고 

그것이 세상을 살리는 방법입니다.

 

줄까 말까를 고민하면 줘야 합니다. 

살까 말까를 고민하면 사지 말아야 합니다.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해야만 되는 이성적 판단이 서면 불편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말을 하면 내 속은 후련하지만 말을 한다고 그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