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는 '고쳐 주시니'까지 가야 합니다 1>
세상이 원하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내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속아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힘을 없애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왕의 화려함이 아니라 초라한 나귀를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1:2)
<세상이 놓은 덫- 높음>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높은자리에서 내려와 낮은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더 높은 곳, 더 크게 되는 것을 꿈꾸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꿈 때문에 평생 허전함과 허무함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더 높은 것, 더 큰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란 것을 수 많은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됩니다.
오르면 더 올라야 하는 자리가 있고 어느 정도 높아지면 나보다 더 높은 자리가 있음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라고 소리칩니다.
'호산산 호산나!' 그 말은 '구원하소서'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라고합니다.
세상의 상식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더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더 큰 힘을 가지고 더 높은 자리를 꿈꾸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여신 길- 낮음>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하십니다. 나귀를 타십니다. 말 구유에 나셨고 선한 것이 없는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쓸모없는 어부들이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말을 해도 못알아 듣는 제자들입니다. 그분의 친구는 인맥도 없고 어디 비빌 구석도 없는 죄인들이고 세리들이고 창기들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절대 세상이 요구하는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씀과 너무 먼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시도했던 힘을 가져서 구원하려는 길이 아닙니다.
그 사단이 가는 반대 길!
높아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서 더 낮아져서 구원하는 길을 내 놓으십니다.
<낮음- 믿음의 증명>
세상은 절대로 하지 못하는 길이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고 싶은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힘이 아닙니다.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복하고 싶은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과 심판과 구원을 믿는 자만이 이 땅에서 나귀를 탈 수 있습니다. 저 천국을 믿는 사람만 죄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부활을 믿는 사람만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화려함과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믿음> 입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을 믿기에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잃어버린 유일한 한가지- 믿음>
잘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잃어버린 것은 힘도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왜 나귀를 타십니까? 겸손입니다. 낮아짐입니다. 왜 이 땅에서 낮아지고 겸손하십니까?
하나님이 높이실 것, 하나님이 살리실 것을 믿는 사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사는 삶의 모습이 바로 나귀를 타는 삶입니다. 높아지기 위해 시작된 죄의 근본에서 낮아짐으로 믿음을 증명 하는 것입니다.주님이 보이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 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는 사건입니다. 시장하여 무화가 나무에서 열매를 찾았는데 열매가 없자 예수님이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 이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21:21-22)
<나귀를 왜 타느냐의 문제>
나귀를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귀를 왜 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힘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증명하는 것을 사단적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의 나 됨을 능력으로 자리로 권세로 힘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귀를 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 말 구유에 나고, 아무 선한 것이 없는 나사렛에서 살 수 있고 왕이지만 초라한 나귀를 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기도합니까?>
그런데 믿음으로 나귀는 타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십니다.
매매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의 의자를 엎으십니다.
왜요?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21:13)
누가 기도합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어떤 곳이 되었습니까?
매매하는 사람들의 장소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장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의 반대는 합리와 이성>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성전이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생각과 세상의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합리와 이성>입니다.
믿음으로 서야 할 성전이 더 타당하고 더 합리적이고 더 계산적이 되는 것이 타락입니다.
기도가 왜 무너지는가?
기도는 믿음이 사라지면 무너집니다.
왜 에덴동산에서 믿음을 잃었습니까?
합리와 이성입니다.
세상과 악한 영은 우리를 무너 드리려고 할 때
의심의 <몸>에 합리와 이성이라는 <옷>을 입고 찾아옵니다.
믿음이 있을 때만 기도하는 성전이 합리와 이성으로 계산과 욕심으로 가득 할 때 무너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는 믿음의 길을 걷지 않고 합리와 이성이 득세할 때입니다.
더 합리적이고 더 이성적이 될 때 교회는 무너집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2편 3편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