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그리고 재판석(요19:8-13)
우리의 착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내 손에 있는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내 손에 있다고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내 잡혀온 나의 죄수 예수를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확하게 아십니다.
사람들에게 잡히고 빌라도에게 잡히는 것이 더 높은 위에서 권한을 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명확하게 아십니다.
내가 죽는 것도
내가 사는 것도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주신 권한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나의 권세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내 손에 있다고
내 손아귀에 있다고
내 이름으로 되어있다고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다고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착각입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철저히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주비하신 일이 십자가입니다.
사람이,
사람이 가진 권세로 구원을 이루고
십자가를 가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빌라도가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왜 이것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을 할까요?
구약입니다.
돌 위에 앉은 심판자 빌라도입니다.
반석 위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권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고
스스로 자신을 재판하고
스스로 자신을 죽음가운데 내 놓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빌라도의 심판은 하나님이 심판을 상징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반석을 향하여 심판하시고 그 반석을 쪼개시며
반석에서 물을 내십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오늘 이스라엘의 물 사건과 빌라도의 재판 사건은 같은 맥락입니다.
빌라도의 재판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외치는 사건은 같은 맥락입니다.
구약의 물 사건과 예수님의 법정 판결은 같은 의미입니다.
물이 없어 소리치는 백성과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백성과 같고,
물을 내기 위해 스스로 반석을 치셔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과
스스로 빌라도 앞에 서 계셔서 심판을 당하시며 구원을 여시는 예수님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의 반석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건입니다.
물이 없으면 죽는 가장 중요한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 이스라엘은 소리를 치고 아우성을 부리며 모세를 괴롭힙니다.
왜 우리를 여기에 이끌어 우리 모두를 죽이냐는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야바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위하여 유익하다고 말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백성이 아우성,
백성의 불만,
백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물을 주겠다 합니다.
어떻게요?
자신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세를 향하여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치라합니다.
그런데 그 반석 위에 하나님이 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출17:6]
하나님은 반석 위에 서 계시고 그 반석 위를 모세가 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을 쳐서 반석이 깨지고 그 속에서 물이 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심으로
소리를 치며
아우성을 부리며
고집을 부리며 외치는 그 백성,
어리석은 백성을 향하여 자신이 깨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생명의 물줄기,
생명의 호흡인 생명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오늘 돌 위에 앉았습니다.
심판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
(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13)
그리고 모세처럼 반석 위에 서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지팡이를 치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 권세가 빌라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11)
빌라도는 오늘 착각합니다.
자신에게 구원할 권한도 죽일 권한도 있다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백성들의 아우성과
소리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물이 없다는 외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우매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자신이 심판의 자리에 서서 스스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당한 심판을 자신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구의 지혜도
누구의 해법도 아닙니다.
수 천년 전부터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스스로 죽이시고
스스로 심판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소리치는 우매한 백성을 향한
영원한 생수를 주시기 위해
스스로 반석이 되어
스스로 반석을 깨뜨리시는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그 모습을 이스라엘의 반석사건과 똑같이 재연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이 모습을 위해 구약에서 그렇게 그림자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우연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면
하나님의 섭리며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앉은 돌의 이름까지
재판석에 앉은 빌라도의 모습까지 상세하게 묘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권위 있는 재판석에서
재판장인 빌라도의 권한을 빌어
하나님 스스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판을 통해 죽으심으로
반석에서 생수를 내시듯
오늘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모세가 지팡이 한번 더 쳤다고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왜 화를 좀 내었기로서니
그렇게 달라 들고 오만 방자한 백성에게 화를 좀 내었다고
그렇게 사랑하는 종,
친구처럼 가까운 종을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합니까?
구스 여인도 얻어 살아도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는 형과 누이를 문둥병이 나게 할 만큼 사랑하는
그 모세를 왜 지팡이 두 번 쳤다고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법괘를 사람이 들 수 없습니다.
사람이 들려면 죽습니다.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이 손을 대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을 철저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사람의 힘,
사람의 능력,
사람의 권세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다
내가 너를 죽이든 살리든 권세가 있다는 말에는
나를 죽이는 권세는 위로부터라고 일부러 말을 할까요?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 심판하고
하나님 스스로 반석을 쪼개고
하나님 스스로 생수를 반석에서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그 구약의 그림자를 실체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착각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면
내가 이 교회를 결정했다 생각하면
내가 내 발로 걸어서 이 교회,
이 예수를 믿었다 생각하면
정말 착각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수 천년전부터 반석에서 스스로 심판을 당함 같이
우리를 그렇게 놀라운 섭리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교회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섬기는 그 일이 내가 정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시는 권한으로 되어진 예수이고
교회이고 섬기는 일입니다.
내가 정했다 생각하니
내가 믿었다 생각하니
내 맘대로 예수를 믿었다 안 믿었다합니다.
내가 이 교회를 정했다 생각하니
내 맘이 내키면 이 교회를 다니다
내 맘이 안 내키면 저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착각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이 교회를 다니는 것,
다 위로부터의 권한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믿었다 생각하고
내가 걸어서 이 교회에 왔다 여깁니다.
거기서 우리의 교만이
우리의 문제가 모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권한이며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구원,
그래서 감격입니다.
그래서 감사입니다.
내가 믿지 않았기에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감격하며
오늘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내가 믿었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빌라도입니다.
예수를 믿었다 안 믿었다 하십니까?
모세입니다.
모세를 훈련한 것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자신의 수고,
자신의 열심,
자신의 땀과 자리와 위치는 철저히 사라져야,
아무 의미가 없어야 가능한 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일에 하나님은 그저 모세를 사용하시고
빌라도를 이용하시며
하나님 스스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은 사람에게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붙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붙이는 것은 순종입니다.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순종이 아니라
스스로 열심은 구원을 망하게 합니다.
열심은 사람을 하나님 만듭니다.
열심이 아니라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빌라도를 통해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 심판을 통해
반석에서 스스로 지팡이를 치심으로 생수를 내듯
우리 소리를 치는 인생,
고함을 치는 인생,
목이 마르다고 아우성 치는 인생에게 생명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와서 마시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돈도 없어도 값없이 마시라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감격을
누구든지 와서 마시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거저 받은 은혜 거저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아무 댓가없이 얻은 이 놀라운 구원의 감격이 다시 가슴속에서 뜨거워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잃어버린 구원의 이 놀라운 섭리를 다시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죽어가는 하나님의 심판,
스스로 자신을 재판하시고 죽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전부를 이루어 놓으셨고
이제 구원의 길까지
생명수의 길까지 내셨습니다.
이 소식이 여러분에게 생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 소식이 아무 반응 없는 그냥 소식이라면
당신의 영혼은 진단을 해 봐야합니다.
그냥 감격하고
그냥 감사하고
그냥 기뻐할 수 있는 이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향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죽이고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은 이 말씀이 다시 참 감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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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롱콥교회 개척초창기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감격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서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시고
스스로 죽으시는 하나님!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감동이고 감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