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시작은 섭섭함입니다>
한 두 번 설교는 듣기 좋은 사람이 있다.
한 두 번 밥은 먹기 좋은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잠시 지나가는 사람에게 혹 해서 마음을 다 준다.
그래서 늘 가까이 있고, 늘 함께 하는 사람에게 소홀하고 섭섭함을 안겨 줄 경우가 많다.
늘 가까이 있는 사람, 늘 함께 하는 사람에게 잘해라.
멀리서는 좋아 보여도 가까이 하면 악취가 많이 난다.
어쩌다 듣는 말씀, 어쩌다 먹는 식사에 악취가 숨겨졌는지도 모르고 마음을 다 빼앗긴다.
멀어서 좋은 사람은 그냥 멀어서 좋은 사람으로 두고
내가 집중해야 할 사람은 늘 함께 얼굴을 보고 사는 사람이다.
함께 한 사람들 섭섭하게 하지 말고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같이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야 할 현장은 어쩌다 한번 만나는 듣기 좋은 말씀을 하는 사람이나
어쩌다 한번 밥 같이 먹는 멋져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 속에 허락하신
추함도 보고 못남도 보고 얼굴과 얼굴을 날마다 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같이 있는 사람에게 섭섭하게 하지 마라.
뿌린 대로 거둔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의도는
멀리서 보기에 좋은 말씀 전하고,
보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서 초라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초라한 그들에게 잘 하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늘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내가 손댈 수 없는 것에 마음이 간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것은 평범한 일상에 만나는
날마다 보는 초라한 소자들이다.
그들을 어떻게 섬기느냐로 하나님은 나에게 그대로 갚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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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 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다른 교회 목회자가 설교를 하면
자기의 담임목사보다 더 환호하고 마음을 주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특히 일년에 몇 번 하는 컨퍼런스를 하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 받았다고 적지 않은 물건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현지 교회 담임목사님들이 돌아서서 섭섭해 하는 것을 봅니다.
이유는 평소에는 자기에게 밥 한번 사주는 일이 없는데
어쩌다 한번 듣는 설교에,
그분의 평소의 삶도 인격도 모르면서 한번 설교에 마음을 빼앗겨서 헌신하는 모습이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뭔가 물질적인 형편이 좋은 성도들에게 더 마음이 가고 더 많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일반 성도들이 사역자에게 느끼는 허전함이나 섭섭함과 같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쌓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감정적으로 대하고
교회가 갈등이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을 봅니다.
모든 갈등의 시작은 <섭섭함> 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쩌다 보는, 어쩌다 멀리서 듣는 설교자나 뛰어난 성도가 아니라
나에게 허락하신 공동체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사람들을 더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손님들은 엄청 대접하면서 같은 공동체의 사람들은 밥 한번 대접하지 않는다면
결국 섭섭함은 갈등의 불씨가 됩니다.
사람의 죄성은 늘 내가 속하고 내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손대지 못하고 넘어서는 안되는 곳의 선악과를 넘보게 됩니다.
그들을 동경하고 그들이 나의 성도, 나의 목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선악과를 손댄 결과는 내 공동체의 사람과 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소홀히 여긴 당연한 결과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대로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늘 내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좀 못나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잘하십시오.
좀 못난 사람에게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신앙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가까이 있는 소자보다,
멀리 보이는 다른 것이 좋아 보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내가 섬겨야 할 자들을 잘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