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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

 

자신의 사고와 생각 속에 다른 이의 의견이 자리잡을 공간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통해 들어올 하나님의 생각이 자리할 수 없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통해 찾아 오신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길을 찾았고,

바로 왕은 맡은 관원장의 조언으로 애굽을 살리게 요셉을 만나게 된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통해 나사렛 예수님을 소개 받았지만

마음은 반응은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빌립의 말을 받아 들였고 결국 꿈의 사람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제자가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초라한 목동을 통해,

초라한 감옥에 있는 사람을 통해,

기대 없는 시골 촌동네 친구를 만나게 하시고 이야기를 듣게 하신다.

 

잠깐의 만남과 그들을 통해 전해 듣는 이야기가 평생을 아니 나라를 세우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언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시간이 지나

하나님의 일은 고사하고 힘든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는 더욱 많이 있다.

 

교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제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많은 부분 나와 교제하는 사람을 통해서 온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루는 것은 때로 가까운 사람들,

어쩌다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조언과 생각을 통해 찾아온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작은 조언과

쓸데 없어 보이는 의견이라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겸손함이다.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은 한마디로 <수용성>이다.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크게 사용하시는 사람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수용성이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의견, 그들이 마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모세처럼 지금 일을 하든,

바로처럼 일이라도

하나님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초라한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다.

 

나다나엘은 기대하지 않은 친구를 통해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초라한 나사렛에서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를 만나게 된다.

 

하는 사람들,

아니 초라한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지속적으로 기대되는 사람은 수용성,

초라한 이들의 이야기 일지라도 겸손히 듣는 수용성이다.

 

작은 음성이라도 듣지 않는 수용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사고를 친다.

아니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일은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작은 음성으로 찾아오신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술 때가 아니었다.

지진이 나고 불이 있는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엘리야를 찾아온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소리이다.

엘리야를 살린 것은 세미한 음성이다.

 

크고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나,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혹은 잠시 잠깐 스치는 만남을 통해 찾아 오기도 한다. 

 

그러나 수용성이 훈련되지 않은 사람, 작은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엘리야처럼 강한 바람과 산을 가르는 능력이나,

지진과 불처럼 임하는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찾기에

일상으로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많은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게 된다.

 

주의 일들을 보는 것은 세미한 음성도 크게 듣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공간을 남겨둔 사람들의 몫이다.

 

엘리야 시대처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바라고 기대하는 시대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그런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니라

작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 주의 일하시는 공간을 남겨 두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일상으로 만나는 작은 사람들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이 희귀하게 진행 된다.

 

작은 음성도 크게 듣는 하나님의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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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마음 아프게 다가 온다.

이드로가 이야기한 조언은 모세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시스템을 무시하는 듯한 이야기이고

바로 왕에게 맡은 관원장이 제안한 감옥 속의 요셉은 전혀 기대할 없는 사람이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평소 생각하던 나다나엘에게 예수는 허황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느끼는 감정은

첫째,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하는 이야기이다.

둘째, 내가 해오던 방식을 포기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셋째, 하나님의 뜻보다 뜻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한다.

내가 해오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선교 이야기를 같은 선교사님들께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러 운명처럼 만나게 하시는 만남들이 있다.

그럴때 자연스럽게 나온 선교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린다.

 

그러면 가지 반응이 나온다.

하나님의 공간을 남겨두는 수용의 사람과

당신의 형편은 나의 형편과 달라서 나는 없다며 흘려 듣는 사람이다.

사람의 크기는 능력의 크기가 아니라 수용성의 크기이다. 

선택은 본인들의 몫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시간이 지나면 작은 세미한 음성을 듣지 않으면

힘들게 지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나에게 적용 되는 이야기이다.

세미한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놀라운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셨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공간인 세미한 음성을 받아 들이는

수용성의 공간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그래야 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선교 현장이 산다.

 

세미한 음성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이다. 

문제는 세미한 음성을 듣는 <수용성> 이다.

수용성의 크기가 인생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