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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의 결론(마7:13-29)

산상수훈의 결론(마7:13-29)

 

 

 

 

산상수훈의 결론(마7:13-29)

 

좁은 길은 나의 믿음을 지키는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은 <형제를> 지키는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라고하십니다.

좁은 길이 뭐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착각합니다.

아니 사단은 우리를 오해하게합니다.

믿음을 단지 내 인생을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으로 오해하게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뭘 얻지 못하면 더 열심히 하라고합니다.

열심이 없어서 열매를 얻지 못한 것처럼 오해하게합니다.

아닙니다.

열심이 없어서 열매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뭔지,

좁은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게합니다.

 

바로 알지 못한 지식으로 사는 모든 곳에는 좋은 열매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기에

그로 인해 나오는 모든 열매는 나쁜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나무의 정체는 열매입니다.

 

산상수훈이 말한 결론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큼 남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내가 아닙니다.

남,

형제입니다.

 

형제가 없는 선지자 노릇,

형제가 없는 귀신을 쫓는 능력,

형제가 없는 권능은 나쁜 열매입니다.

 

좁은 길은 나의 어떤 것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은 형제, 남을 위한 길이고 믿음의 길입니다.

 

나를 위한 길이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니면 형제를 위한 길이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형제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는 <나> 를 위한 길을 택하는 순간입니다.

그 세상에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길은 나를 위한 믿음의 길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죽고 <남>을 위해 사는 길에 <생명>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길이 더 좁은 길일까요?

나를 위한 길과

나를 대우하듯 남을 대접하는 길중에 어느 길이 좁은 길이겠습니까?

 

열매로 나무를 알고 열매로 우리의 생명을 결정하십니다.

그 열매는 나의 어떤 열매가 아니라 바로 성령이 맺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맺는 열매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나무가 열매를 맺게합니다.

 

나의 공로,

나의 의로움,

나의 열매,

나의 이름으로는 어떤 것도 능력이 없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파괴한 이름이 <나>입니다.

지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오직 나만 있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좁은 길을 갑니까?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오직 한가지 방법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씨가 떨어져 죽어야 열매는 맺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나만 있는 세상에 나를 살리는 방법은 나를 죽이고 형제를 세우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나를 살리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하늘의 지혜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반대입니다.

나를 향해 더 열심히 살라고합니다.

나를 위해 권능도 행하고 귀신도 쫓고 선지자 노릇도 하라고합니다.

그것은 불법입니다.

내가 죽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뜻입니다.

내가 사는 법입니다.

 

이끄심의 법칙입니다.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정과 욕이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로 시작된 죄의 세상에

나는 죽고 남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좁은 길이고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내가 보장이 이미 된 세상입니다.

나의 본질적 추구였던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보장해 놓았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그것을 믿는 사람만 믿음의 길, 좁은 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니 나의 길만 갑니다. 넓은 길인 나를 세우는 길만 갑니다.

그래서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나를 내려놓고 형제를, 하나님을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먼저 나를 챙깁니다.

믿음이 없으니 나만 보이고 형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평생 기도하고 나의 어떤 것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고 형제를 위한 기도,

형제의 삶을 세우는 것은 간증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왜 좁은 길일까요?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믿음은 나의 먹고 사는 모든 것은 이미 보장된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형제를 위해 사는 것이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오해합니다.

 

내 안에 갇혀서 오직 기도는 나만 있고 형제는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려는 것은 있고 형제를 높이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아니라 형제를 높이는데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한 길,

나 하나를 지키기 위한 길은 좁은 길이 아닙니다.

그것이 넓은 길입니다.

나를 위한 길이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나를 내려놓고 내가 한알의 밀이 되는

형제를 먼저 세우고 대접하고 높이는 길입니다.

나보다 형제를 높이는 길,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의와 나라입니다.

내 나라가 아닙니다.

나의 의가 아닙니다.

 

사단은 자꾸 나를 위해 기도룰 사용하라고합니다.

세상은 자꾸 나를 위해 믿음을 가지라고합니다.

아닙니다. 그 길을 지나야합니다.

나는 이미 보장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인생은 이미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통해 보듯이 먹이고 마시운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믿음이 없기에 좁은 길을 가지 못합니다.

나만 보이고 내 인생만 보이고 내 나라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만 위해 살던 세상에

나를 한 알의 밀과 같이 죽고

형제를 먼저 대접하고

하나님을 먼저 대우하는 길이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나 찾는 넓은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길입니다.

그러나 길이 협착하고 찾기 어려운 길은 믿음의 길,

즉 형제를 위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잘 생각해야합니다.

권능도, 선지자 노릇도, 귀신을 쫓고 하는 어떤 힘도 아닙니다.

왜요?

그 중심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이 형제일 때 진짜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맺는 열매는 다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나무가 맺는 열매입니다.

가지에 붙은 열매는 나무가 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열매,

내가 맺은 열매는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라 하신 예수님이 맺는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는 형제이고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만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람, 형제는 없습니다.

나무는 열매가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고

나는 나의 먹고 사는 것만 원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지만 결국 먹고 사는 것입니다.

내 이름 내고, 내 권능을 내고, 내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입니다.

성령의 법은 오직 형제를 향하여 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나(형제로 부르신)를 위해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십자가는 나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형제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했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이유가 나라면,

주여 주여 기도하는 이유가 나라면,

주여 주여 믿는 본질이 나 때문이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무엇일까요?

반석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믿음의 방향성이 형제를 향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믿음을 전제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가 중심이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이 이끄시는 형제를 향한 삶,

형제로 인한 열매를 맺는 삶이 반석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가 중심이 된 집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나만 있습니다.

형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이야기의 본질은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형제를 위한 삶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의입니다.

내 나라와 내 의가 아니란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산상수훈의 내용은 그렇게 우리에게 경고하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의는 결국 자기의 의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경고후에 모든 내용이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십니다.

살인하고,

욕하고,

예물을 드리고,

고발하는 자와 함께하고,

간음하고,

아내를 버리고

선한 일을 하고

맹세를 하고

구제를 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모든 내용은

결국 <형제와의 관계>를 풀어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자기만의 나라와 의로 시작된 세상입니다.

그 세상의 답은 자기가 아니라 형제를 세우는 곳에 길이 있게 하신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좁은 길은 무엇입니까?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가 아니라 형제를 내 삶의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믿지 않는 자에게 주신 복음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자들입니다 .

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복음은 너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나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이 있다면 형제를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만을 향한 복음,

나만을 향한 믿음,

나만을 향한 주여 주여는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쌓은 성이라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7:24)

 

나를 위한 어떤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한 어떤 것이 없는 인생,

형제를 위한 어떤 수고가 없는 인생은

모두 거짓선지자이고

모두 모래 위고,

모두 불법이고

모두 나쁜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는 마지막 판단 근거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형제>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5-46)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형제에서 시작해서 형제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이 납니다.

 

영벌과 영생의 구분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입니다

형제입니다.

그런데 나만 보이고 나만 구하고 나만 챙기는 사람은 결코 지극히 작은 형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 목적을 이루는데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극히 작은 자가 나의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돌아봐야합니다.

형제가 중심이지 않는 사람,

형제를 향하는 인생이 아닌 것은 믿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씀,

심판의 근거까지 지극히 작은 형제라는 것을 말씀드렸는데도

우리는 이것이 아니라고 믿고습니다.

여전히 나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나만 위한 복음이라면 아담이 지은 죄와 무엇이 다를까요?

세상의 것과 무엇이 하나님과 다르겠습니까?

 

복음은 그래서 복음입니다.

나만 아니라 나를 지나 형제를 세우는 복음,

그것이 좁은 길이고

반석 위에 지은 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8장부터는 오직 <믿음>만을 이야기합니다.

 

이 좁은 길,

형제를 위한 길에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나의 하나님이 먼저 믿어져야 형제를 위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부활이 믿어지고,

영생이 믿어지는 사람,

지금 이 땅이 아니라 저 천국을 믿는 사람만

걸어갈 수 있는 길,

형제를 위한 길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는 것!

형제를 먼저 세우는 것!

그것이 율법이고 선지자입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입니다.

내 인생의 중심에 형제를 먼저 세우는 것!

믿음입니다.

 

* 한국 교회 목회자 중에 큰 영향력을 끼치시는 정주채목사님을 만나서 잠시 교제를 했습니다.

선교팀으로 오셔서 지나는 길에 잠시 뵈었습니다.

목회를 잘마치시고 은퇴하신후 더 바쁘게 지내시는것 같습니다.

아마 지냈던 삶이 바른 복음위에 다른 사람을 세우는 바른 삶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잠시의 만남이 감사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잘세우는 나의 사역과 삶이길 소망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