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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perfect를 원하신다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perfect를 원하신다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perfect 원하신다

마태복음5:48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 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이다.

 

살인자였던 모세도 용납하시고

 

간음했던 다윗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버리는 못난 남편 아브라함도 용납하시고

 

그렇게 죽음으로 따르겠다던 제자 베드로도 저주하고 부인했음에도

 

다시 사명을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허물이나 약함도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알았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착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perfect 원하신다.

 

하나님은 온전함을 원하신다.

 

그것이 성경의 ,

 

하나님의 뜻이다.

 

 

 

 

 

 

어제는 제목 왔다.

 

그런데 나는 정리가 되지 않아 넘겨 버렸다.

 

아니 부담이되 넘겨버렸다.

 

 

그랬더니 어제는 말씀을 푸는데 애를 먹었다.

 

멍하니 하루가 갔다.

 

새벽1시에 글쓰기를 마쳤다.

 

 

 

 

거부하면 멍해진다.

 

해야 ,

 

마음이 오면 해야 한다.

 

 

 

 

어제 왔던 것을 이제 정리 해야 한다.

 

 

마음이 부담이다.

 

 

이런 제목으로 하기에는 내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없다.

 

가라시니 간다.

 

 

 

 

 

온전!

 

Perfect 이다.

 

 

 

 

 

 

어제 올린 글은 온전을 피해서 들이다. 

 

피해가고 싶은 것은 제목이다.

 

그래서 중간에 온전이라는 말이 들어갔다.

 

부담되는 제목이다.

 

 

아무튼 시작해 보자.

 

 

 

 

 

 

 

 

전에야 겨우 산상수훈을 전체적으로 이해를 했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말씀인지.

 

 

아직 마음을 안주시니 산상수훈을 시작할 수는 없다.

 

 

 

전에 올린 주기도문은 주일 가정 예배 전한 것을 올린 것이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보며 놀란 것은

 

하나님은 온전함을 원하신 다는 것이다.

 

 

 

 

부족한 우리가 온전할 있는가?

 

도대체 얼마나 온전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에 이를 있는가?

 

 

 

 

 

 

 

 

 

 

 

 

 

 

 

온전함의 시작은 뜻을 알고부터다.

 

 

 

 

어제 늦게 자고 일찍 일어 나서인가

 

잠이 와서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 성경 말씀들이 날아 다닌다.

 

말씀에 말씀이 꼬리를 문다.

 

말씀의 의미가 가슴으로 온다.

 

잠이 깨어 다시 책상에 앉았다.

 

 

 

 

 

 

 

 

온전함은 아버지의 마음이라 했다

 

 

 

 

 

뜻을 이해해야 뜻을 이룬다.

 

뜻을 알아야 그분의 온전함에 들어간다.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 우리의 온전함의 시작이다.

 

 

온전함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뜻을 푸심이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이다.

 

 

 

 

천국은 포도원 품꾼을 부르는 주인이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마음이다.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우리도 온전하여 진다.

 

 

 

 

 

아버지의 뜻을 아는 만이

 

아버지처럼 된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 하라고 하신 것은

 

뜻을 풀어주는 예수님의 뜻을 온전의 시작이 된다.

 

 

 

 

 

 

아니 아버지를 향하여 뜻을 이루어 가는

 

추구함을 가질 있다.

 

 

 

 

 

 

 

 

 

 

온전은 하나님을 향한 추구함

 

 

 

온전은 하나님을 향한 추구함이다.

 

 

다윗은 실수가 있었으나 온전하였다고 성경은 그를 인정한다.

 

 

 

 

 

 

 

 

 

온전의 반대말은 불완전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모름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가졌으나 그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름,

 

하나님의 뜻을 모름이었다.

 

 

 

 

지식으로 앎은 앎이 아니다.

 

 

 

 

가슴으로 마음으로 아는 .

 

그것이 온전의 시작이다.

 

가슴이 오면 온전을 향한 추구함이 시작이다.

 

 

 

 

 

심장과 창자가 뒤틀리는 .

 

예수님께서 백성을 향하여 민망히 여기시는 앎을

 

우리에게 앎이라 말한다.

 

 

 

 

 

 

 

 

우리에게 어차피 온전은 땅에서 불가능 이다.

 

그러나 성경이 인정하는 온전, perfect

 

 

 

 

 

온전은 방향성이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하늘을 향하고

 

하늘의 마음을 향하는 그것,

 

안에 것을 향하는 추구함이 온전함이다.

 

 

 

 

그런데 방향을 모르면 온전은 정말 불가능이다.

 

 

 

 

 

 

 

 

 

 

온전은 아버지의 마음이 마음이 되는

 

 

 

 

 

온전은 진정한 완벽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아는 마음이다.

 

 

 

 

 

지혜는 듣는 마음이라 했다.

 

 

 

 

어디에 온전함이 시작되는가?

 

아버지의 ,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리이다.

 

 

 

 

 

 

 

듣는 자는 복이 있다.

 

 

 

 

끊임 없이 들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아버지의 뜻을 알라는 것이다.

 

 

 

 

그분의 진정한 뜻을 앎이 온전함의 시작이다.

 

 

 

 

 

 

 

 

 

천국은 아는 자만 안다 했다.

 

 

 

[마13:10-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내가 진정 비유들을 안다고 말할 있는가?

 

 

 

나는 허락되어진 사람인가 아니면 모르는 사람인가?

 

 

나는 지금까지 몰랐다.

 

아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답답하니 이제사 그것을 풀어주신다.

 

 

 

 

 

 

온전의 시작은 ,

 

창자가 끊어지는 민망히 여김으로 아는 앎이

 

안에 있는가?

 

 

 

 

 

 

 

 

이제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있는 단어들의 뜻을 알아보자.

 

 

 

 

 

 

 

 

 

< 용서 >

 

 

 

 

 

용서에서의 온전은 무엇인가?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이 어떻게 나왔는지 아는가?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인용하고 사용하고 기억하는 말씀이다.

 

그대로 우리가 두세 사람이 모여 있으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모임을, 우리의 함께함을 합리화 하고 그분이 함께 함으로

 

위로를 누리는 말씀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다.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소자를 위한 말씀

 

 

 

 

말씀의 배경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가를 여쭈면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그러다 천국에서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

 

소자가 천국에서 크다 말씀하시고

 

믿는 소자가 실족케 하면 달고 죽는 것이 낫다고 했고,

 

범죄하는 , 다리를 자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마리의 잃은 비유를 통해 절대 소자 사람 잃어지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땅에서 풀고 매면 하늘에서 풀리고 매인다?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잘아는 말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도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말씀을 하신다.

 

 

 

 

후에 오늘 말씀인 사람이 모인 중에 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말인가?

 

 

 

 

소자 하나가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자 하나 살리기 위해

 

땅에서 매고

 

땅에서 하늘도 열리고 하늘도 닫힌다는 것이다.

 

일을 위해

 

사람이 모일 주님이 그들 중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한마디로 소자 하나가 너무 중요하고

 

하늘을 열고 닫고 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번에 일곱 ! 무엇을 위해서?

 

 

 

 

이런 맥락에서 바로 말씀이 나오는 것이

 

형제를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에

 

 

'일흔 번씩 번이라도 해라' 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용서는

 

소자 하나를 잃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번에 일곱 번이라도 참아야 만큼 아버지에게는 소자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소자를 향한 마음이 어떠한지 이것을 먼저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입에 말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일흔 번에 일곱 번을 절대 용서 못한다.

 

 

 

 

용서는 다른 말로 사랑이다.

 

사랑의 다른 얼굴이 용서이다.

 

 

 

 

 

 

 

일만 달란트 비유

 

 

그리고 바로 후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하는 임금이야기가 나온다.

 

 

일만을 빚진 자는 자기의 일만을 탕감 받았으나

 

데나리온()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결국 백을 탕감하여 주지 않은 일만 용서 받은 자는

 

무서운 벌을 받는다.

 

빚진 대로 갚으라고 결론이 난다.

 

 

 

 

일만 빚진 자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임금의 마음이다.

 

 

오직 한가지다.

 

 

 

일만 달란트든지 데나리온이든지 때문에

 

사람을 잃지 않으려는 임금의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가 받은 벌은 빚진 모든 것을 갚으라는 것이다.

 

 

용서 받은 자가 다른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받았던 모든 것을 다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번째 심판인 죽음이 있고,

 

번째 심판인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있다.

 

 

 

 

우리가 일만 달란트 만큼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도 다른 백데나리온 빚진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계산을 해야 한다.

 

다시 그분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심판을 다시 받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심판을 다시 해야 만큼 우리의 용서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진정 그분의 용서를 받았는지 확인해 보는

 

심판대이다.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 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고발한다.

 

그때는 진짜 심각하다.

 

 

 

 

 

나의 죄만큼 그들이 나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면 우리는 당장 옥에 갇힌다.

 

 

 

 

 

 

우리가 언제 용서의 온전함으로 나아가는가?

 

 

 

 

 

용서하신 아버지의 마음,

 

소자도 잃지 않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시작이다.

 

 

 

그때 우리는 용서의 온전한 자리에 서게 된다.

 

 

마음을 모르면 우리는 결코 용서의 완벽한 자리에 없는 것이다.

 

 

 

 

 

 

 

< 자비 >

 

 

 

 

[눅6:36]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마12: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의 온전함 용서는 소자를 잃기 원치 않으시는 그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이라 했다.

 

 

 

 

자비도 마찬가지이다.

 

 

 

 

위의 말씀처럼 자비의 시작은 구약에서 많이 나온다.

 

 

출34:6 곧 여호와께서 모세 앞으로 지나가면서 이렇게 외치셨다.

 

'나는 여호와, 여호와이다. 불쌍한 이들을 한없이 측은히 여기며(자비)

 

가난한 아들을 바라보면 가슴 아파 견디지 못하는 하나님이다. (현대어성경)

 

[출34: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개정)

 

 

 

 

구약의 자비

 

 

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언약을 맺으시며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을 당시

 

자신을 두고 말씀이

 

여호와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정의 하신다.

 

불쌍한 ,

 

가난한 이들을 보면 가슴 아파 견디지 못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

 

 

추수할 때는 밭의 모퉁이의 곡식은 손대지 말고 고아와 과부가 먹도록

 

자비를 베풀라고 율법으로 정하셨다.

 

 

 

 

 

 

 

제사보다 자비를

 

 

 

 

 

예수님도 동일하다.

 

 

 

[마12: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제사보다 우리가 자비를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라시는 마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을 좇아가는 기본 마음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 자비 > 있는지 아는가?

 

 

 

 

자비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의 성품이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율법사가 영생을 하는 방법을 물으셨다.(10:25)

 

그때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을 말했다.

 

예수님은 아는 대로 하면 영생이 있다 말하자

 

율법사는 자기의 아는 ,

 

하고 있는 것을 자랑하려고 이웃이 누군지 물었다.

 

 

 

 

그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신다.

 

강도 만난 자를

 

제사장도,

 

레위인도 모른체 하고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이 고치고 치유하고 돌본 이야기를 하신다.

 

 

 

그리고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다.

 

 

 

 

들어야 하다.

 

 

 

 

나의 이웃이 아니다.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누구인지 물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찾지 못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야 하늘의 뜻이 보인다.

 

온전함에 이를 있다.

 

 

이웃은 내가 바라보는 나의 이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강도 만난 ,

 

소자,

 

간음하다 잡힌 ,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는

 

그들의 입장에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는 자비의 시작이다.

 

자비의 관점이다.

 

 

 

 

 

부자청년

 

 

부자 청년도 똑같은 질문으로 예수님께 찾아왔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있나요?

 

계명을 지키라.

 

내가 지켰습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온전을 말씀하신다.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온전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은 자비가 반드시 포함된다.

 

 

 

 

 

진정한 온전은 우리의 것을 나누는 것이다.

 

아니 나누기 전에

 

 

 

가난한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며 나는 자비의 하나님이라

 

불쌍한 자를 보면 한없이 측은히 여기고

 

나는 가난한 자를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디지 못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

 

마음을 알면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나를 향한 그분의 뜻을 알게 된다.

 

 

 

 

 

[히2:17]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자비에서 시작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자비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약5:11]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그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다.

 

 

 

 

예배는 자비로운 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는 시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자비의 마음을 알아 드릴

 

우리는 그분처럼 자비의 온전함을 이룰 있다.

 

 

 

 

 

 

 

 

 

< 예배 >

 

 

 

 

[요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온전하지 못한 자는 예배의 중보가 없다.

 

구약의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정결예식을 거행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되어

 

 

 

[히5: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과 우리의 온전한 중보가 되셨다.

 

우리는 그분을 업어 거룩함으로 온전하게 하셨다.

 

 

 

[히10:14]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완전한 자는 완전한 예배를 중보한다

 

 

 

 

예배는 온전한 자만이 완전한 중보가 있다.

 

구약에서 레위지파를 택하고

 

제사장을 택하고

 

 

온통 제사의식은 거룩, 성결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거룩, 성결의 그림자가 그리스도이다.

 

 

 

 

 

그가 고난과 순종과 인내를 통해 온전하여 져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길을 내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온전하신 그분으로

 

함께 온전하여 지는 것이다.

 

 

[히7:28]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율법은 온전하지 못하나,

 

그분 그리스도가 단번의 온전한 제사로 영원한 하늘 길을 여셨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 암아 온전하게 되어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며 담대히 나아갈 있는 것이다.

 

 

 

 

 

구약부터 그렇게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

 

진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분만이 구원의 길을 연다.

 

 

 

 

[히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를 유일하게 예배의 ,

 

하나님께 나아가는 온전함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다.

 

 

 

 

 

 

 

 

앞에서 기록한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말씀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에 나온 이야기이다.

 

 

 

 

구약의 예배는 한곳에서만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 인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저곳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 했는데

 

말이 무슨 말인가?

 

 

 

 

 

 

 

 

영과 진리?

 

 

 

 

요한복음 8장에서 진리를 설명한다.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뭔가?

 

 

진리가 뭔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아들이다.

 

바로 그리스도다.

 

 

[요1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 한다.

 

 

예수님이 없이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한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데 진리가 예수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가 마음에 있으면 우리는 아버지께 예배할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고난과 인내를 통해 온전케 되고

 

온전하신 그리스도가 내신 길을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도 온전케되어 아버지께 나아갈 있다는 말이다.

 

 

 

 

예배하는 자는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예배하는 자는 예수그리스도, 하늘 길을 내신 진리 예수그리스도로 예배할 지니라.

 

 

 

말이 되는 것이다.

 

 

 

 

 

 

예배의 온전함은 구약에서는 자유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자유 하지 못했다.

 

죄에 매여 때마다 시마다 제사를 통해 뿌림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온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물의 피가 아니고

 

아들 자신의 피로 단번에 길을 내신 길을 우리가 그분으로 온전하게 되어

 

진리, 예수로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히9: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씀이다.

 

 

 

 

 

 

그럼 영으로 예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6: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온전한 예배는 무엇인가?

 

 

 

[요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렇다.

 

 

예배하는 자가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힘입고

 

그분 성령의 영이 우리가운데 계셔서 성령으로 힘입어 예배하는 것이

 

온전한 예배이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

 

그것이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열쇠이다.

 

 

 

 

구약은 이것을 몰랐다.

 

감추어졌고 아는 자만 알게 하셔서

 

하나님의 택한 자만 드리도록 하셨다.

 

 

 

 

 

히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온전한 예배는 영원한 다음 세상의 기업을 약속 받게 한다.

 

 

 

 

 

 

예배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나라,

 

예수님께서 예배하신 영원한 나라의 상속자로 서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는

 

오늘을 보지 않고

 

온전한 내일을 보는 것이다.

 

 

 

 

 

 

구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것을 보았지만 얻지 못했다.

 

 

히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가?

 

가나안을 받았다.

 

그런데 받지 못했다 하는가?

 

 

 

믿음의 선진들은 보았다.

 

 

 

영원한 나라.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그러나 보아도 때가 차지 않아,

 

하나님의 경륜이 이르지 않아 만질 없었던 그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만지고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기업을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온전한 예배는 영이신 성령과

 

모든 제사와 죄와 구속에서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예배가 perfect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영원한 기업을 받지 못한다.

 

소망이 사라진다.

 

우리는 온전한 예배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길을 내셨는가?

 

이렇게 독생자 예수를 죽이시면서 까지 구원의 길을 내셨는가?

 

 

 

 

 

앞서도 말했듯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보지 못하시고

 

가난한 자를 마음 아파 힘들어하시고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그냥 두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명의 소자라도 잃어지기를 원치 아니하시며

 

명의 죄인도 버려두기를 싫어 하시는 하나님이다.

 

 

 

 

[시51:17]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한 마음,

 

아프고 상한 사람들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서 고난 당하고 아파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온전하라고 하신다.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 perfect하라고 하신다.

 

 

 

 

뭐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살인자도

 

간음한 자도

 

우상을 섬겼던 자도

 

부르셔서 그분의 사람으로 세우셔서

 

약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소망이 있구나 생각하고

 

그분께 나아오며

 

신령과 진정을 예배하고

 

마음으로 용서와 자비의 ,

 

온전하며,

 

Perfect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침 6,

 

아침 9,

 

정오  12,

 

오후 3

 

 

 

그리고 마감 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힘이 없어 사람들이 주지도 않고

 

가난해서 눈에 띄지도

 

재주도 없는 사람을

 

포도원에 거저 들여보내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읽어야 한다.

 

 

 

 

 

 

그리고

 

심정이 나에게도 있을

 

우리는 정말 온전하여 지는

 

온전함을 향한 추구함이 시작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고

 

함께 가슴 저미는 창자의 뒤틀림을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거룩과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온전하니 우리도 온전 하라 하신다.

 

 

 

 

 

 

예배하는 자가

 

자비를 배푸는 자가

 

용서하며 사랑하는 자가

 

온전의 자리에 있을

 

아버지는 영원한 나라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것이다.

 

 

 

 

 

 

 

포도원 주인의 심정이 들리는가?

 

 

 

마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눈물소리가 들리는가?

 

 

15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간음한 여인을 향한 한없는 용서와 자비와 영혼을 향한 뜨거움이 느껴지는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뿐만 아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만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돌을 던지려던 많은 사람들 향하여 그분의 온전함을 보여주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말씀은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지 못하게 하려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다.

 

 

말씀은 가운데 있는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영역과 울타리와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간음한 여인을 향한 돌이

 

언젠가를 나를 향한 돌이

 

그분은 동일하게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소자에게 돌을 던지라."

 

 

 

음성은 하나님이 온전하심이다.

 

 

 

 

음성은 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알게 하는 말씀임과 동시에

 

다시 세상을 향하여

 

온전하심,

 

perfect 원하시는 그분의 진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마7: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눅13: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 내가 온전하니 너도 온전하라 >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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